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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97화 (9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97화

300파운트를 보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깨달았다. 돈의 위력과 자신의 비굴함보다 앞서는 게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 이건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아닌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던 눈빛 그대로 앰버를 보며 말했다.

“상황이 이러니까 수업은 할 수 없겠네요. 그렇죠?”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앰버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품 안에서 350파운트를 주섬주섬 꺼내어 다시 앰버에게 돌려주었다.

내일이 되면 에렌델에 가서 좋은 보닛을 사가지고 주말에 프란시스에게 가져다주고 싶었던 돈이었다.

앰버는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번갈아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수업은 할 수 없더라도 그 돈은 받아요. 일종의 계약금 같은 거니까. 계약 파기에 책임이 있는 쪽에서 물어야죠.”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시작도 못한 수업의 대가를 받는 건 정당하지 않잖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앰버는 곤란한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보았지만 에드워드 역시 같은 표정으로 앰버를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

“그냥 받아가.”

앰버가 엘리자베스를 설득하려고 할 때 케이가 입을 열었다. 케이의 나지막한 소리를 들으며 엘리자베스가 앰버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싫어. 나는 내가 번 돈이 필요한 거지, 적선이 필요한 게 아니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이를 악물었다. 엘리자베스는 분위기, 공기, 숨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케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말이다.

케이는 이런 인간이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길로 다니면서, 그 길가에 뭔가가 굴러다니는 건 또 싫어하는 인간 말이다. 케이가 어떤 인간이든 간에 케이를 분노하게 했다는 사실이 엘리자베스에겐 통쾌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더 분노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지폐라도 흙 위에 던지려고 했지만 돈의 위력을 알아버린 지금 시점에서는 차마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앰버 말 못 들었어? 그냥 가지고 가.”

케이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대꾸했다.

“넌 내 말을 못 들었나 봐.”

“그냥 내가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싫다고 하고 싶은 거지?”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그렇긴 해.”

케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한참 노려보다가 거친 숨을 뱉으며 타운하우스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소리가 나게 문을 활짝 열었다.

쾅!

그걸 본 엘리자베스는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케이가 말했다.

“그럼 들어와. 수업하고 돈을 받아가. 에드워드! 너도 들어와! 우린 회의해야지!”

케이의 불호령에 에드워드가 벙찐 표정으로 잠시 앰버를 보았다. 앰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얼빠진 대답을 하며 일어났다.

“예……예!”

케이는 에드워드가 들어오자 문고리를 잡고 말했다.

“안 들어올 건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았다.

“난…….”

“안 들어올 거면 정당한 노동은 할 생각이 원래부터 없었다는 뜻이겠네.”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저 개 같은 자식.

개 같은 케이 하커.

* * *

엘리자베스는 순전한 오기로 수업을 시작했다가, 수업을 시작한지 30분 만에 오기가 경악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레이디와 미세스, 미스의 차이를 모른단 말이에요? 진짜로?”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30분 동안의 수업 중 가장 커졌기 때문에 식탁으로 쓰는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케이와 에드워드마저 고개를 들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의 경악스러운 표정을 본 앰버는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 알아야 하나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티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였다.

“……알아야…… 하나요……?”

엘리자베스는 대체 5일 동안 어떻게 사교계 예의범절을 대충이라도 익혀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귀족원의 의원들을 상대하겠다는 것인지 앰버와 케이에게 묻고 싶었다.

계획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레이디와 미세스, 미스의 차이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경, 공, 존귀하신 분, 존엄하신 분, 맴을 만나 인사를 하겠는가. 인사도 못 하는데 어떻게 대화를 나누고 대화를 못 나누는 데 어떻게 혁명을 도모한단 말인가!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들어 앰버를 노려봤다.

“지금이라도 초대 취소 의사를 밝혀요. 그게 차라리 의회에서 꾸미는 일에 도움이 될 거예요.”

그 말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말했다.

“어어, 그건 절대 안 돼요. 그날 저희가 소개해야 하는 분이 있어요. 멜니아의 고위층이시죠.”

에드워드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때, 식탁에서 막 찻잔에 찻물을 따르고 있던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집안에서 신사용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저렇게 예의범절을 지키는 사내였을까. 방금까진 분명 마구간에서 양동이를 날랐으면서.

엘리자베스는 집안을 살피며 앰버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에 있던 사용인들은 전부…….”

“……해고했어.”

앰버에게 묻는 질문이었는데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날아왔다.

케이는 쟁반에 찻잔을 두 개 담아서 엘리자베스와 앰버 앞에 놓으며 말했다.

“타운하우스가 싸게 나와서 샀는데, 딸린 식구들은 영 맘에 들지 않아서 말이야. 집사나 메이드를 쓰는 게 살림살이에 도움이 된다더니 이 집에 딸린 사용인들은 전부 살림살이를 파먹는 쥐새끼나 다름없더군.”

