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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93화 (9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93화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네. 유감이지만.”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시선을 멀리 던지며 말했다.

“그럼 이제…… 앰버는 앰버 모건도 아닌…… 앰버 하커가 되겠구나.”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무도회에서도 앰버가 왔었나 봐요. 전 못 봤는데 말이에요. 윌리스가 그러더라구요. 조셉이 무도회에서 케이의 여자를 건드렸다고. 그래서 케이가 무척 분노했는지 돌커프 제약회사의 제품은 무역회사에서 받아주지 않겠다고 했대요. 요새 그 무역회사에 자리 하나 얻으려고 난리들이잖아요. 그래서 조셉이 가서 싹싹 빌고…….”

엘리자베스는 무도회에 앰버가 왔었다는 말에 조금 놀랐다.

그랬구나. 하긴 그땐 다들 가면을 쓰고 있었던 데다가 엘리자베스는 술에 잔뜩 취해 앰버가 코앞에 있었다 해도 알아볼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건드리다니? 앰버한테 해코지를 했대?”

“뭐 뻔하죠. 조셉네 패거리들은 전부 귀족 행세 하는 평민 나리들이시잖아요. 윌리스도 표현이 저급하던데요, 뭘. 케이가 사창가 여자한테 정신이 팔렸다고, 그 따위로 말하더라구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사창가 여자라니. 총을 든 앰버 플래스 앞에서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켄드릭을, 그리고 조를 처리하려고 총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여튼 돌커프 집안이 대단한 젠트리긴 해도 하커 가문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기 힘든데다가 지금 신시 주식회사가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는 뜻이죠. 덕분에 당분간 조셉이 설치는 꼴은 안 봐도 돼요. 엘리즈.”

케빈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걸로 위안 삼자구요. 네?”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빈을 마주 보았다. 케빈은 지금 자신을 위로해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서툰 위로에도 진심이 느껴져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위안 같은 거 필요 없어.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조셉이 당했다는 건 고소하지만.”

* * *

그날 밤은 정신없이 일을 했다. 박람회에서 발표할 자료들을 정리하느라 새벽이 되어서야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가서도 엘리자베스는 잠을 자는 대신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도저히 잠이 들 자신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집중할 거리가 없이 눈을 감고 있으면 계속 생각날 것이었다.

케이 하커와 앰버 플래스가. 두 사람의 평온한 미래가. 자신이 없는 케이의 인생이.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한심하게 불면에 시달릴 스스로를 견딜 자신이 없어 잠을 미뤘던 엘리자베스는 결국 동이 터오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아침에 청소부가 기숙사 문을 두드릴 때 엘리자베스는 책상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청소부의 헛기침 소리에 잠에서 깨어 유령 같은 몰골로 도서관으로 나갔다.

도서관에서 들어가니 허기가 몰려왔다. 생각해보면 숙취 때문에 어제 저녁도 건너뛴 차였다. 엘리자베스는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몇 개 꺼내 조심스럽게 까먹다가 곧 도서관 사서에게 걸려 혼쭐이 났다.

“거기 학생! 도서관에서 취식 금지예요.”

도서관 사서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사서의 말에 후다닥 먹던 초콜릿 껍질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책 몇 권을 대출해서 도서관을 나섰다. 다들 엘리자베스를 보며 혀를 찼다.

엘리자베스는 빌린 책을 허리춤에 차고 학술원 밖으로 나왔다. 따사로운 햇빛을 맞이하니 피로와 허기가 더욱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학술원 앞 거리를 오가는 과자 팔이 소년을 보았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떠올렸다. 이번 주 생활비에 약간 여유가 있으니 과자 한 봉지쯤은 사먹어도 좋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머니에 있는 동전 하나를 꺼내 과자 팔이 소년에게 내밀고 과자 한 봉지를 샀다.

엘리자베스가 과자 봉지를 들고 기분 좋게 돌아오려고 할 때 엘리자베스는 학술원 정문 앞에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에밀리의 석방을 요구한다!]

엘리자베스는 피켓의 붉은 글씨를 보았다.

에밀리는 유명한 여성 노동운동가로, 열흘 전 같은 서프러제트들이 참정권 운동을 하다가 보비들에게 잡혀가 성희롱을 당한 일에 분노하여 컬로든 궁에 오물로 테러한 혐의로 잡혀갔다.

에밀리의 형은 무려 8년. 최근 시민운동에 시달리고 있는 레본 왕정이 내민 극약 처방인 셈이었다.

하지만 레본 왕정의 극약 처방으로 인해 오히려 시민운동은 더더욱 들끓었다. 특히나 여성 노동운동가들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참정권 요구뿐 아니라 여성과 남성 사이의 차별에 대해서도 항의하며 들고 일어섰다.

