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02화
어두운 밤, 창가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인영을 본 앰버가 놀란 나머지 서랍장 문고리를 잡았다. 그 서랍 안에는 리볼버가 들어 있었다. 그러자 앰버의 기척을 느낀 남자가 물었다.
“쏘려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서 있는 남자가 케이라는 것을 깨달은 앰버는 한숨을 내뱉었다.
“깜짝 놀랐잖아. 안 그래도 덩치는 더 커져가지고.”
앰버는 그렇게 말하며 벽지에 머리를 쿵 기댔다.
“잠이 안 오지?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어서 그래. 내가 밑에서 먹을 것 좀…….”
“됐어.”
케이는 단답했다.
앰버는 케이의 표정이 보고 싶었지만 왠지 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 여자. 더 이상 오지 말라고 해.”
케이가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앰버는 고집스럽게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케이를 어이없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이미 돈도 다 치렀어. 끝난 얘기잖아.”
“그깟 돈 그냥 줘버려.”
“부자들은 통이 다르네.”
앰버가 피식 웃으며 위스키를 꺼내 얼음을 넣은 잔에 살짝 따랐다.
“너도 마실래?”
“오지 말라고 해.”
앰버는 동문서답하는 케이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머리핀.”
앰버의 말에 케이가 뒤를 돌았다.
케이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앰버는 솔치노 호텔 앞에서 보았던 그 끔찍한 얼굴과 지금 케이의 얼굴이 무척이나 닮아서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곧 의지를 다잡고 말했다.
“주인한테 돌아가지 못한 선물은 원혼이 되어 떠돈다던데.”
“또 지어내긴.”
케이는 제 머리를 헝클이며 창틀에 손을 대고 몸을 기댔다.
“마셔.”
앰버는 케이에게 몇 발자국 걸어가 자신이 마시던 잔을 내밀며 말했다. 3개월 전부터 케이가 갑자기 위스키와 담배를 끊었다는 얘긴 들었지만 오늘은 술의 힘이 필요한 날일 듯싶었다. 그러나 케이는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쉴 뿐이었다.
“잘 어울릴거야.”
케이의 말에 앰버가 물었다.
“머리핀?”
“아니.”
“그럼 뭐가.”
앰버의 질문에도 케이는 그저 클레몬트 공작부부의 것이었던 잘 정돈된 정원만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는 오랫동안 그 정원을 바라보며 말이 없다가, 앰버가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불쑥 물었다.
“공작부부의 죽음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앰버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달빛에 가려진 케이의 표정을 읽지 못해 의아한 듯 물었다.
“아는 거 있지. 화재 테러로 죽었잖아. 귀족들에게 반발한 평민 폭도들이 한 짓이었지. 처형당할 때 연일 화제였으니까 멜니아에 있었어도 그 정도 소식은 알아. 내 조국의 소식이잖아.”
앰버의 말에 케이가 여전히 어둠 속에서 표정을 감춘 채 말했다.
“화재 테러로 죽었다고? 머리에 총구멍이 난 자들이 어떻게 화재 테러로 죽은 걸 수가 있어.”
“무슨 소리야?”
앰버의 질문에 케이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앰버는 뭔가 답답하게 막힌 듯한 기분으로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몇 장의 그림을 보았다.
새까맣게 탄 시신의 그림이었다. 앰버는 이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특유의 화풍이 검시관들이 시신을 부검할 때 그리는 그림에 쓰이는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앰버는 새까맣게 탄 시신의 머리 부분에 구멍 같은 게 뚫려 있고, 그 뚫린 구멍 위에 작은 글씨로 ‘열상 3’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열상은 상처의 종류를 쓴 것이고, 3은 크기를 쓴 것이다. 열상이라는 말은 어딘가에 찢긴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왜 열상이야……? 누가 봐도 총상…….”
앰버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뭔가를 떠올린 듯이 화급하게 케이를 보았다.
“이거 공작부부의 검시 기록이야?”
케이는 대답하는 대신에 앰버를 지그시 보았다. 앰버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공작부부가 살해당한 거야? 테러에 휘말려 죽은 게 아니고?”
앰버의 말에 케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앰버는 이를 악물었다.
“너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구나. 아니, 우리를. 우리를 의심하는 거야. 우리가 엘리자베스의 부모를 죽였을까 봐.”
“‘우리’를 의심하는 거지.”
케이는 그림자 속에서 나와서 앰버에게로 걸어왔다. 앰버에게 케이의 표정이 뚜렷하게 보였다. 앰버는 그제야 케이의 엉망인 얼굴 속에 흉측하게 드러나는 감정을 읽어냈다.
“우리가, 내가, 공작부부를 죽이는 데에 일조했는지 묻고 있는 거야, 앰버.”
케이의 말에 앰버는 당장 케이의 뺨을 올려붙이고 싶으면서도 꾹 참고 말했다.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야?”
“아니.”
“믿지 않으면 또 우리를 외면할 건가?”
또, 라는 말에 케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앰버는 케이를 보며 어이가 없어졌다. 그래서 더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손을 쓰지 않았다고 해도 공작부부가 죽은 건 잘 된 일이야. 덕분에 네가 완벽하게 자유로워졌고 레본 땅에서 평민들이 흘린 피와 눈물을 착취해먹던 귀족의 머릿수가 둘씩이나 줄었잖아.”
