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100화 (10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00화

엘리자베스가 한참 주저앉아 있다가 천천히 제 쪽으로 걸어오는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정말로 케이가 이곳의 사용인들을 죽여버렸어요?”

“예? 아뇨…… 아니, 네…….”

“그게 무슨 대답이에요?”

엘리자베스가 날선 눈으로 에드워드를 보자 에드워드가 망설이며 대답했다.

“죽은 건 사실인데 케이가 죽인 건 아니에요.”

그들이 전부 죽었다고? 엘리자베스가 당황한 눈으로 물었다.

“왜요?”

“사용인들 대부분이 클레몬트 공작부부의 세금 횡령을 도운 죄로 붙잡혔거든요. 그런데 대부분이 경찰청에 화재 테러가 난 날 죽었어요. 화재 테러에서 용케도 도망친 사람도 있다고 했는데 케이가 굳이 그걸 알아보니까 공작부부의 가솔은 전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되었더라구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재 테러가 난 날, 그들도 경찰청에 있었고 살아 있었다면 엘리자베스가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용케 도망친 사람들은 전부 엘리자베스가 치료해줬으니까.

그리고 공작부부의 가솔까지 전부 보비들이 잡아들였다면 이유는 공작부부를 잡아들인 것과 비슷한 것이리라. 공작부부의 어쭙잖은 협박에 분노한 국왕은 공작부부를 죽임으로써 입을 막고 싶어 했다. 가솔들의 입 역시 그랬겠지.

엘리자베스는 그들이 전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왜인지 모르게 자신을 둘러싼 과거의 망령이 조금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랬군요. 알겠어요.”

“넵.”

에드워드는 축축하게 젖은 소매로 바닥에 자빠져 있는 엘리자베스를 일으키는 것은 포기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엘리자베스는 나가려는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케이의 손은요? 왜 저렇게 된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에드워드가 걸음을 멈췄다.

* * *

엘리자베스가 결국 300파운트까지 받아서 기숙사에 돌아왔을 때는 기분이 정말 거지같았다.

엘리자베스는 뭉근한 통증이 올라오는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기숙사 외벽에 기대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덕에 나중에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손을 짚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담배.

담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여기며 셔츠 안을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담배가 발견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분노까지 치미는 것을 느끼며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익숙한 얼굴이 초조한 표정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엘리즈!”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보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왜인지 모르게 케빈이 엘리자베스가 약혼자도 있는 남자의 품에 안겨 미련을 떨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탓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빈은 그런 엘리자베스의 기분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표정으로 얼른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와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어디 있었어요! 로킨트에서 연락이 왔단 말이에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고함에 깜짝 놀라서 진실을 말할 뻔했다.

사실 전 약혼자의 약혼자를 가르치러 전에 내가 살던 타운하우스에 갔다 왔어, 케빈. 거기에서 전 약혼자의 품에 안겨서 바들바들 떨다가 하지 말았어도 될 얘기를 잔뜩 하고 왔어. 심지어는 이상한 소리도 듣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까지 했어.

엘리자베스가 시키지도 않은 고해성사를 하려고 할 때 그보다 앞서 케빈이 말했다.

“프란시스가 쓰러졌대요! 약물 중독인 것 같다는데, 자세한 상황은 일단 의사가 봐야 알 것 같아요. 왕진 의사는 불렀다는데 엘리즈도 가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옴니버스는 끊겼을 텐데, 사정 설명을 했더니 교수님이 마차를 빌려주신다고…… 엘리즈……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 주저앉았다. 케빈의 목소리는 음성이 아니라 그저 작은 소음처럼 엘리자베스의 귓가에서 윙윙 거렸다.

프란시스가 쓰러졌다고?

‘숨기려고 한 거든, 아니든, 숨겼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저녁에 올 테니 같이 밥을 먹는 건 어떠니? 바쁜 건 알아. 저택까지 올 필요도 없고 시내에서 한 끼만 같이…….’

‘……오늘은 진짜로 케빈을 도와야 해요. 제가 낸 아이디어 때문에 케빈이 곤란해하고 있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오늘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하던 프란시스의 표정과 함께 무도회가 있기 전날 밤에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 앞에서 말했던 음울한 고백을 떠올렸다. 천장을 보며 하던 프란시스의 음울한 고백 말이다.

‘……난 정말이지 엄마를 닮았어.’

프란시스의 그 생각을 어떻게든 교정했어야 했다. 프란시스는 프란시스의 모친과는 다른 여자라는 걸 그녀의 뇌리에 확실하게 심어줬어야 했다. 프란시스는 다른 삶을 살 거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말했어야 했다. 왜 그러지 못했을까.

그것은 엘리자베스가 이미 한 번 보고 온 미래에 대한 잔상을 떨치지 못해서, 운명을 바꾸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사실은 운명에 대한 체념을 마음속으로는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것일까?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손길을 떠올렸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물었다.

“마차가 어딨어?”

