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99화
“상당히 거슬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는 순간 또 숨이 쉬어지는 자신이 의아했다. 케이가 이 저택에서 자신을 빼돌렸던 구원자였기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져 엘리자베스는 멀쩡한 척하며 스프 그릇을 주웠다.
“……미, 미안하게 됐네. 나도 좋아서 올라온 게 아니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나무바닥에 묻은 스프를 닦아보려고 했다.
“젠장…… 그래도 호두나무로 만든 바닥이라서 잘 뒤틀리진 않을 거야.”
엘리자베스는 마침 들고 왔던 냅킨으로 서둘러 스프를 닦았지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엘리자베스가 제 셔츠 소매가 붉은 스프로 물드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앉아서 스프만 닦고 있으니 케이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올려다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뭘 보고만 있어? 좀 도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어쩐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도 돼?”
“어?”
“알겠어.”
케이는 특유의 삐뚜름한 얼굴을 하곤 단숨에 엘리자베스의 잘 접혀 있는 몸을 들어올렸다. 엘리자베스는 눈이 동그래져서 소리를 질렀다.
“이봐!”
“왜.”
“왜? 너 지금 왜라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엘리자베스가 빤히 보고만 있었던 엘리자베스의 예전 방으로 엘리자베스를 들쳐 안고 걸어갔다.
케이가 어렸을 때부터 포목 따위를 옮겨 힘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케이에게 들릴 때마다 뭐랄까……. 하나의 종잇장이 된 기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아무리 힘을 조절해도 케이의 압도적인 근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케이가 약간만 힘을 더 주면 단숨에 자신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사실이 두렵지가 않고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왜냐하면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감금되어 있던 방의 벽지를 보는 순간 거대한 힘을 가진 무언가의 품을 간절하게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벽지를 보는 순간 집을 잃은 짐승처럼 반사적으로 낑낑대며 자신의 목을 감아오는 것을 느낀 케이의 몸이 굳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흉한 꼴로 이 방을 기어서라도 탈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케이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자신을 동정할지도 모른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콧대 높던 귀족 아가씨가 평민이 되어 가난에 허덕이며 과거의 폭력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고 있다니. 참 불쌍하기도 하지.
케이는 침실에서 앰버를 품에 안고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런 상상에 치가 떨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꼭 안은 채로 침대 옆에 있는 벽난로 앞에 섰다. 엘리자베스는 그 방 역시 자신이 떠나기 전과 그대로라는 사실을 깨닫고 케이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격한 살의였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히는 걸까, 이 개자식은.
엘리자베스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케이의 목깃을 꽉 쥐었다.
케이는 천천히 욕조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엘리자베스를 안은 채로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상식적으로 케이의 몸에서 떨어져야 하는 때라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이곳은 너무나도 익숙한 공포가 군림하는 땅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공포스러운 얼굴로 케이가 앉는 바람에 가까워진 케이의 뺨에 이마를 대었다.
케이는 거친 숨을 엘리자베스의 귓가 근처로 내뱉었다가 들이마셨다가 하면서 몸을 살짝 숙여서 욕조 안에 들어 있는 양동이에서 수건을 꺼냈다. 엘리자베스는 촤르륵 하는 물소리를 듣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매만지는 케이의 손을 느끼고 나서야 정신이 약간 드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케이로부터 살짝 떼고 케이를 보았다.
“뭐…… 뭐 하는 거야.”
케이는 붉은 스프 자국이 난 엘리자베스의 셔츠 소매에 수건을 꾹 누른 다음에 비비면서 대답했다.
“돕는 거야.”
“나를 도우라는 게 아니잖아. 스프를…… 스프를 닦으라고.”
엘리자베스는 이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제 정신이 얼마나 탈력감에 빠져들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케이가 뭘 하든 그냥 두고 싶다는 생각이 엘리자베스의 뇌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보다 무엇이든 2배쯤은 커다란 것 같은 이 사내가 자신의 손을 제 커다란 손으로 집어올려 손가락 하나하나를 닦는 것을 관조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너는 언제나 네 마음대로잖아.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고 그래서 옷 너머로 서로의 열기 같은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상황이 불쾌했다. 왜냐하면 아래층에는 케이의 약혼녀가 있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오른손 등에 난 기다란 자상을 오랫동안 눈에 담다가 케이의 다리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쳤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 약간.”
“……누가 맘대로 나를 안으라고 했어?”
“도와도 된다고 했잖아.”
엘리자베스는 이를 갈았다.
미친 놈.
미친 자식.
너는 정말 이상해.
“……대체 왜 이 집을 샀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단숨에 대답했다.
