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91화
2층 계단을 내려오는 케이의 옆에는 다리를 저는 한 남자와 케이보다 더 까만 피부를 가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까만 피부를 한 남자를 오래도록 살폈는데, 이내 자신은 물론이고 장내의 모든 이들이 그 남자를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는 이오페아 식으로 옷을 입었으나 분명 이오페아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국의 사람이었다.
남자를 본 신사들 몇몇은 ‘학질을 옮길 거다’라며 성호를 긋고 사라졌다. 하지만 남자는, 왼쪽 눈에서 시작해 오른쪽 턱에서 끝나는 기다란 흉터를 얼굴에 새기고 있는 남자는 신사들의 반응에 조금도 대응하지 않고 케이의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케이가 1층으로 내려오자 가장 먼저 케이에게 말을 건 것은 루이 니콜라스 교수였다.
“오랜만입니다. 엘우드 밀 선생.”
루이 니콜라스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보며 같이 얼굴이 굳었다. 엘리자베스는 들고 있던 리플렛을 꼭 쥐었다.
네가 돌아오는 것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네가 돌아왔을 때의 나를 말이다. 번듯한 과학자가 되어, 치료제를 손에 넣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나를.
네가 그렇게 비웃던 허울뿐인 계급, 왕족이자 귀족이 아니더라도. 시간여행기의 힘을 빌린 하잘 것 없는 과학자 흉내를 벗어내더라도.
너의 옆이 아니더라도.
행복한 나를.
엘리자베스는 초췌한 자신의 몰골을 보며 키득거리며 지나가는 과학자들 몇을 보았다.
“케빈은 혼자 발표도 못해서 마녀가 해줘야 한다지?”
“마녀는 과학자가 아니라 사업가가 다 됐네.”
“아, 그러고 보니 저 남자 케이 하커야. 마녀의 약혼자였던 남자.”
“그래서 마녀가 히스테리를 부린 거군. 하긴 이제 과학자가 되었으니 결혼하긴 글렀지.”
“그러게. 누가 저런 옷을 입은 여자를 데려가나.”
엘리자베스는 이제는 익숙해진 모욕적인 말들 사이에 서서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케이는 루이 니콜라스를 보며 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대화에 임했다.
“흥미로운 발표였습니다. 이오페아와 멜니아 간 교역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와인인데, 당장 다음 달부터라도 적용할 수 있으면 좋겠더군요.”
“저와 제 제자의 발표에 관심을 가져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저는 발표보다는 당신이 더 흥미로운 것 같군요. 떠날 때는 분명 내 제자의 약혼자였다가 돌아올 때는 신시 무역회사의 사장이 되어 있다니.”
루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시 무역 주식회사. 실소유주가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았던 근 3개월간 엄청난 무역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는 회사.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비웃으며 지나가던 신사들이 순식간에 케이의 근처로 몰려드는 것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쥐었다.
케이가 대화를 나누다가 살짝 엘리자베스 쪽을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시선이 맞닿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다가 뒤를 돌았다.
“케빈. 나 먼저 가 봐야 돼. 프란시스랑 약속을 했어.”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리플렛과 자료 몇 개를 챙겨서 회의실을 나왔다. 이미 나갈 사람들은 다 빠져나간 터라 회의실 복도는 한산했다.
엘리자베스는 혼자 복도를 걸었다. 천천히, 터벅터벅 걷고 있자 이내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조금씩 빨리 걸었다. 엘리자베스의 걸음이 빨라지자 그녀의 뒤에서 나는 발소리도 빨라졌다.
엘리자베스는 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의 호흡이 가빠졌다.
엘리자베스가 전력질주를 시작한다면 뒤에서 따라오는 저 발소리도 금방 멀어질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여겼을 때,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뛰지 마.”
엘리자베스는 그 바람에 속도를 줄였고, 그 바람에 리플렛과 자료들이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흩날렸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케이 하커가 서 있었다.
몸에 딱 맞는 멜니아 식 양복, 턱시도에 손에는 신사용 장갑까지 낀 케이 하커가 말이다.
신사용 장갑이라니.
케이 하커는 그런 것은 경멸하는 인간이었다. 그의 아내였던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자 케이가 천천히 걸어왔다. 엘리자베스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걸 본 케이가 걸음을 멈췄다.
마치 위험한 적을 만난 전쟁터의 병사들처럼 두 사람이 오랫동안 서로의 자리에 서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서로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서로의 몸짓과 외양, 입은 옷과 표정, 달라진 습관을 살폈다.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유독 까무잡잡하게 타버린 케이의 피부와 원래도 생활근육으로 꽉 짜였던 몸이 더 부푼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몸집을 부풀린 저 녀석은 그녀를 잡아먹으러 온 짐승처럼 보였다.
두 사람 사이의 오랜 침묵을 깬 것은 케이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궁지에 몰린 짐승이라도 대하듯 어르는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엘리자베스가 흘린 리플렛과 종이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지 않으며 말했다.
