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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90화 (9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90화

켈리어스 교수는 당연히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만행을 저지하려고 들었지만 의외로 켈리어스 교수를 막은 것은 조셉이었다. 조셉은 아버지에게로 걸어가더니 뭐라고 속닥거렸다.

조셉의 말을 들은 요제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잠시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았다. 그러더니 경비병에게 엘리자베스까지는 같이 들어갈 수 있게 조처해달라고 너그럽게 얘기했다.

엘리자베스는 조셉이 무슨 수작인지 궁금하여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셉은 엘리자베스의 눈을 피해 상처를 둘둘 감은 손으로 차양을 만들고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 역시 경비병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들어가야 했으므로 얼른 문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주최측에 서둘러 출석인정을 받고는 주최측이 가리키는 1층 앞열에 앉았다.

2층에는 주로 ‘후원자’라고 불리는 사업가들이 편안하게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2층을 둘러볼 새도 없이 서둘러 1층 앞열에 앉았다.

이미 케빈은 발표를 이어가고 있었다.

“기존의 고온 살균 공법 같은 경우는 많은 제품의 맛과 향을 떨어뜨렸습니다. 분명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고온 살균을…….”

엘리자베스는 자리에 앉자마자 밖에서 받아온 리플렛을 열었다. 그리고 이미 몇 번이나 검수해준 케빈의 리플렛을 다시 읽으면서 고칠 점이 있는지 필기하기 시작했다. 실제 박람회에서의 성패에 따라 케빈이 부교수뿐 아니라 앞으로 교수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도 결정되는 셈이었으니까.

케빈이 발표를 시작한지 10분쯤까지는 숙취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는데 발표에 집중하다보니 울렁거림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케빈의 발표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케빈의 발표의 약점이라고 한다면 너무 어려운 말을 많이 써서 후원자들이 알아듣기가 어렵다는 것인데 그것 또한 그간의 연습을 통해 많이 개선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발표가 거의 마무리될 때쯤이 되어서야 케빈과 눈이 마주쳤다.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보며 뒤통수를 긁었다. 엘리자베스는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입모양으로 말했다. 멋있어!

케빈은 코를 살짝 씰룩거리고는 마지막으로 정해두었던 말을 했다.

“레본은 지금 대항해의 시대를 다시 한 번 맞이하고 있습니다. 해상무역의 활성화와 함께 레본은 수많은 무역품목을 이오페아 곳곳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전달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안전과 신속함입니다. 저온 살균은 제품의 안전을 담보하는 중요한 공법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케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자베스가 박수를 쳤다. 엘리자베스의 박수 소리에 몇몇 신사들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눈치 따윈 보지 않고 크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신사들도 다 함께 박수를 쳤다.

엘리자베스와 케빈이 다시 눈이 마주쳤다. 케빈이 말했다.

“발표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이 있으신 분?”

케빈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일종의 내부자들의 잔치였다.

엘리자베스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들 이미 접해보았던 케빈의 발표가 새삼 흥미로울 턱이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조셉처럼 질투 어린 눈으로 케빈을 보는 녀석도 있었고 루이 교수님처럼 뿌듯하다는 얼굴을 한 사람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두 가지 감정을 전부 담은 듯한 얼굴로 케빈을 올려다보았다. 질투와 자랑스러움이 모두 담긴 표정으로 케빈을 보았던 것이다.

박수소리가 잦아들고 케빈은 심호흡을 하며 내려오려고 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온 살균이 고온 살균과 달리 완벽하게 멸균이 되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고객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케빈은 계단을 내려오려다가 멈춰 섰다.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았다.

뒤를 돌자마자 엘리자베스는 질문자를 찾을 수 있었다. 2층에 앉아서 담배를 뻑뻑 피우는 중년의 사업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한 남자를 말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더 커진 몸집. 더 날카로워진 듯한 눈매와 차분해진 목소리.

엘리자베스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꿈을 꾸고 있다고 여겼다.

‘행복해져. 네가 원하던 대로 다 됐잖아.’

엘리자베스는 남자를 보는 순간 저 남자와 3개월 전 헤어지던 날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말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도 별 수 없이 머릿속에서 계속 그 말의 온도와 습기, 농도 같은 것이 맴돌았다.

행복해져.

네가 원하던 대로 다 됐잖아.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었다. 그 말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떠남으로써 절대로 행복할 수 없어졌고 원하던 것을 절대로 이룰 수 없어졌는데.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는지.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피부색도, 목소리도, 눈매와 덩치마저도 달라져버린 듯한 케이 하커를 올려다보며 그 말이 여전히 얼마나 위선적인지 생각했다.

난 지금도 전혀 행복하지 않아. 내가 원하던 것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 그건 전부 너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창피해.

