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96화
정원 내부를 바라보던 엘리자베스는 저 멀리서 걸어 나오는 집사로 추정되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뒤를 돌았다.
미치일까? 엘리자베스는 대부분의 타운하우스가 사용인들과 함께 팔린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엘리자베스는 이런 꼴로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꼽으라면 클레몬트 타운하우스의 집사였던 미치가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했다. 캐런도 물론이고.
엘리자베스는 두근거리는 심장께를 부여 쥐고 도망을 쳐야 할지, 아니면 숨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때 뒤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혹시 엘리자베스 양?”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뒤를 돌았다.
그러자 균형이 살짝 맞지 않는 움직임으로 정문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 한 남자가 엘리자베스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
엘리자베스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놀란 얼굴로 남자를 보자 남자가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좀 놀라게 해드렸나요?”
“아뇨. 아니에요.”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말투나 모습에서 남자가 이 집의 집사 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렇다면 미치는 아직 저 안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랐다.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안을 힐끔 힐끔 살피는 사이 남자가 말했다.
“저는 에드워드라고 합니다. 전에 로킨트 공장에서 일했었어요.”
엘리자베스는 로킨트 공장이라는 말에 시선을 돌려 에드워드를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대충 빗어 넘긴 남자는 유독 짙은 눈썹과 어울리지 않는 순한 눈매를 가지고 있어 뭔가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처음 봤는데도 말이다.
“아, 네. 저는 엘리자베스예요.”
“네! 엘리자베스 양! 안 그래도 레이디께서 오신다고 앰버 양이 말씀하셔서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어색한 귀족 호칭에 어울리지 않는 노동자의 어투를 쓰는 남자를 잠시 샅샅이 훑어보았다. 이 사람은 누구지? 사용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손님도 아닌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의 표정에 의문이 드러났는지 에드워드가 말했다.
“아, 저는 2층에 있는 사무실에서 무역회사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무역회사 관련된 일?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가 열어준 정문 안으로 들어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지금 신시 무역회사를 말하는…….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원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정원의 풍경에 정신을 빼앗겨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정원의 풍경은…….
정말이지 그대로였다.
분수와 연못, 관목과 키가 큰 나무들은 엘리자베스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 위치 그대로 존재했다.
엘리자베스는 분수와 연못, 관목과 키가 큰 나무들의 위치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정원은 모조품이었기 때문이다.
레트니 국왕이 남부에 가지고 있는 작은 별장이 있는데, 그곳의 정원을 만들었던 정원사를 없는 살림에 클레몬트 공작이 직접 고용해서 똑같이 만들라고 지시한 모조품 말이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이 정원을 볼 때마다 국왕의 별장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라면서 무척이나 흡족해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창피했다. 엘리자베스가 살고 있는 이 타운하우스뿐 아니라 클레몬트 공작가의 모든 것이 다 모조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허울뿐인 왕족이라는 계급에 맞추어, 왕가를 따라하면서 사실 내실은 전혀 없는 가짜.
엘리자베스는 타운하우스가, 공작가가 그렇게 느껴질수록 자신 역시도 가짜로 낙인찍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사교계의 예의범절을 따라하려고 해봤자 진짜 우아하고 교양 있는 레이디가 될 수 없는 엘리자베스 역시 그저 ‘가짜’일 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때와 같은 기분을 느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마구간이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읏!”
엘리자베스는 갑작스러운 실루엣의 등장에 놀라서 비명도 신음도 아닌 것을 내지르며 에드워드의 뒤에 숨었다.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저도 같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의 뒤에 숨어서 숨을 몰아쉬었다.
미치일까? 아니면 마구간지기일까?
엘리자베스는 채찍으로 맞았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이제 3개월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폭력의 기억은 순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튀어나온 실루엣이 누구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저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그대로 흙 위에 주저앉았다. 그때 마구간에서 나온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왔다.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숨소리를 감출 방법을 몰라 그저 애꿎은 잔디만 움켜쥐었다.
이제 나는 성인 남성 하나쯤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어.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가능한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부들부들 떨며 에드워드의 팔을 잡았다.
“에드워드 씨. 저, 정문으로 다시…… 다시 나가야 될 것…….”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뒤를 힐끔 바라보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저, 저기…… 레이디.”
“미안한데 나중에 오겠다고 앰버에게…….”
“뭐 하는 거지?”
그때 에드워드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워드가 곤란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뒤를 돌았다.