엘리자베스는 신사들에게 비웃음을 사면서도 꿋꿋이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아카데미 학생들을 보았다. 그리고 저 학생들 앞에서 여자에게 과자 봉지를 건넸다가는 앞으로 내내 놀림거리가 될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니 어쩐지 지금 이 봉지에 든 과자를 먹으며 기숙사에 돌아갈 생각에 들떠 있었던 자신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여자를 모르는 척하고 돌아서 기숙사 문으로 가려다가 멈췄다. 그러고는 비슷한 정장을 입은 신사들을 힐끔 보다가 천천히 여자에게로 걸어갔다.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과자 먹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하며 여자에게 과자 봉지를 쥐어주었다. 그러자 여자가 딱딱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엘리자베스의 셔츠와 바지를,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책들을 말이다. 그러곤 조금도 고맙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엘리자베스는 예의상 과자 봉지를 집어 들고도 과자를 먹지 않는 여자를 보며 왜인지 아까보다 더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뒤를 돌아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신사들을 피해 걸어갔다.

* * *

그 후 엘리자베스가 도착한 곳은 근처 커피하우스였다.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의 한 끼 식사 값에 가까운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엘리자베스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대체 왜 그런 충동적인 행동을 했을까?

엘리자베스는 이제야 여자의 눈동자에 든 경멸을 선명하게 깨달았다. 여자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에게 적선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젠장…… 젠장…….”

엘리자베스는 요새 욕이 늘었다. 위스키를 즐기는 일도 잦아졌고 담배도 늘었다. 점점 충동적이고 욕구를 조절하지 못하는 식으로 변해가는 스스로가 한심하면서도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를 찾아올 생각도 없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도 없지 않나.

엘리자베스는 턱을 괴고 지나다니는 행인들을 보았다. 행인들은 엘리자베스의 셔츠와 바지 차림을 보고 저마다 한 마디씩들을 하고 지나갔지만 이것 역시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할 말은 하는 거고 오늘 같은 날은 돈이라도 쓰면서 여유를 즐길 필요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웨이터가 가져다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차양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 두터운 햇빛이 닿았다.

“따뜻해…….”

엘리자베스는 우울증은 햇빛을 통해 치료가 가능하다는 교수의 말을 떠올려보았다.

그 수업시간에는 교수가 허무맹랑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햇빛으로 인해 분비되는 분비물이 있을 거라나? 그 교수는 식품을 통해서도 분비되는 분비물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직접 엘리자베스가 햇빛을 쬐어 보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식물도 햇빛을 못 쬐면 죽지 않나. 뭐 비슷한 어떤…… 자연의 섭리가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신부나 수녀처럼 말하는 것에 조금 웃고 말았다. 자신의 생각을 케빈이나 루이 교수님이 들었다면 분명 엄청 조롱했을 것이다. 모든 명제의 참과 거짓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하다면서, 객관적인 증거를 통한 논리 전개의 필요성을 역설했겠지.

하지만 때로는 그냥 믿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증명할 수 없는 일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믿어버리는 것도 삶의 질을 올려주는 큰 요소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켓을 들고 있던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와 자신의 결정적인 차이는 믿음의 유무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양 없어. 저래서 평민은 어쩔 수 없는 평민이라는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교양이 없다는 둥, 평민은 어쩔 수 없는 평민이라는 둥.

엘리자베스는 그 말이 분명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엘리자베스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한 무더기의 영애와 영식들을 발견했다. 근처에서 만찬회라도 열릴 예정인지, 잔뜩 빼어 입은 그들은 저마다 입꼬리에 조소를 머금고 한쪽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커피하우스 정문에서 들어오는 한 여자였다. 엘리자베스는 그 여자를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앰버 플래스.

빨간 머리를 곱게 땋아 올린 채, 붉은 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어떻게 엘리자베스가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

그때, 테이블에 앉아 있던 영애 하나가 정문에서 들어오는 앰버를 보며 손을 들었다. 이쪽 테이블에 합류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영애는 앰버가 걸어오기 전, 방금 전 앰버를 환영하는 듯 지었던 미소를 부채로 가린 뒤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세상에. 저 여자, 정말로 해밀튼 씨의 초대에 응한 거예요? 말도 안 돼. 그 나이에, 그 출신 성분에, 자기가 무슨 데뷔탕트를 치를 영애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보죠?”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테이블은 가식적인 남녀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앰버는, 사교계 모임에서 미혼의 영애는 절대 입지 않는 원색의 드레스를 입고 그 테이블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곤 어설픈 매너로 인사를 했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아…… 안 돼.’

엘리자베스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앰버는 지금 완전히 놀림감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완전히 앰버를 무시하는 얼굴을 부채로 가린 채 영애 하나가 앰버에게 자리를 권하며 하는 얘기를 들었다.

“앰버 모건 양.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들어오면서 먼저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거예요.”

영애의 말에 앰버가 잠시 움찔했다.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제발, 을 외치며 앰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기소개라니. 파티의 주최자도 아니고 손님들 사이에서 남들에게 잔뜩 둘러싸인 채 자기소개를 하는 것은 하인이나 할 법한 일이었다. 앰버가 저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하면 두고두고 사교계의 망신거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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