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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94화 (9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94화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을 때, 앰버는 자기소개를 하려는 듯 입을 열다가 일어난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붉은 머리의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앰버 플래스.

엘리자베스가 3개월 동안 케이 하커만큼이나 많이 떠올렸던 여자였다.

앰버는 케이와 무슨 대화를 나눌까? 앰버는 케이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어린 시절뿐 아니라 뭘 더 알고 있을까?

케이는? 케이는 앰버에 대해 뭘 알고 있을까? 앰버의 비밀을, 수많은 비밀을……. 얼마나 많이 공유했을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둘은 얼마나 다를까?

이런 질문들이 엘리자베스의 정신을 얼마나 갉아먹는지 엘리자베스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생각들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들은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엘리자베스의 정신이라는 토양에서 자양분을 얻어 쑥쑥 자라났다. 때로는 시들시들해 보이기도 하고 이제 그만 꺾이나 싶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자라나서 혼자 잎을 틔우고 혼자 꽃을 피우고 혼자 열매를 맺었다.

어떤 날에는 케이와 앰버가 참정권 운동을 하는 동지로서만 평온한 하루하루를 지내는 상상을 했다가, 어떤 날에는 케이가 앰버의 침대 위에서 나른하게 누워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미소를 짓는 상상을 했다가, 또 어떤 날에는 두 사람의 아이가 케이에게 손을 뻗는 상상도 했다.

우리 아이.

두 사람은 그 아이를 그렇게 부를까?

엘리자베스는 한 때 케이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이가 부부를 이어주는 끈이라길래, 겨우 그런 마음으로 하나의 생명을 태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조차 없을 정도로 간절하고 무모하게,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는 부부를 이어주는 끈이라잖아. 우리 사이에 연결된 무언가가 있으면 지금보다 낫지 않을까?’

그날도 새벽처럼 나가는 케이의 손을 이끌고 침대 위에 누워서 말했다. 케이는 벗으려던 옷에서 손을 떼고 대답했다.

‘아이는 부부를 이어주려고 태어나는 게 아니야.’

그때 케이의 표정에 얼마나 많은 혐오가 담겨 있었던지.

케이가 말했다.

‘그리고 아이 때문에 부부가 연결되어 있다면 사생아들은? 사생아들은 왜 버려지겠어.’

케이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몸을 일으켜 부부의 침실을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바라보던 그 혐오스러운 눈빛이 두 사람의 아이를 향해서는 다정하게 변하는 상상을 했다.

그들의 아이는 부부를 연결해주는 끈 따위가 아니겠지. 저 부부는 끈으로 연결될 필요가 없이 서로에 대한 유대감으로 똘똘 뭉쳐 있을 테니까.

그 아이는 그저 부모의 사랑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나는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쯤 될 것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와도, 케이와 다른 인간으로 자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부부를 억지로 연결한 끈인 자식이었고, 케이는 한 여자의 인생을 파탄 낸 증거물이었지만, 그 아이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아이는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아이가 아니므로.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괴롭히던 수많은 생각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생각을 떠올리며 붉은 머리의 여자를 가만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마녀’라고 불리며 사교계에서 얼굴이 들킬까 숨어 다녀야 하는 주제에 지금 앰버의 망신을 걱정해주고 있었다니. 엘리자베스의 동정은 습관인 셈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가리기 전에, 앰버가 먼저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엘리자베스.”

앰버의 눈에는 당혹스러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반가움이라니. 저 빌어먹을 여자는 언제나 진심이기에 사람을 미치게 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로 쏠리는 영애와 영식들의 시선을 받으며 앰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앰버 양.”

엘리자베스의 예를 갖춘 인사에 앰버가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다가 천천히 걸어서 어린 귀족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러자 어린 귀족들은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분명 엘리자베스가 누구인지 알아본 눈이었다.

흥미롭겠지. 케이 하커의 전 약혼자와 현 약혼자가 목도한 상황이라니.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비유에 찰떡 같이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귀족들에게 눈으로 작게 인사를 했다. 상호간 소개를 마치지 않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눈으로만 인사를 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자 아까 앰버에게 자기소개를 시키던 영애가 부채를 내리고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우리 앰버 양에게 볼 일이 있으신가요? 레이디 이름이…….”