엘리자베스는 슬픔보다는 몰려오는 수치심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분명히 돌렸는데도 케이 하커의 삐뚤어진 얼굴과 거만한 자세가, 그의 익숙한 실루엣이 잔상처럼 엘리자베스의 눈꺼풀에 남아 눈을 감아도 떠도 자꾸만 그녀의 눈앞에 케이의 모습이 떠다녔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엘리자베스가 욕지거리를 되뇌는 사이에 케빈이 버벅거리며 대답을 시작했다.

“그…… 그…… 물론 과학에 대해 무지한 이들은 저온 살균이 불안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 하지만…… 리, 리플렛을 보시면 아시듯이 저온 살균은 사람에게 해로운 균만 멸균할 수 있는 특정 온도인 63도에…… 서…….”

케빈의 버벅거림에 뒤에 있던 조셉이 키득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조셉을 노려보았다. 조셉은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눈을 피하며 웃음을 거뒀다.

엘리자베스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케빈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오만하고 건방진 저 표정. 엘리자베스는 꽤 먼 거리에서 케이의 표정을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건 엘리자베스가 몰록의 혈액에 감염된 이후 원거리를 보는 능력이 뛰어나져서만이 아니라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저런 표정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심하다는 듯, 사람을 기죽이는 표정 말이다.

케이가 말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케빈 퍼킨 씨, 과학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과학을 판매하는 것이 이번 박람회의 취지입니다. 유해한 균, 무해한 균이 무엇인지 63도가 어떤 실험을 통해 유의미해진 통계인지 따위보다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재수 없는 자식.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대체 왜 저 자식이 여기에 있는 걸까?

멜니아에 수영장인지 뭔지 하는 거대한 호수에서 손바닥만 한 천을 걸친 여자들과 희희낙락거렸어야 할 놈이 왜 여기, 리오든으로 돌아와서 저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대체 왜.

왜 돌아왔어.

앰버랑 함께 영원히 평온할 거라고 했잖아. 앰버를 지켜주고 싶다고 했잖아.

그런 주제에.

그런 주제에!

엘리자베스는 소매로 땀을 닦아 내리는 케빈을 보았다.

케이의 말을 들으려고 고개를 돌렸던 주최측 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참다못한 루이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유통기한을 표시할 겁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과 루이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사들이 전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색 양복, 하얀 셔츠와 비슷한 톱햇을 쓴 남자들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꿈을 떠올렸다.

디트리히 폰을 바라보던 똑같은 옷을 입은 고아 아이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느끼는 소외감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안 받았다. 엘리자베스가 뒤를 돌았다.

그 순간,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케이는 그제야 엘리자베스를 보았다는 듯이, 그러나 조금도 놀랍지 않다는 듯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2층 난간에 두 손을 짚었다. 무례하고 건방진 자세였다.

심지어는 대체 3개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킷으로 여며놓은 몸뚱어리가 3개월 전보다 더 커진 것 같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온 살균은 우유와 술의 풍미와 맛을 살려주고 거기에 위생적이기까지 하다. 그 증거로 보통의 고온 살균 우유와 술은 제조일자와 유통이 가능한 기한이 적혀 있지 않지만 저온 살균 공법을 사용한 우유와 술에는 그 두 가지 숫자가 전부 적혀 있다. 이게 저희가 내놓을 수 있는 보완점입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가만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2층의 신사들을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과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실험과 검증된 자료를 통해 실효성 있는 방안을 내놓는 것. 그럼 이제 소비자들에게 이 방안을 믿음으로 바꾸는 것은 사업가가 해야 할 일이겠죠.”

케이가 난간에서 손을 뗐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삐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무슨 말을 할 듯이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보곤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케빈이 케이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이제야 케이를 알아봤음을 알았다.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물었다.

박람회 주최측에서 말했다.

“다른 질문이 있으십니까?”

다들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주최측은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보곤 말을 이었다.

“그러시면 오늘 발표는 여기까지…….”

주최측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내가 시끌벅적해졌다. 루이 니콜라스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계단을 내려오는 케빈에게 걸어갔다. 케빈은 교수와 몇 마디를 나누면서도 케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엘리자베스가 일어나자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케이 하커잖아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몰라. 돌아왔나 보지.”

돌아왔나 보지.

엘리자베스는 제가 한 말 때문에 현실감을 찾았다.

케이 하커가 돌아왔다.

엘리자베스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였던 시절, 자신의 약혼자였던 남자가. 자신과 파혼함과 동시에 다른 여자와 약혼해 자신을 떠나버린 남자가. 자신의 부모의 죽음을 불러들인 남자가.

리오든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계단을 내려오는 살아 숨 쉬는 재앙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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