“거 봐. 뛰니까 이렇게 되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울컥해서 말했다.
“네가 쫓아왔으니까 이렇게 됐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나한테서 도망칠 필요 없잖아.”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망쳐?
내가 케이로부터?
도망친 사람이 누군데.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케이가 내미는 종이 뭉치를 빼앗듯 잡아당기며 말했다.
“널 죽이지 않기 위해서 도망친 거야. 다시 만나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잖아.”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가능한 일이었다. 경비병을 한 손으로 죽여버리는 것도, 엄청난 높이의 경찰청 외벽을 타는 것도, 불 속에서 뛰어다니는 것도, 엘리자베스는 이제 가능했다.
그러니 자신보다 한 뼘은 넘게 높은 이 녀석을 단숨에 죽여버리는 것도 가능해야 했다.
가능해야 했는데, 불가능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피식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눈에는 상대에 대한 경멸을 잔뜩 담은 웃음.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며 프란시스의 말을 떠올렸다.
케이를 보면 그 말이 떠오른다.
모욕적일 정도로 매혹적이다.
“죽여버리라고 했잖아. 반드시 그러라고.”
케이는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부러인지 뭐인지 케이의 동작은 아주 느렸고 엘리자베스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케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케이가 말했다.
“어제는…….”
“어제는?”
케이의 말은 의외였다. 어제라니?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과 눈, 그리고 입술 따위를 살피며 피식 웃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자신의 몰골을 떠올렸다.
달군 집게로 정돈하기는커녕 대충 질끈 묶은 머리카락은 잔머리가 잔뜩 튀어나와 있을 테고, 눈 밑에는 아기 주먹만 한 눈 그늘이 만들어졌을 테고, 입술에는 하얀 각질이 잔뜩 올라와 있을 테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네가 알 바가 아니잖아.”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살짝 돌자 케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지. 내가 알 바가 아니지.”
왜인지 모르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다시 보자, 케이가 물었다.
“……엘우드 밀은 찾았나?”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움찔했다.
엘우드 밀.
케이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단어였다.
엘리자베스가 움찔하는 것을 보자 케이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남자를 찾으려고 3개월 전에 그 기이한 연극에 우리가 함께 참여했던 거잖아.”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기이한 연극’이라고 부르는 상황을 떠올렸다. 루이와 케빈 앞에서 케이가 엘우드 밀인 척했던 그 상황을 말이다.
“놀랄 것 없어. 그땐 그냥 네가 엘리자베스라는 이름보다는 남성스러운 엘우드 밀이라는 이름으로 논문을 내고 싶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엘우드 밀이 실존인물이더군. 그래서 알았어. 네가 엘우드 밀을 찾고 있다는 거.”
케이는 마지막 문장을 발음하며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았다. 멜니아에 가 있는 동안 대체 얼마나 많은 사교 모임에 참여 했던 건지, 케이의 발음은 전과는 달리 조금의 노동자스러움도 남지 않은 완벽한 리오든 신사의 발음에 가까웠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에 신기해하며 말했다.
“케빈이 말해줬어? 엘우드 밀에 대해서?”
이 와중에도 케이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아는 것은 싫었다. 더 비참해보이지 않나. 그러자 케이가 대답했다.
“그래. 그랬지.”
케이의 갈색 눈에는 불쾌함 같은 게 잔뜩 서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눈을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는데 그건 그냥 엘리자베스가 전생에서도,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너무 케이에 대한 기억을 강렬하게 가지고 있는데다가 케이를 자주 떠올려서인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자신이 얼마나 지독하게 얽혔는지를 떠올리며 어이가 없어졌다.
“왜 돌아왔어?”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레본으로 받아야 될 수입 품목이 있어. 거래가 성사되면 다시 돌아갈 거야.”
돌아왔다, 라는 표현에 케이는 돌아갈 거다, 라고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케이가 돌아갈 곳이 멜니아이고, 앰버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품 안에 든 종이를 꽉 쥐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케이로부터 몇 발자국 걷다가 멈춰 서서 다시 뒤를 돌았다.
“왜 돌아왔냐구!”
엘리자베스의 외침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방금 말했잖아.”
“그 뜻이 아니잖아.”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잘 정돈해서 내밀었던 종이와 리플렛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핏발 선 눈으로 말했다.
“내가 널 죽여버릴 거라고 했는데, 왜 돌아왔어? 내가 널 죽여버릴 수 없을 것 같아서? 넌 내 부모의 원수야! 리오든의 모두가 알아. 널 살려 보내면 내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케이답지 않게 다정하게 변했다. 케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부부 일은 유감이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몰랐다는 뜻이야?”
공작 부부의 죽음은 대외적으로는 화재로 인한 질식사로 알려졌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3개월 전, 분명히 경찰청 내에서 공작 부부의 암살 시도를 알고 있었던 듯한 말을 들었다.
그 말은 공작 부부의 죽음에 국왕이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고, 그 말은 케이 역시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전생과 다를 바 없이 또 케이는 자신을 배신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