* * *

엘리자베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로킨트 저택에 도착했을 때, 마구간에서 제일 먼저 손님을 맞이해야 할 토비가 보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초여름인데도 몸이 달달 떨리는 것을 느끼며 문고리를 잡았다. 벌써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콧물을 훌쩍 들이마시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양복 차림의 남자가 놀란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아이고, 제가 딱 가려고 하니까 오셨네요.”

양복 차림의 남자는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며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가방을 보고 그가 왕진 의사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본론부터 말했다.

“프란시스는요?”

“아, 부인께서는…….”

남자는 자신을 따라 나온 걱정스러운 표정의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번갈아보더니 곤란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에게 눈짓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가 나오게 한 뒤 문을 닫았다.

메리는 체념한 듯 부엌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밖에 나오자 한숨을 길게 끌며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그는 한 모금을 길게 빨았다가 불어내고 말했다.

“……부인께서 위험한 약물을 이래저래 많이 쓰시던데요.”

남자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위험한 약물이라고? 엘리자베스는 선뜻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남자가 주변을 살피는 시늉을 하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약초라고 부르시는 것들 말입니다. 말아서도 피우시고 물담배에 넣어서도 피우고 때로는 직접 흡입도 하시는 것 같던데요.”

남자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주먹을 쥐었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프란시스가 쓰러진 이유인 ‘약물중독’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어이가 없었다. 프란시스가 때때로 향이 좋다고 약초를 여기저기 넣어 피우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성분에 중독성이 있으리라는 것을 모른 것도 아닌데 엘리자베스는 안일하게 대처했다. 메리에게 프란시스가 술과 담배를 멀리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한 게 전부였던 것이다. 로킨트 저택의 턱없이 부족한 사용인들 중에서도 가장 일이 많은 메리에게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중독이라는 게 어떤 뜻인지 책에서 얼마나 많이 봤던가? 중독이란 단순히 의지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나 우울증 환자들의 경우 의지를 통해 중독을 끊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우울증이 심한 환자들은 심할 경우 난독과 같은 집중력 장애를 겪고 무력감에 취해 스스로를 서서히 죽여가기도 한다고…….

……책에서나 읽었지 제 주변의 사람을 둘러볼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에게 분노를 느꼈다.

“뭐 귀부인들에게 종종 있는 일입니다만, 앞으로는 믿을 만한 가게에서 약초를 사시고 정량만큼 사용하도록 주의해주세요. 웬만하면 끊는 게 좋겠지만 쉽지 않죠. 저도 담배에 중독되어 있으니까요.”

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제 손에 들린 연초를 가만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영혼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지금은…….”

“일단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본인도 놀라신 모양이에요. 사실 본인보다는 사용인들이 더 놀란 것 같았습니다만…….”

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있는 콜린과 토비를 슬쩍 턱짓했다. 엘리자베스가 그쪽을 보자 토비는 얼른 도망가고 콜린은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엘리자베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왕진비는…….”

“아, 20파운트입니다.”

엘리자베스는 품 안에서 지폐를 꺼내어 의사에게 내밀었다. 의사는 가방을 내려놓고 지폐를 받아들고는 까먹었다는 듯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약값을 청구하지 못했네요. 수면에 문제가 있으면 약에 더 깊게 중독되는 분들이 있어서 부인께 효과가 좋은 수면제를 처방해드렸습니다. 가격은 30파운트예요.”

“30파운트요?”

엘리자베스의 물음에 의사가 말했다.

“네. 죄송하지만 신약이라서요. 부작용이 있는 약을 처방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곤란하시면 약을 바꿔드릴까요?”

의사가 말하자 엘리자베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스는 품 안에서 지폐를 꺼내 값을 치렀다.

자존심 따위 650파운트에 팔기를 잘했다. 엘리자베스는 비싼 약값에도 망설임 없이 지폐를 꺼낼 수 있게 되자 앞으로는 더 싼 값에도 자존심을 팔아넘길 자신이 생겼다.

누군가가 자신의 자존심을 사가고 싶어 한다는 게 어디인가. 앞으로는 타운하우스에 수업을 하러 가서 절대 케이와 싸우지 않을 것이다. 케이가 돈을 준다면 받을 것이고 그게 정당하지 않은 노동의 대가라도 적선이라도 감사해할 것이다. 이제는 케이에게 동정을 받는대도 상처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의사가 돌아가는 것을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 콜린이 아까와는 달리 평온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맞이했다. 엘리자베스는 다급한 표정으로 콜린에게 물었다.

“메이드를 하나 더 구하고 싶어요. 얼마면 되죠?”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마주한 콜린의 표정이 굳었다.

“아가씨…… 부인 때문이시라면…….”

“24시간 상주하고 있어야 해요. 그러니 손님용 침실 두 개 중 하나는 메이드 방으로 바꿔야겠죠. 그 값까지 치를게요. 그러니 제발…… 제발…….”

엘리자베스는 부들부들 떨며 벽에 손을 짚었다.

“메이드를…… 구해줘요…… 돈은 얼마든지…… 흐흑…… 얼마든지…….”

엘리자베스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비벼 닦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