“예뻐서. 탐이 나서. 갖고 싶어서.”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로버트처럼 너도 계급적 열등감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표정에 살짝 실금이 갔다. 하지만 케이는 그 실금을 금방 봉합하고 대답했다.
“계급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열등감은 맞아.”
“유치하다고 생각 안 해?”
“해.”
케이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갈색 눈동자로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더 쏘아붙이고 싶은데 금방 밭은 숨에 따라잡혀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헉헉거렸다.
정신적인 공황상태가 엘리자베스를 지배하고 있었다. 정말 그 교수의 말대로 정신적인 문제가 햇빛을 통해 조금이나마 치유될 수도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답답하게 쳐져 있는 커튼을 열러 창가로 갔다. 그리고 커튼을 열고 창문 앞에 서서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어쩔 도리 없이 그날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가 로킨트 펍에 다녀와 학질 치료제를 구해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고 밤새 감금되어 있던 날에 하커 가문의 인장을 단 마차를 타고 케이가 자신을 만나러 왔던 날 말이다.
그날 엘리자베스는 이 창 너머로 케이를 보며 생각했다.
너야.
결국 너야.
나의 야단스럽고 대단한 구원자.
또 너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버지가 대양을 건너 구해왔다는 상아 손잡이를 부술 힘을 얻었다.
“……너 때문에 나는 변했어. 그건 인정해.”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말하며 뒤를 돌았다.
창문 앞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를 케이는 눈부시다는 듯이 가는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는 나 때문에 변한 게 조금도 없어.”
엘리자베스는 어린 날 케이에게 썼던 서툰 연애편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한 사람 때문에 인생이 바뀐다는 게 얼마나 놀랍고 행복한 경험인지 줄줄이 고백했던 그 편지.
그러나 너는 대답하지 않았지. 너는 그 편지를 불태웠지. 그러니까 너는 날 조금도 사랑하지 않은 거야.
케이는 시종일관 비슷한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너는 나 때문에 변한 게 아니야.”
케이는 스프가 묻은 수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그것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네 인생을 변화시킨 건 다른 사람이야. 나한테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하게 만든 그 사람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누군데……?”
“글쎄. 나도 모르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표정을 보는 순간 그날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윌리엄 조쉬에 대해 케이가 보였던 근거 없는 적대감 같은 것들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케이가 미웠지만 그걸 교정해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대신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약혼자가 있는 남자가 전 약혼자한테 질투를 느끼는 걸 내가 들어줘야 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남자들은 원래 그래.”
“개소리.”
“남자들은 원래 개에 가까워.”
“다른 남자들은 몰라도 너는 그래 보인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쿵쿵 소리를 내며 욕조로 걸어가 자신의 소매를 양동이에 푹 담그고 빼서 마구 비벼서 짰다.
“이쯤은 혼자 할 수 있어.”
그때, 쿵, 소리와 함께 계단 쪽에서 실루엣이 휙 지나갔다. 엘리자베스가 그걸 보고 다시 몸을 움츠렸다.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계단 쪽을 보자 거기엔 아마도 은쟁반 소리를 듣고 올라왔을 에드워드가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긴장이 풀린 엘리자베스는 숨을 헉헉거리며 몰아쉬었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무척이나 독립적이어 보이네.”
“……너…….”
“어제 한 말은 취소야.”
케이는 의자 위에서 일어나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새삼 케이가 얼마나 커다란지 다시 느꼈다. 케이는 그 커다란 몸뚱이를 살짝 구부려야 엘리자베스와 시선이 맞았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무슨 말?”
“공작부부가 죽어서 유감이라는 말. 내가 그들의 죽음에 연관이 있을 거랬지?”
케이의 얼굴에는 엘리자베스에게 익숙한 삐뚤어진 분노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아니라고 해도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직접 그들을 죽였을 거야.”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 앞에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마주 노려보며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줄곧 이 방과 타운하우스를 마주하며 벌벌 떨던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제 치부를 들킨 것에 화가 났다.
케이가 손잡이가 고장 난 방문을 벌컥 열고는 나갈 듯이 굴다 말고 멈춰서서 엘리자베스를 보며 말했다.
“내가 이 집의 사용인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정확하게 얘기해주지 않았던가? 다들 내 손으로 죽여버렸어. 그건 똑똑히 기억나. 멍청한 것들이 내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재밌었어. 그뿐이었지만.”
케이가 자신을 노려보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조소를 날리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계단 아래로 완벽하게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네가 옆에 없으니 또 숨을 쉴 수가 없어.
엘리자베스는 목덜미를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