앰버의 말에 케이가 앰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앰버는 주먹을 꽉 쥐고 케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지? 대답해.”
케이는 웃었다. 앰버는 이 미친놈이 왜 웃는지를 몰라 황망한 기분으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그래도 계속 웃었다.
오만하고 삐뚤어진 특유의 표정으로 계속.
“고마워. 정말 고마워.”
“무슨 뜻이야?”
앰버는 왜인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내가 그 여자를 다시는 못 볼 이유가 또 생겼네. 안 그래?”
케이의 말에 앰버는 다급하게 케이를 불렀다.
“케이. 케이……!”
하지만 케이는 이미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가서 문을 활짝 열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꺼져줘.”
쾅!
문짝이 거센 소리를 내며 닫히자 앰버는 혼자 복도에 남아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앰버는 그 자리에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서랍장에서 수면제를 꺼내어 위스키와 함께 삼켰다.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날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엘리자베스가 눈이 퉁퉁 부어서 출근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루이 교수님은 해롱거리는 엘리자베스를 3번쯤 다그치다가 나중에는 약간 포기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댁에 계신…… 분은 잘 계시나?”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가 프란시스를 시모라고 부르려다 말고 어색하게 물었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행히도요. 큰 문제는 아니었어요. 마차는 잘 썼습니다, 교수님.”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은 루이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큰 문제였다고 해도 연구는 이어가야 해. 인생에 무슨 일이 생기든 우리는 후세를 위해 연구하는 과학도들이야.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네. 엘리자베스.”
루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네?”
“그래서 대체 실험 보고서는 어디 간 거야!”
“……아, 자, 자, 잠시만요!”
엘리자베스는 조금의 전조 증상도 없이 폭발하는 루이 교수의 성정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실험 보고서를 찾아서 엉망진창인 제 책상을 뒤졌다. 엘리자베스가 등 뒤에서 이어지는 폭언에 공포에 덜덜 떨고 있으니 케빈이 옆에 슬그머니 와서 고개를 저었다.
“위험해요. 위험해.”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긴요. 지금 엘리즈가 교수님한테 딱 찍혔다는 뜻이죠.”
“왜. 내가 요 며칠 좀 혼을 빼놓고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케빈은 루이 교수의 미간에 깊게 패인 골을 힐끔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좀 있으면 교수님이 당장 연구 논문 주제를 가져오라고 닦달할 걸요?”
“아직 퀴닌 개발도 안 끝났잖아.”
엘리자베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실험 보고서를 찾아냈다. 광산에서 다이아몬드를 찾아낸 광부가 이보다 기쁠까. 엘리자베스는 후다닥 루이 교수에게 실험 보고서를 가져갔다.
미생물 배양에 관한 실험이었는데 저온 살균과도 관련이 있는 보고서였다. 루이 교수는 엘리자베스의 실험 보고서에 단위 실수를 발견하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기초적인 실험 보고서도 못 쓰나? 단위를 실수하면 실험 결과가 완전히 반대가 되어버리잖아! 내가 언제 위대한 과학자가 되라고 했나? 적어도 성실한 인간이 되란 말이야! 엉?!”
엘리자베스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루이 교수에게서 실험 보고서를 받아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달달 떠는 엘리자베스를 본 케빈이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이라구요. 시작.”
뭐가 시작이라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온종일 비가 오는 바람에 루이 교수가 오늘 시킨 실험을 하긴 어려울 거라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날엔 실험실 습도 관리가 어렵고 습도 관리가 되지 않으면 미생물 배양은 또 엄청난 오차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짜증이 잔뜩 나신 교수님이 실험 보고서를 보고 엘리자베스를 엄청나게 갈굴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할 일이 없어서 더 멍한 기분으로 도서관으로 내려왔다. 두꺼운 책을 한 권 꺼내들고 그 책을 다 읽고 난 뒤 타운하우스로 출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책을 10페이지도 읽기 전에 문득문득 고개를 들었다. 자꾸만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분명 자신을 불러서……
엘리자베스! 로킨트 저택에서 연락이 왔는데, 프란시스 부인이 쓰러지셨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
엘리자베스는 심란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프란시스가 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메이드를 한 명 더 고용하겠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약초는 불태웠고 동시에 술도 딱 한 병만 놔두고 나머지는 전부 정원에 뿌려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출근하기 전에 메리에게 50파운트를 주면서 이번 달만이라도 새벽에 프란시스 방을 한 번씩 들여다봐달라고 부탁했다. 메리는 50파운트를 거절했지만 엘리자베스가 한사코 돈을 쥐여 주었다. 메리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돈을 쥐여 주지 않으면 자신이 불안할 것 같았다.
그렇게 모든 상황이 일단락되고 나서 학술원으로 출근한 것인데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까.
“엘리즈!”
그때였다. 불쑥 옆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엘리자베스를 부르며 나타난 것은. 엘리자베스는 비명을 질렀다.
“으악!”
엘리자베스가 소리를 지르자 도서관의 모두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사서는 화난 얼굴로 혀를 찼다. 케빈은 제가 지레 놀라 엘리자베스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며 입을 가렸다.
“아, 아니……. 왜요……. 많이……. 놀랐어요?”
“놀랐잖아.”
엘리자베스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들고 있던 책을 가지고 도서관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