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95화
“나와 케이는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말도, 그러니 당신과 우리는 다르다고 했던 말도, 켈토에 가라는 둥 훈계질을 했던 것도 전부 우정 때문이라고…… 케이를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니었어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앰버가 말했다.
“당신이 하는 말이 나를 자극했거든요. 당신한테 악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당신의 우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보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한 공격이라고 느꼈어요. 정말이지…… 맹세코…… 당신과 케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때 자신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앰버와 무희들을 싸구려로 취급했던 말들. 케이와 앰버의 관계에 대한 의심과 질투에서 나왔던 정제되지 못한 어휘 선택들. 저도 모르게 속으로 앰버와 여자들을 천박하다고 생각했던 마음.
엘리자베스는 그 모든 것들을 사교계의 닳고 닳은 레이디들처럼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앰버는 전부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엘리자베스는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잖아요. 사과할 필요 없어요.”
사과는 내가 해야 하니까.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사과의 말은 죽어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자신의 자존심에 대해서 자괴했다.
“틀린 말이었어요. 두 사람만큼 서로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으니까. 둘이 굉장히 닮았잖아요. 고집쟁이인 것도, 놀라우리만큼…… 용기가 있는 것도.”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용기 없어요.”
“사랑 앞에서 당신이 보여주는 용기는 따라잡을 사람이 없어요.”
앰버의 표정에 왜인지 모를 슬픔 같은 것이 어렸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집착이었죠. 이제 생각해보면 말이에요.”
그때, 저쪽 테이블에서 어린 귀족들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이 나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제 다들 가네요. 나도 이만 가볼게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앰버가 다급하게 말했다.
“다음에…… 어…… 그러니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셋이서 밥이라도 먹어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싫어요.”
엘리자베스가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말했다.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어요. 케이도, 당신도. 케이에게는 다시 만나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
“……네.”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날선 눈빛을 보다가 침울한 표정으로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지폐와 동전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움찔했다.
“식사를 같이 하면 내가 사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됐으니까요. 커피 값이라도 치르고 싶어요.”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앰버가 아까 자신이 돈주머니를 힐끔 보는 것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리자베스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됐어요.”
누굴 거지로 알고!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그냥 가버리려고 했지만, 잠시 멈춘 엘리자베스는 앰버를 노려보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초대에 응하기 전에 가정교사에게 사교계 예의범절을 배우도록 해요. 이 시기에는 가정교사를 구하기도 좋으니까요.”
그 말에 앰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를 다시 제자리에 넣고 나가려고 할 때였다. 앰버의 목소리가 엘리자베스를 잡았다.
“그걸 엘리자베스가 해주는 건 어때요?”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움찔 멈춰 섰다.
“뭐요?”
“그게요. 나는 가정교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평민의 가정교사를 하고 싶어 하는 귀족 가정교사는 아무도 없어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앰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심지어 나는 모두들 기피하는 사람이에요. 알잖아요? 솔치노에서 노래나 부르던 여자의 가정교사를 누가 하고 싶겠어요. 나를 가르치고 나면 일자리를 잃게 될 거라고들 생각하는 눈치예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윌리스도 표현이 저급하던데요, 뭘. 케이가 사창가 여자한테 정신이 팔렸다고, 그 따위로 말하더라구요.’
어젯밤 케빈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교계에서 앰버에 대한 대우가 어떨지는 뻔한 일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래도…… 나는…….”
“사교계에서 함부로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나도 몰랐어요. 무시당하는 것에 그치면 몰라도 당장 5일 뒤면 귀족원들을 초대해서 대접해야 해요. 그때 모인 귀족원의 귀족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면 지금 하려는 일이 모두 물거품이 돼요. 케이가 목숨을 걸고 한 일이요.”
“목숨…… 이요?”
“그래요. 목숨이요. 무역 길을 열러 갔다가 해적선을 만나서 한 번, 이국에서 부족장에게 납치 돼서 한 번, 케이는 죽을 뻔했어요. 엘리자베스.”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입을 가렸다. 무역 주식회사가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케이는 직접 그런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앰버와 멜니아에서 수영장 딸린 저택을 누리며 명령만 내린 줄 알았는데—
엘리자베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케이뿐 아니에요. 모두들 그간 공을 들여왔던 일이 일주일이면 결판나는 거예요. 작은 것 하나 실수할 수 없어요. 서프러제트라고 들어봤어요? 우리가 이번에 에밀리라는 노동운동가를 석방하는 것에도 힘을 쓸 생각인데…….”