영애는 ‘우리’라고 다정스레 앰버를 지칭하는 척하면서 엘리자베스가 자기소개를 하기를 기다렸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영애의 심술을 알아채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레이디가 아닙니다, 영애. 이 앞에 있는 왕립학술원에서 일하고 있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앰버 모건 양과 함께 급하게 나눌 사담이 있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영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엘리자베스가 교묘하게 자신의 함정을 피해갔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사실 영애가 조금 더 나이가 많고 경험이 있는 귀족이었다면 엘리자베스의 이런 술수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교계에서 경험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수려한 언변으로 남이 알아채지도 못할 사이에 남을 자신 앞에 굴복시키는 스킬을 갖추게 된다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마 이번 봄에 처음 사교계에 데뷔했을 이 어린 귀족들을 눈으로 훑어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영애와 영식들은 다 잡은 고기를 놓아주지 않을 도리가 없어 어색하게 눈으로만 인사를 했다.

엘리자베스는 영애와 영식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앰버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 테이블로 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놀란 눈으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리자베스는 앰버에게 커피를 하나 주문해주면서 품 안에 돈주머니를 집어넣기 전에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과소비다. 과소비.

하지만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엘리자베스는 앰버를 올려다보며 얼른 표정을 정돈했다. 앰버 앞에서 가난해 보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앰버는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이 숨 막히는 상황을 저주하며 대답했다.

“그래요.”

앰버는 웨이터가 가져다준 커피에 설탕을 넣고 살살 저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나는 아니에요. 웬만해서는 두 사람 다 돌아오지 않길 바랐어요.”

엘리자베스의 대꾸에 앰버가 살짝 상처받은 얼굴로 커피로 시선을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상처받은 표정을 보며 어이가 없어졌다. 저 여자가 진심으로 상처를 받은 표정이라는 것보다는 저 여자의 상처에 마음이 가는 자신 때문에 말이다. 대체 어디까지 우유부단할 텐가.

앰버는 커피잔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할 말이라는 게…….”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귀족들 테이블에서 망신을 당할 것 같아서 당신을 구해온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쪽이 계급이 낮은 거예요. 먼저 소개를 하더라도 반드시 두 사람을 동시에 아는 사람의 중개를 받아 인사를 해야 하구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자 앰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예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귀족들을 보았다.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사교계에 친절한 귀족들은 없어요. 특히나 이제 막 사교계라는 생태계에 입문한 귀족들은 더 못되게 굴죠.”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커피잔을 들어 호로록 마셨다. 커피가 들어가니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정결해지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왜 초대에 응한 거예요? 두 사람 다…….”

엘리자베스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테라스 자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돌아온 목적이 의회 때문 아닌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시무룩한 표정에서 다시 생기가 살아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요. 이번 의회에서 많은 변화가 있을 테니까요.”

“제일 큰 안건은 로버트 하커 씨가 이번에야말로 과연 경 칭호를 받을지에 대한 것이겠구요.”

“그뿐 아니라…….”

앰버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말을 하려다 마는 것을 보며 울컥해서 말했다.

“나한테는 말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긴요. 나도 알아요.”

엘리자베스는 표정을 들키기 싫어서 고개를 돌려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골목을 돌아 있을 왕립학술원 정문에는 아직도 그 여자가 서 있을 터였다.

“……나는 당신이 미워. 당신이 질투난다고.”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앰버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날선 말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말들은 생각만큼이나 빠르게 스스로 자라났다. 아니, 어쩌면 생각을 추월해 자라났다.

“당신이 나를 순진한 귀족 아가씨쯤으로 여기는 것도, 당신이 나보다 용감한 사람인 것도, 당신이…….”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쥐고 앰버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나를 질투하지 않는 것도 너무 질투가 나.”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지긋지긋해졌다. 시간여행까지 했는데도, 죽음을 3개월 밖에 앞두지도 않았는데도, 여전히 자신은 미숙한 인간이라니. 이렇게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죽게 되다니.

엘리자베스의 날선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앰버가 웃었다.

“……웃어?”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어서 말하자 앰버가 오히려 더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미안해…….”

“이봐요…….”

“하지만 나도 당신이 질투 났어요. 엘리자베스. 그러니 마지막 말은 틀렸어.”

앰버는 엘리자베스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표정으로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더 세게 쥐었다.

앰버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괴고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자유로운 그 태도는 사교계에서 놀림감이 되어야 마땅한 자세였지만 한편으로는 귀족들은 절대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아름다움이 깃든 자세였다.

“귀족으로 태어나 가진 자로서 가진 여유, 그 품위, 나는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것이었어. 그래서 질투가 났고 질투를 표출했어. 당신은 할 말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할 말이 있어. 3개월 전에 솔치노에 있는 이런 커피 하우스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 내가 한 말…… 그거 정말이지…….”

앰버가 이를 악물고 잠시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았다.

“……치졸했어요. 미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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