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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03화 (10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03화

왕립학술원 내의 아주 소박한 중정 벤치에 엘리자베스가 앉아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벤치 쪽에는 차양이 있어 통로에서 벤치로 가는 길은 젖지 않았지만 뚫린 하늘에서는 비가 끝없이 쏟아졌다.

우중충한 하늘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더 우울해지는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통로 쪽에 삐쭉 나와 있는 옷자락이 보였다. 케빈이다.

케빈은 중정으로 나가는 통로 옆에 서서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케빈은 오랫동안 그러고 있다가 엘리자베스가 케빈 쪽을 노려보며 손짓하자 슬그머니 나와서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갔다.

“그, 그렇게 놀랄 줄 모르고…….”

“…….”

엘리자베스는 빨개진 눈을 비비며 숨을 내뱉었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다가 입맛을 다셨다.

“다, 다시는 놀라게 하지 않겠습니다!”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잘도…….”

“지킬 건데요?”

“너 저번에도 그랬잖아!”

엘리자베스가 울컥해서 소리치자 케빈이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끼잉 소리를 내며 흠칫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우울한 눈으로 시선을 떨어뜨리자 엘리자베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왜요? 이 책 너무 어려워서요? <유기화학의 역사>. 얼씨구, 목차 봐라. 총론을 이렇게 엮는 학자는 솔직히 학술원에 이름을 올리면 안 되죠.”

케빈은 엘리자베스가 들고 있던 책을 빼앗아 들고는 쓰윽 훑으며 말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거 루이 교수님이 엮으신 건데.”

“……아.”

케빈은 조용히 책을 덮고 다시 엘리자베스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케빈에게 말했다.

“루이 교수님은 갑자기 왜 이렇게 날 미워하시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왜긴요. 루이 교수님은 바보니까요? 총론도 못 쓰시잖아요.”

케빈이 그렇게 말하며 <유기 화학의 역사>를 가리키자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쿡쿡 웃어버렸다.

케빈은 그런 엘리자베스를 빤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시선을 느끼곤 얼굴을 빨갛게 달궜다.

“흐뭇하다는 듯이 그렇게 보지 마. 나보다 3살이나 어리면서.”

“3살이면 뭐요. 그 정도면 결혼도 하겠구만.”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빈의 팔뚝을 꼬집었다.

“뭐라는 거야! 미쳤니?”

“아! 왜요! 뭐가! 그냥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거예요!”

“객관적인 사실을 말해주지, 케빈 퍼킨. 너는 파혼당한 너보다 3살이나 많은 여자랑 결혼하지 않아! ‘경’ 칭호를 받은 뒤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귀족 영애와 결혼해서 승승장구하지!”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에게 보이지 않게 입모양으로 뭐라고 중얼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푹 내쉬고 말했다.

“어쨌든, 루이 교수님이 바보인 건 사실이에요. 교수님이 이틀 전에 있던 발표회 이후로 엘리자베스의 퀴닌 발표 논문이 이오페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홀램브로 학술지에 실리도록 힘쓰고 계시다고요.”

“……뭐? 홀램브로?”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놀란 얼굴을 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홀램브로 학술지에 실리기만 하면 앞으로 엘리자베스야말로 부교수는 건너뛰고 바로 교수자리를 노릴 수 있을 거예요. 길어봤자 1년? 반 년 안에도 가능할지 모르고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굳었다.

“1년…….”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어지자 케빈이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너무 길어요. 아이고, 욕심도 많으시네. 나는 이제 부교수 심사 받는데.”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케빈은 엘리자베스가 위험한 전염병에 걸렸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정확하게 엘리자베스의 병이 엘리자베스의 몸에 어떤 결과를 낳는지 알지 못했다. 의식 소실, 이라고 짧게 표현했을 뿐이니까 말이다.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약을 만든다며 엘리자베스의 피를 뽑아가 실험했던 쥐는 엘리자베스의 피를 주입받자 일주일 동안 폭력적 성향을 통제하지 못하다가 그냥 죽어버렸다. 폭력적인 성향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쥐가 몰록이 되지는 않았으니 인수공통 전염병은 아닌 셈이었다.

그때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몰록이 되기 전에 엘우드 밀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아니, 아닐 수도 있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가능한 것’과 ‘실제로 할 것’ 사이의 차이점을 알게 된 어른이다.

어른답게 굴어야 한다.

‘하지만 인생은 한 번뿐이니 아쉬워도 지금부터라도 잘 살아야겠지. 죽지 않고 잘 살아야겠지.’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말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에게 우연히 주어졌던 기회는 이제 끝나버렸다. 지금부터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을 만들어야 한다.

“케빈. 얘기할 게 있어.”

“지금 하고 있잖아요, 얘기.”

“농담이 아니야. 진짜로. 중요한 얘기야.”

엘리자베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케빈을 내려다보았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뭔데요.”

“프란시스를 부탁해.”

“그 부탁 언제 하나 싶었어요. 엘리자베스가 밤새고 나는 안 새는 날엔 로킨트로 가서 있을게요. 그럼 되죠?”