“아, 저기 레이디께서 넘어지셔서…….”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의 손을 꼭 쥔 채로 에드워드의 등 뒤를 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한쪽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냉랭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케이.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죽여버리겠다고 맹세한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왜인지 모르게 숨이 쉬어졌다.
“하아…….”
엘리자베스가 에드워드의 손을 놓자 에드워드가 당황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괜찮으세요, 레이디? 일으켜드릴까요?”
“어…….”
엘리자베스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에 에드워드의 몸이 갑자기 옆으로 힘없이 픽 쓰러졌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에드워드의 등짝을 발로 차버린 케이를 보았다.
“……뭐 하는…….”
케이는 자신의 발길질에 쓰러진 에드워드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주머니에 찔러 넣지 않은 쪽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케이의 화난 듯한 눈을, 그리고 그런 케이의 뒤로 펼쳐지는 익숙한 정경을.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말했다.
“여기 주식회사 사무실이 있으니까.”
케이의 담담한 대답에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어졌다.
왜 네 주식회사 사무실이 클레몬트 공작가의 타운하우스인 건데. 왜 하필 여길 골랐는데. 너 미친놈이니? 날 괴롭히는 게 네 인생의 즐거움이야?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려고 할 때, 세 사람의 등 뒤에서 놀란 표정의 붉은 머리 여자가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엘리자베스! 괜찮아요?”
“저, 저도 넘어졌는데요…….”
에드워드가 소심하게 중얼거리자 케이가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에드워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앰버가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왔다. 얇은 홑겹 드레스만 입은 앰버의 드레스 자락이 더러워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앰버가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앰버를 보았다.
“뭐야?”
앰버가 케이의 가슴을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
“뭐긴 뭐야? 우리에게 사교계 매너를 가르쳐주실 가정교사가 온다고 했잖아.”
“너…….”
케이가 앰버를 노려보았다. 앰버는 케이를 마주보며 입모양으로 뭐라고 뻐끔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알 수 없는 다정한 신호였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앰버의 손도, 케이의 손도 잡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날 죽여버리고 싶다며?”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말에 움찔했다. 자존심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려고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마음을 강하게 먹기로 했다.
“널 죽여버리고 싶은 거랑 650파운트는 별개니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앰버를 보았다.
“수업료 얘기야. 선불로 350파운트는 이미 지불했어.”
앰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자 케이는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힐난하듯 말했다.
“제약 공장에서 나오는 돈은 어떡하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라 프란시스 거야. 그리고 왕실에서 받았던 개발비 대부분이 직원들 월급으로 나가고 있어서 지금은 적자야.”
엘리자베스는 말하면서도 대체 왜 이런 얘기를 케이에게 설명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케이가 걱정하는 건 엘리자베스의 형편이 아니라 프란시스의 안위일지도 몰랐다. 케이가 애초에 제약 공장과 로킨트 저택을 넘긴 건 프란시스였으니까.
“대체 월급을 얼마나 주면 개발비를 다 쏟아붓는데?”
케이가 툴툴거리듯 말하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았다.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는 거야.”
“이 리오든 바닥에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는 공장은 아무데도 없어. 돌커프를 봐.”
케이는 노동자 착취로 유명한 돌커프의 제약 공장을 예로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얼굴로 케이에게 쏘아붙였다.
“정당한 임금을 지불해도 돈을 벌 수 있어. 그리고 넌…….”
넌 노동권, 참정권 운동을 하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 내가 기억하는 너는 분명 리오든에서 가장 정의로운 사업가였고, 뒤로는 참정권 운동가들에게 돈까지 쥐어준 사람이었는데, 나한테만…….
너는 꼭 나에게만 편하고 쉽고 부정에 가까운 일을 권한다. 언제나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마주 노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당한 임금. 좋지.”
케이는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니 품 안에서 지폐를 꺼냈다. 한쪽 손은 여전히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였다. 케이가 꺼낸 금액은 300파운트였다.
“돈이 문제면 내가 주지.”
“케이!”
앰버가 항의하자 케이는 앰버를 보며 말했다.
“새로운 가정교사를 구해. 못 구해도 상관없고.”
앰버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흔들림 없이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오만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에게 300파운트를 내밀면서 말했다.
“약속한 대가를 전부 줄 테니 돌아가. 어때. 이러면 됐지?”
엘리자베스는 제 눈앞에 내밀어진 300파운트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