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98화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의 약혼자 행세를 하며 그간 꽤 많은 무도회와 정찬회, 만찬회를 돌아다녔던 것을 떠올려보았다. 그 수많은 세월동안 케이는 조금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귀족들이 다 우린 차를 티 포트에 담아서 잔과 함께 내오는지.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에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엘리자베스는 찻물을 전부 양동이에 쏟아버리고 앰버에게 손짓했다.
“당장 이리와요. 물론 급사나 메이드가 차를 우리게 되겠지만 그래도 차에 대해 조금도 모르면 사교계에서 레이디 행세도, 미스 행세도 할 수 없게 되니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서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왔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와 앰버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에드워드가 그런 케이에게로 걸어가 엘리자베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 무서워요.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저 분.”
케이는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저 분’이라는 말에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에드워드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왜요. 이름 부르지 말라면서요?”
“……닥쳐, 에드워드.”
케이의 말에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케이는 앰버에게 찻물을 따라주는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던 앰버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앰버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아까와 똑같은 말을 말이다.
‘머리핀.’
앰버의 말에 케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저게 진짜…….”
케이의 분노한 눈을 본 앰버가 피식 웃었다. 그 바람에 엘리자베스도 고개를 들었다.
금발 머리를 위로 질끈 묶고 평민 아저씨들이나 입을 법한 셔츠에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엘리자베스는 어느 누구에게 물어도 결코 품위 있는 모양새라고 할 수 없었지만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과 꼿꼿한 자세에서는 절대 손상시킬 수 없는 우아함이 드러났다.
케이는 마부의 옷을 입고도 여전히 품위를 잃지 않는 엘리자베스가 얄미웠다. 대체 왜…….
케이가 그렇게 생각할 때 엘리자베스가 불쾌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케이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오래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케이는 2층으로 올라가며 에드워드에게 말했다.
“여기서는 어수선해서 더 이상 회의 못 해. 방으로 가지.”
“왜요, 저는 여기 구경하는 거 재밌는데?”
케이는 에드워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방금은 무섭다며?”
케이의 말에 에드워드가 앰버에게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섭지만 재미있는데요?”
그렇게 에드워드의 눈빛을 보는 순간 케이 역시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무서울 정도로 재미있는 여자다. 겨우 650파운트 때문에 어제 살인예고를 날린 상대의 약혼자를 가르치러 오고,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주제에 평민들 틈에 섞여 있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굴고, 방금까지 절대 가르치지 않을 것처럼 굴다가 이제는 엄한 선생님처럼 구는…….
엘리자베스는 이상한 여자다.
너는 언제나 네가 한 말을 지키지 않아. 나를 사랑한다는 말도, 나를 절대로 혼자 두지 않겠다던 말도 지키지 않았던 것처럼.
케이는 턱을 악 다물고 계단을 올라갔다.
“마음대로 해, 에드워드. 난 혼자라도 올라갈 테니까.”
* * *
엘리자베스는 앰버를 가르치면서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참을성이 없는 편이었어! 그런데 대체 왜 조셉 일당에게는 한 마디도 못 했던 거지?
엘리자베스는 몇 번이나 끓어오르는 화를 참아보려다가 나중에는 그냥 참지 않고 터트렸다. 5번째 폭발을 앞두고 있을 즈음이었다.
“아니죠. 방금 제가 뭐라고 했어요? 부채는 이렇게 잡는 거라니까요!”
엘리자베스가 제 몫의 부채를 들고 시범을 보이자 앰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부채는 더울 때 부치라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앰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순간에 엘리자베스는 마음속에 끓어오르던 분노가 한순간 확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앰버의 동그란 눈매와 순진하게 벌어진 입술,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도 중심을 잡고 있는 콧대가 너무 귀여웠다.
‘같은 여자가 봐도…….’
한 번쯤은 저 보드라운 뺨을 만지거나 매끄러운 머릿결을 쓰다듬어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앰버처럼 평소에는 바늘 하나 들어갈 구석 없이 완벽해 보이던 여자가 빈틈을 보이니 더 그랬다.
엘리자베스는 자신과 똑같은 느낌을 느낀 듯 앰버의 뒤에서 헤벌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에드워드와 눈이 마주쳤다.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몸을 반듯이 정리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에드워드를 보다가 눈으로 케이를 찾았다. 엘리자베스가 말을 멈추고 잠시 눈으로 실내를 훑는 것을 눈치챈 앰버가 조용하게 말했다.
“2층에 올라간 것 같은데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움찔했다.
“뭐, 뭐가요?”
“케이가요.”
앰버가 엘리자베스의 눈앞에서 배시시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매혹적인 그 눈웃음 앞에서 마음이 자꾸만 말랑말랑해지는 것을 느꼈다. 케이 하커가 성기능 불구가 아니고서야 이런 여자를 약혼자라고 3개월 동안 옆에 두고도 여전히 그저 ‘친구’이기만 했을까?
절대 불가능했다. 불구였더라도 말이다.