케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늘도 늦게 들어올 거죠? 무슨 가정교사인지 뭔지 그거 하려고. 알겠어요. 내가 갈게요. 내가 로킨트에 가서 프란시스 부인을 즐겁게 해드리죠. 내가 원래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그나마 언변이 좋은 편…….”

“부탁이 하나 더 있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하이고. 내가 그렇게 필요하세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날 죽여줘.”

엘리자베스의 말에 키득거리며 농담을 하던 케빈의 움직임이 멎었다.

“뭐……. 방금 뭐라고…….”

“나는 이제 3개월 남았어. 3개월 안에 너는 절대로 내 치료제를 개발해줄 수 없어. 왜냐하면 나는…….”

엘리자베스는 케빈 앞에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께에서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후회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모든 것들이 후회로 남았다.

왜 이런 일이 나한테 벌어졌을까. 왜 나한테만.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괴물이니까. 하지만 사람으로 죽을 거니까. 나를 죽일 약물이 필요해. 내가 그간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어. 왜 엘 선생님이 늘 특수한 물질을 바른 총알을 가지고 다녔을까. 내 생각은 이거야. 내가 변하기 시작하면 나를 죽일 수 있는 약물이 있어야 할 거라는 거.”

“아니, 잠깐, 잠깐만요!”

“나는 변할 거야, 케빈 퍼킨. 그때가 오면 나는 네가 알던 엘리자베스가 아닐 거야. 그땐 나를 반드시 죽여야 해. 네가 죽이든 내가 죽이든, 우리 둘 중 하나가 해야 돼. 안 그러면…….”

“싫어요…… 싫다구요! 미쳤어요?”

케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러면 리오든은 망해. 망해버릴 거야. 괴물이 두 마리나 돌아다니니까.”

“괴물이 두 마리라니. 그게 무슨 뜻인데요?”

케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였다.

쏴아아—

아까까지 실낱처럼 쏟아지던 비가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이 거세게 몰아쳤다. 케빈을 보며 서 있는 엘리자베스의 뒤통수는 물론이요, 케빈의 얼굴에 빗물이 튀었다.

두 사람은 뭔가를 속닥거렸다. 빗소리 탓에 소리는 조그마한 중정 밖을 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곧 케빈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 지르곤 엘리자베스를 남기고 비를 맞으며 다른 쪽 통로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가버린 쪽을 보며 가만히 그곳에 서 있었다. 한참을.

그러자 곧 케빈이 울먹이면서 담요를 들고 통로로 다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케빈을 보았다.

케빈이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갔다.

* * *

케이는 우산을 쓰고 정문 앞으로 나갔다가 비를 쫄딱 맞고 서 있는 여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문 열어.”

여자는 빗물 때문에 가늘게 찢어지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케이는 당장이라도 정문을 열고 여자의 몸을 자신의 품 안으로 당겨와 탐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앰버가 사람을 보냈을 텐데? 오늘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케이는 정문을 열어주지도, 우산을 건네주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당혹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앰버가 없다고?”

엘리자베스의 물음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빗물이 어깨에 떨어질 때마다 몸을 떠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때로는 케이의 뒤로 펼쳐진 타운하우스에서 야생 고양이들이 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화들짝 놀라는 것도 말이다.

케이는 어제 엘리자베스가 두 번이나 넘어진 것도, 엘리자베스의 옛날 방에 들어가자마자 몸을 웅크린 것도 떠올렸다. 그렇게까지 공포에 질렸으면서 비까지 맞으며 이 청승을 떠는 여자가 케이는 무척이나 미웠다. 케이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까 들어오지 마.”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깨를 감싸쥐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파리하게 젖은 얼굴로 말했다.

“알겠어. 그런데 수업료 정산은 어쩌지? 그럼 내일은 좀 일찍 올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냥 가지고 다신 오지 마. 네 말대로 우리는 구제 불능이야. 그래도 돈으로 처 발라서 고용인들을 찾고 귀족들에게 귀한 선물을 하면 그럭저럭 봉합하겠지. 귀족들만큼 돈에 약한 종자들을 나는 본 적이 없으니.”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을 노려보며 그 말을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또 나를 상처주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버리고 앰버와 약혼해놓고도 여전히 자신의 심장을 할퀴지 못해 안달인 이 남자가 황당했다.

“돈은 돈이니까 받으면 그만이지만 나와 약속한 건 앰버니까 네 멋대로 정하지마. 내일 올게.”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케이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의 입에서는 초여름인데도 비를 맞으며 15분이나 걸은 덕에 입김이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을 요량으로 돌아섰다. 엘리자베스가 세 걸음이나 걸었을까.

쿠쿵!

머리 위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철제로 된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와 거의 동시에 거친 손길에 엘리자베스의 팔을 잡았다.

“오지 말라고!”

케이의 거친 음성이 엘리자베스의 귓전을 때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손이 잡힌 채로 어이가 없어서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우산을 내동댕이치고는 엘리자베스를 마주 노려보았다.

“넌 대체 뭐가 문제야!”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가슴을 때리며 소리를 지르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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