앰버가 그렇게 말하며 목소리 끝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힐끔 힐끔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지만 엘리자베스는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입술을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돌아서려고 할 때 앰버가 말했다.
“500파운트.”
“……뭐요?”
엘리자베스가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자 앰버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다섯 번만 도와줘요. 수업 한 회 당 100파운트로 측정한 거예요. 물론 나도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돈으로 돌려보겠다는 게 좀 간사하다는 생각도…….”
“150.”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불쑥 내뱉고는 제 말에 제가 놀라서 입을 가렸다. 앰버도 엘리자베스의 말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120?”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호가했다.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물고 가만히 앰버를 보다가 말했다.
“130.”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잠시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순간이었다. 다만 500파운트라는 액수를 듣는 순간 프란시스의 말이 떠오르긴 했었다.
‘네 몫으로 예쁜 보닛이 새로 생기면 나도 가끔 빌려 쓸 수도 있잖니. 이제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공원 산책할 때 불편해.’
프란시스에게 예쁜 보닛을 하나 사주고 싶다는 생각도 말이다.
그것 말고도 돈이 생기면 하고 싶은 일은 무척이나 많았다. 좀 더 괜찮은 드레스를 프란시스에게 사주고 싶고, 메리에게는 새로운 앞치마를, 토비에게는 모자를 새로 해주고, 미리엄에게 겉옷도 하나 해주면 무척 좋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이 세상에 돈이 할 수 없는 일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지만 돈이 하는 일들이 주는 달콤함도 경험해본 사람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앰버가 그 자리에서 지폐로 내미는 돈을 받아들었다.
“350파운트요. 나머지 300파운트는 수업이 끝날 때 주도록 하죠. 어때요?”
엘리자베스는 350파운트를 실물로 손에 쥐자 갑자기 아까까지의 고민들이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조, 좋아요.”
앰버가 엘리자베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금 벨룬타 공원 옆에 있는 타운하우스를 빌려서 생활하고 있어요. 당장 오늘 밤부터 엘리자베스가 편한 시간에 마차를 기숙사 앞으로…….”
“아뇨. 아니에요. 벨룬타 공원 옆이면 걸어서 15분이면 가요.”
엘리자베스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왜인지 돈을 받고 나니 앰버를 대하는 태도에 아까보다 훨씬 다정함이 깃들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돈의 위력도, 자신의 비굴함도 수용하기로 결심했다.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잠시 망설이더니 알겠다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초대에 응해야 해서요. 오늘 7시쯤에 만나요, 선생님.”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이게……. 이게 아닌데.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고 앰버와 눈이 마주친 다음에 얼굴을 구겼다.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커피 하우스를 나가자마자 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케이는, 케이는 그 집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나요?
가장 중요한 말이었는데, 그걸 묻지 못했다.
* * *
막상 350파운트를 들고 기숙사로 돌아오자 모든 게 그리 나쁘지는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가르쳐주기로 한 상대는 앰버 플래스지 케이가 아니었다. 케이에게 다시 만나면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다고 해서 앰버의 선생님이 될 수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3개월 동안 제약 공장은 여전히 흑자전환을 하지 못한 상태였고, 돈이 나올 시기를 따져본다고 해도 적어도 로열 박람회가 끝나야 하니 한 달이나 남았다. 한 달 동안 650파운트면 충분히 버틸 수가 있게 된 것이다. 650파운트라니. 엄청난 돈이 아닌가.
엘리자베스가 3개월의 노동으로 받은 돈은 650파운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돈을 겨우 케이 하커 하나 때문에 날릴 뻔하다니. 엘리자베스는 만약 커피 하우스에서의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고, 그렇게 여겼다.
기숙사 주방에서 감자를 쪄서 케빈이랑 사이좋게 나눠먹고 기숙사 뒷문으로 해서 나와 약간 헤매면서 벨룬타 공원 옆에 있는 타운하우스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타운하우스의 주소를 듣는 동안은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엘리자베스는 타운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눈치채버렸다.
한 달 전 벨룬타 공원 근처 도로명이 레트니 국왕의 이름으로 바뀌면서 번지수도 전부 바뀌었다는 사실을 엘리자베스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지한 상태로 엘리자베스가 도착한 타운하우스는 클레몬트 공작부부의 타운하우스였다.
정확히 말하면 클레몬트 공작부부가 죽기 전 국왕의 손에 넘어간 바로 그 타운하우스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익숙한 타운하우스 정문 앞에서 석상처럼 굳어져서 낯익은 타운하우스 내부 정원을 들여다보았다.
젠장.
젠장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