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92화
“내가 알았어야 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를 살피고, 또 살폈다. 저 녀석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아내려고.
하지만 케이를 살피면 살필수록 알 수가 없었다. 점점 더 엘리자베스는 케이에 대한 마음과 사실을 헷갈렸으니까. 케이를 믿고 싶은 마음이 사실을 덮어버린 것인지, 케이를 불신하는 마음이 사실을 덮어버린 것인지.
과학을 전공하고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겠다고 했으면서 여전히 케이에 대해서만은 엘리자베스는 제 주관을 버리지 못한 탐구자였다. 그러니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것이다.
케이를 의심하고 의심하면서도 믿고 싶어 하는 제자리에 엘리자베스만이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다.
“……케이!”
그때 케이의 등 뒤에서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아까 보았던 짙은 피부색을 가진 남자가 케이를 불렀다. 케이가 뒤를 돌았다. 케이는 그에게 손을 들어 보이더니 엘리자베스를 다시 보았다.
“어쨌든, 유감이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말했다.
“유감일 거 없어. 다시 만나면 그땐 정말 죽여버릴 거야. 너를…… 반드시…….”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꼭 성공하길 빌지.”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케이를 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친 놈.”
케이가 짙은 피부색의 남자와 다른 쪽 통로로 걸어가고 나자 회의실 문 앞에 서서 엘리자베스를 보고 있던 케빈이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오려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가까이 오지 마.
그런 뜻이었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오려다가 그녀의 손짓에 그대로 굳어버린 케빈을 보곤 몸을 숙여 바닥에 남은 종이와 리플렛을 집었다. 그리고 그대로 뒤를 돌아 뛰기 시작했다.
케이는 뛰지 말라고 했지만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에 멈춰 있으니 뛰기라도 해야 했다.
엘리자베스가 왕립 학술원의 신사들과 어깨를 부딪혀 가며 한참을 뛰어 [후세를 위하여]라고 적힌 청동 판 앞에 섰을 때 엘리자베스는 마차를 세워둔 채 기다리고 있는 프란시스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헉헉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코를 훌쩍거리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 쪽으로 걸어왔다.
“엘리자베스…….”
“다들 알고 있었죠?”
엘리자베스는 울음기가 잔뜩 밴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다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케이가 돌아온 것을.
“미리엄이랑 셜리도 그래서 감자를 가져다준 거고…… 프란시스도 그래서 오늘 절 태워다 준 거고…… 메리도 밤새 간호해준 거고…… 루이 교수님도 알고 있더군요…… 흐흑…….”
엘리자베스는 눈을 세게 비볐다. 짓무른 눈이 아파왔지만 아픈 게 차라리 나았다. 창피한 것보다는.
“숨기려고 한 건 아니야.”
“숨기려고 한 거든, 아니든, 숨겼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두 뺨을 두 손바닥 안에 숨기며 엉엉 울었다.
프란시스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젠장…… 젠장할…… 하필 오늘이라니…… 머리도 얼굴도 옷도 엉망인데…… 아니, 그냥 모든 게 엉망인데…… 너무 창피해…….”
너무 창피해. 너한테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얼굴을 가리고 쪼그려 앉았다.
“나는…… 지금 내가 너무 창피하다구요…… 너무…….”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엘리자베스…… 미안해…….”
프란시스가 말하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젠장…… 젠장……흐흑…….”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프란시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해…… 너무 미안해…… 하지만 창피해하지마. 난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 널 봐. 여기에 널 봐. 넌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잖아. 그 어떤 여자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거야.”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시작한 길을 따라 많은 여자들이 걸을 길을 말이야. 후세를 위해 네가 한 일을 봐. 너만큼 멋있는 여자는 없어.”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꽉 쥐고 단호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폈다.
프란시스와 엘리자베스를 보며 마녀라고 수군거리고 지나가는 신사들은 엘리자베스가 그들을 보자 병이라도 옮을 것 같은 얼굴로 시선을 돌려 빠르게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물었다.
모든 게 엉망이야.
모든 게 엉망인 채 그대로였다.
* * *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저녁을 먹자고 고집하는 것을 거절하고 다시 학술원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진짜로 케빈을 도와야 해요. 제가 낸 아이디어 때문에 케빈이 곤란해하고 있을 거예요.”
유통기한이니 제조일자니 하는 것들은 엘리자베스가 즉흥적으로 케빈과 상의도 하지 않고 말한 것이었다. 전부터 케빈과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의 논문을 보면서 생각해왔던 것이긴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말 때문에 시무룩해진 프란시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는 죄송해요. 투정이나 부리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난 언제나…… 언제나 네가 투정을 부려줬으면 하고 기다렸어, 엘리자베스.”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퉁퉁 부은 눈으로 또 글썽거리며 프란시스를 보았다. 프란시스도 어느새 촉촉해진 눈가로 엘리자베스를 보며 말했다.