물론 앰버는 케이가 그간 이국땅에 가 있었다고 했지만 그 기간은 분명치 않았다. 게다가 솔직히 앰버 플래스, 아니, 앰버 모건은 그다지 신용이 가는 여자가 아니었다. 켄드릭 앞에 총구를 들이민 것도 그렇고, 전생에서 자신을 납치해 와서 총상을 치료하게 한 것도 그렇다. 그러니 앰버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있었다.
정말이지 말리고 싶지만 앰버는 진심으로 엘리자베스와 케이 사이를 이어주려고 하니까 말이다. 앰버가 그럴 때마다 엘리자베스가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이 여자는 모르는 것 같았다.
“……관심 없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부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관심은 없더라도 2층에 가서 케이에게 빵과 스프를 같이 먹자고 말해줄래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내가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에드워드를 보았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후다닥 식탁에 놓여 있던 초를 들고 움직여 어설프게 장작에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스프를 끓이는 시늉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앰버를 보았다. 그러자 앰버는 부채를 쫙 펼쳐 보이며 말했다.
“……난 부채 잡는 연습해야 하잖아요?”
“방금 되게 잘 폈어요!”
“아닐걸요? 착각이에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썹을 꿈틀했다. 엘리자베스는 꼬리를 만 여우처럼 쫙 펼친 부채 너머로 눈을 깜빡거리는 앰버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외쳤다.
이상한 여자야! 너무! 너무 이상해!
엘리자베스가 앰버를 무시하고 다시 제 몫의 부채를 잡으려는 순간 앰버가 평온한 얼굴로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케이 하커가 언제부터 밥을 굶었지?”
“네?”
앰버의 질문에 에드워드가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케이가 취한 것도 아닌데 어제 밤에 갑자기 집에 돌아와서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낸 다음 속이 좋지 않다고 굶기 시작했잖아요? 그게 정확히 언제부터냐구요.”
에드워드는 앰버의 말에 묘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보더니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대충 저녁 7시 정도니까…… 꼬박 하루 정도 되네요?”
에드워드는 그렇게 말하곤 여상한 얼굴로 부채에 달린 끈을 정리하는 앰버를 보다가 엘리자베스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더럽게 고집이 세잖아요? 자기는 굶지 않으면 낫지 않는다고 해서요. 그래도 하루 종일 굶는 건 좀 심하잖아요?”
에드워드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 * *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가 끓인 여물 같은 스프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계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체 왜 메이드를 전부 해고시켜서는. 엘리자베스에게 솜씨가 있었다면 이 스프를 전부 버리고 새로 만들자고 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보다 요리를 잘 했다. 엘리자베스가 비슷한 재료로 스프를 만들었다면 분명 이것보다 더 끔찍한 결과물이 나왔을 것이다.
요리 레시피는 일정한 비율의 재료를 넣고 휘젓다보면 결과가 나온다는 점에서 화학식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왜 레시피를 정확하게 지켜도 자신의 결과물은 다를까? 엘리자베스는 그게 의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2층에 케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2층의 전경이 서서히 시야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며 케이에 대한 생각을 잠시 밀어놓게 되었다.
물론 겨우 3개월이 흐른 것뿐이라곤 해도…….
이곳은 너무나 그대로였다.
엘리자베스는 복도 곳곳에 놓인 화병과 상아로 만들어진 장식품, 그리고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양초 꽂이 따위를 눈에 담았다. 전부 당시의 유행이 깃들어 있는 것들. 공작 부부의 기호나 엘리자베스의 취향 따위는 조금도 반영되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거대한 가짜들.
엘리자베스는 공작부부가 자신에게 저지른 짓들과는 별개로 그들의 삶이 그들의 삶보다 더 비대해진 가짜 속에서 유지되다 그 가짜 속에서 끝나버렸다는 것에 대한 회한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사셔야 했나요?
엘리자베스는 지옥불에 떨어지게 되면 반드시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가 한때라도 사랑했던 모든 것들은 지옥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공작부부는 물론, 케이도 말이다.
물론 엘리자베스도 지옥으로 가겠지. 엘리자베스는 조를 물었고 그런 주제에 여전히 조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2층의 기물들을 눈으로 쓰다듬다가 자신이 쓰던 방 앞에서 시선을 멈췄다. 날카롭게 부서진 파편이 있는 상아 손잡이를 보는 순간, 엘리자베스가 조금이나마 순화시켜 놓았던 이 공작가에서의 기억이 거세게 밀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살갗을 파고들던 채찍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아버지의 말들을 떠올렸다.
‘넌 더러우니 정화를 해야 한다.’
‘너 같은 천박한 계집이 클레몬트의 성을 달고 태어나다니.’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엘리자베스는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며 어쩌면 아버지의 말이 조금은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나았을지도 몰라.
그때, 부서진 상아 손잡이가 달린 제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거대한 덩치의 무언가가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은쟁반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지고 스프 그릇이 나뒹굴었다.
“꺄악!”
엘리자베스가 나무 바닥에 무너진 채로 오들오들 떨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부터 말이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엘리자베스가 겨우 겨우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잔뜩 굳어버린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