그래서 이 집에 캐런과 미치가 없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클레몬트 공작부부의 사용인이었다는 이유로 다른 곳에서 고용을 받기가 어려울 두 사람이 이미 대부분의 고용이 끝나버린 시기에 잘린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약간 통쾌하고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큰 집을 그래서 어떻게 관리하겠다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설마, 마구간지기도 해고했어?”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가 당연하지 않냐는 듯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마구간에서 먹고 잔 세월이 얼만데 그런데 돈을 써?’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사교계 초대를 하고 귀족들을 대접할 거야? 마차는? 귀족들이 가지고 온 말은 직접 메어둘 거라는 거야?”

엘리자베스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묻자 케이의 뒤에 서 있던 에드워드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저요. 제가 하면 돼요.”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욕을 하며 뒷목을 잡았다.

“제기랄…….”

엘리자베스의 욕설에 에드워드가 놀란 얼굴로 입을 가렸다.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댁한테 한 말이 아니에요…… 아니, 맞아요. 무슨 헛소리예요, 지금? 당신이 마부 노릇을 하겠다는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얼굴에는 서슬 퍼런 공기가 흘렀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는 단어 하나하나마다 칼 같은 날카롭고 단단한 구슬 같은 억양이 들어갔다.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의 그 얼굴과 목소리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심장이 잘 갈아진 칼 앞에 얇게 포가 되어 썰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에드워드는 겁에 질린 생쥐처럼 말했다.

“……그, 그러면 아, 안 되는 거예요?”

“되겠어요?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그런 생각을 해내다니! 혹시 천재세요?! 내가 아니라 에드워드 씨가 왕립학술원에 들어갔어야 해요! 그랬으면 적어도 실험 아이디어가 진부하고 기존 연구의 답습이라는 이유로 쫓겨날 일은 없었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앰버와 케이가 둘 다 움찔했다.

엘리자베스는 은쟁반을 들고 있는 케이를 보며 형형한 얼굴로 말했다.

“너도 그래. 차를 따라서 가져다주는 건 대체 어느 나라에서 보고 배워온 거야? 멜니아? 아니면 이국? 대체 어디서 배워오면 차를 이렇게 향은 빠지고 떫은맛만 진하게 남도록 우릴 수 있어? 신기하다! 게다가 찻잔에 따라온 덕에 차는 전부 식어빠졌고, 찻잔을 데우지도 않아서 찻잔을 잡으니 손에 동상이 걸릴 것 같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엘리자베스는 차게 식어버린 찻잔을 집어 들고 차를 꿀꺽꿀꺽 마시며 앰버를 보았다.

앰버는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러운 듯한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설마 5일 후에도 타운하우스의 주인이 직접 차를 내오게 만들 건 아니겠죠?”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5일 후에도 타운하우스의 주인이 차를 내오게 만들었다간 여기 모인 당신들을 차로 만들어 우려버리겠다, 이런 기운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입을 가리며 말했다.

“어…… 아뇨. 절대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집사는 어디에서 구하죠?”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이마를 짚었다.

“그럼 대체 이 집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던 거예요? 유약 처리된 욕조에 물을 채워 줄 사람도, 땔감을 해서 집을 데울 사람도, 말들을 빗질해주고 때때로 하수조를 비울 사람도 없었다면 대체!”

엘리자베스는 머리가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앰버와 에드워드 모두 엘리자베스의 무시무시한 목소리 앞에 잔뜩 몸을 옹송그린 채 가만히 있었다. 심지어는 커다란 덩치의 케이마저도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기 싫다는 듯한 얼굴로 벽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대답은 케이의 몫이었다. 케이는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런 건 귀족들한테나 필요한 거지. 우리한테는 필요 없어. 욕조에서 목욕할 이유도 없고, 이제 초여름이니 땔감도 필요 없고, 말 빗질은…….”

“네가 했겠지.”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분노로 달궈져 있었다. 지금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찬물을 부으면 치익 소리가 날 것이다.

“다 좋아요. 댁들이 귀족들의 삶은 제대로 관찰해본 적도 없고 귀족들의 삶에 관심도 없다는 것도 알겠어요. 하지만 5일 후에 여기에 귀족들을 잔뜩 불러 모을 예정이라면 적어도 그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요. 아주 손톱만큼의 이해라도 말이에요!”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앰버, 에드워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케이의 은쟁반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네가 하찮게 생각하는 귀족들의 삶에도 다 이유가 있어. 차는 우려서 티 포트채로 가져오지 않으면 차가 너무 우러나서 떫어지고 잔에 담아오면 너무 차가워져. 귀족들이 티 포트와 찻잔을 함께 내오도록 메이드에게 지시하는 건 주전자에 담아먹는 게 더 폼 나서가 아니야!”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은쟁반을 식탁 위에 쾅 소리가 나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식탁을 짚은 채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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