“정말이야. 나한테 너무 꼬박꼬박 생활비를 내놓으려고 하는 것도, 뭐든지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주말마다 로킨트에 오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나는 언제나 섭섭했어.”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울컥해서 말했다.
“그건 프란시스한테 미안해서…… 그리고 로킨트에는…… 케이에 대한 기억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예요. 정말로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살짝 눈물을 흘렸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며 또 한참을 훌쩍거렸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표정을 떠올리며 터덜터덜 학술원 복도를 걸었다.
그때 누군가가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엘리즈.”
익숙한 호칭.
케빈이었다.
“케빈.”
엘리자베스가 뒤를 돌자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퉁퉁 부은 눈을 보고 흠칫 놀랐다.
“어휴…….”
케빈의 한숨에 엘리자베스가 케빈을 노려보았다.
“왜. 뭐.”
“아니, 아니에요. 왜 돌아왔어요. 오늘은 그냥 기숙사에 가서 쉬지.”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삐쭉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가 나중에 무슨 잔소리를 들으려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오늘 같은 날까지 엘리즈한테 잔소리할 사람이에요?”
“응.”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입맛을 다셨다. 스스로 생각해도 스스로가 잔소리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듯했다.
케빈의 표정을 보던 엘리자베스가 피식 피식 웃었다. 그래도 케빈 때문에 웃음이 난다는게, 엘리자베스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함께 연구실로 올라가면서 케빈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케이 씨랑은 이제…… 어떻게 해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쓰게 웃었다.
“뭘 어떻게 해? 이제 그냥 알아서 잘 사는 거지.”
“그런데요. 오늘 조셉네 패거리 윌리스가 복도에서 얘기하는 거 들으니까 케이가 그 이국 남자뿐 아니라 앰버 양도 같이 리오든에 데려왔다던데요.”
“그래?”
엘리자베스가 짐짓 차분하게 대답하며 계단 난간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앰버 플래스와 같이 돌아왔다니. 역시 리오든에 들여오겠다는 수출입 품목이 와인처럼 간단한 것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특히나 지금은 귀족들의 데뷔탕트와 의회 개회 시기가 맞물려 있는 시기. 한 달 뒤면 박람회까지 열리게 된다.
3개월 전, 퀴닌으로 인해 리오든 이곳저곳에 촉발된 시민 운동은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신호탄은 퀴닌이었지만 경찰청 테러 사건의 주동자로 붙잡힌 로빈스가 처형장에서 ‘귀족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친 것이 불길을 이어갔다.
게다가 로빈스가 경찰청을 테러한 직후 억울하게 보비들에게 붙잡힌 수많은 범죄자들이 거리로 풀려났다는 소식까지 더 해진 덕에 시민들은 더더욱 격렬해졌다. 지금 거리로 나가면 어느 펍에서나 정치 이야기로 시끌벅적했고 왕립학술원은 물론이요 정부 기관 근처에만 가면 피켓을 든 사내 두세 명은 꼭 만나게 되었다. 특히나 왕립학술원 앞에는 일주일에 한 명은 꼭 엘리자베스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은 노동운동을 하는 여자들이었다.
‘당신은 우리의 우상이에요, 엘리자베스.’
여자들은 그런 말을 하며 스스로를 서프러제트라고 소개했다. 참정권 운동을 하는 여자라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들을 만날 때마다 오늘만큼이나 스스로가 창피해지곤 했다. 엘리자베스는 참정권 운동이 어떤 건지 솔직히 손톱만큼도 몰랐다. 그녀도 이제 평민 여성이었지만 평민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싸우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엘리자베스는 그저 자신의 야망과 지식욕을 채우기 위해 여러 가지 행운을 받아 왕립학술원에 들어온 것이었다.
학술원 내에서도 자신을 비웃는 사내들 앞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혹시 내쫓길까 봐. 엘리자베스는 현실 앞에 비굴한 여자였다. 누구와는 다르게.
“앰버 플래스.”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케빈이 걸음을 멈추곤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그…… 이젠 앰버 플래스가 아니에요. 앰버가 한 달 전에 멜니아의 상원 의원의 딸이 되었대요. 양녀가 되어서요.”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상원 의원? 그럼 앰버가 귀족이 되었다는 거야?”
보통 레본에서는 상원이란 귀족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거긴 귀족이 없잖아요. 그냥 평민이고 멜니아 상원 의원인데 전부터 교류가 있었다나 봐요. 대통령 후보라는 말도 있어요. 그래서 이제 앰버의 이름은 앰버 모건이에요.”
“그렇구나.”
엘리자베스는 자신만 빼고 그 무도회에서 다들 중요한 정보를 들었을 생각을 하니 더 우울해졌다. 자신의 꼴이 얼마나 우스웠겠나.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때 케빈이 망설이며 말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결혼할 거래요, 두 사람.”
“한 달 뒤에?”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잠시 자제력을 잃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휘어져 나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