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89화
폭풍 같은 질주가 아닐 수 없었다.
10분 만에 준비를 마친 엘리자베스는 셔츠와 멜빵바지를 입은 프란시스가 퍽이나 마부 자리에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며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더욱 더 놀라웠던 것은 프란시스의 말을 모는 솜씨였다. 정말이지 빠르고…… 난폭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마차를 전복시키기 전에 멈춰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과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하는 마음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마차 창문틀을 꼭 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40여분을 버텼다.
온몸에 긴장을 하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긴장이 풀리니 안 그래도 끔찍한 숙취에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40여분까지. 엘리자베스의 몸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숨을 헐떡거리며 마차 문을 열었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너 괜찮니?”
“아뇨. 아니…… 제 말은…… 네…… 괜찮아요.”
엘리자베스가 온몸이 액체로 이루어진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면서 내렸다. 프란시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왕립 학술원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따가 또 데리러 올까?”
“아뇨! 절대! 절대! 괜찮아요!”
엘리자베스가 손을 휘휘 휘저었다. 그러자 프란시스는 마부석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서 엘리자베스의 잔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내가 괜히 술을 먹였어. 그제 밤에 말이야. 무도회에서 술을 이렇게 마실 줄 알았다면…….”
“마시지 말았어야 해요.”
엘리자베스는 어젯밤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와의 키스를 떠올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직 초여름이라 밤공기가 쌀쌀하긴 해도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니었는데 두 사람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두 사람의 목구멍에서부터 뜨거운 김이 흘러나왔다. 그럴 때마다 흘러나오던 탐욕스러운 신음과 점액질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를……. 엘리자베스는 잊으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잊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참지 못하고 햇빛 아래의 고양이처럼 목을 긁는 소리를 뱉어내자 남자는 살짝 입술을 떼고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아니, 가면 아래의 표정을 알 수 없으니 귀엽다는 듯 웃었는지, 아니면 음탕하다고 생각하며 웃었는지 알 도리는 없었다.
남자는 다만 엘리자베스가 신음을 내자 엘리자베스의 코에 자신의 코를 맞대고 잠시 거친 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젠장할…… 이러려던 게…….’
‘뭐라, 뭐라구요?’
엘리자베스는 남자에게 멍청하게 되물었다.
그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당신……!’
기억은 여기까지.
엘리자베스는 화끈거리는 뺨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모든 기억이 없든지. 왜 하필 그런 중요한 부분의 기억이 생생해서 이렇게 자신을 괴롭힌단 말인가. 욕망의 노예가 된 스스로의 모습은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엘리자베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걸 가만히 보던 프란시스가 말했다.
“어제, 무슨 일 있었니?”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뇨. 아뇨.”
엘리자베스의 빠른 대답이 오히려 프란시스의 의심을 부추겼다. 프란시스는 대단히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무도회에서…… 무슨 소식 못 들었어?”
엘리자베스는 슬슬 학술원 내부로 모여들기 시작한 신사들을 바라보며 대충 대답했다.
“무슨 소식이요?”
“……가 돌아왔대…….”
그때, 프란시스가 몰고 온 마차 뒤로 다른 마차가 끼익 멈춰 섰다. 당장이라도 마차를 들이받을 듯한 난폭한 운전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쪽 마부가 소리쳤다.
“뭐하는 겁니까! 이 바쁜 시간에! 비켜요!”
마부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마부를 노려보았지만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팔을 잡았다. 프란시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먼저 가볼게. 저녁에 올 테니 같이 밥을 먹는 건 어떠니? 바쁜 건 알아. 저택까지 올 필요도 없고 시내에서 한 끼만 같이…….”
엘리자베스는 뒤에서 재촉하는 마부와 바삐 걸어 들어가는 신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같이 먹어요. 6시쯤에 이 앞에서 봬요!”
엘리자베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신사들 사이로 걸어갔다. 프란시스가 오래도록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다.
* * *
엘리자베스가 거대한 회의실 앞에 섰을 때는 회의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경비병이 날선 눈빛으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늦으셨잖아요?”
엘리자베스는 겨우 3개월 전, 엘리자베스가 공녀로서 이 학술원을 돌아다녔을 때만 해도 전부 친절했던 경비병들의 표정을 떠올려봤다.
그 친절이 얼마나 손쉽게 무너지는 것이던가. 이곳의 경비병들은 아카데미 학생들을 공기 중을 날아다니는 귀찮은 날벌레쯤으로 여겼다.
엘리자베스는 겨우 1분이 지난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겨우 1분이잖아요.”
“겨우요? 겨우? 그럼 2분 늦은 사람은요? 5분은요? 10분은요?”
경비병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엘리자베스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발을 콩콩 구르며 닫히는 문 안에서 발표 준비를 하는 케빈과 출석을 확인하는 듯한 로열 박람회 주최측을 보았다. 하지만 발만 동동거릴 뿐 저 닫히는 문을 열리게 만들 재주가 없었다.
박람회에서 전시장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참석자들에게 제품을 소개하려면 반드시 이 발표회에도 참여해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발표회의 순서를 마친 상태였지만 남의 발표회에도 참석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얼굴만 구기고 초조해하는 사이에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경비병이 그 상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요제프 씨.”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았다.
그러자 부지깽이처럼 말라비틀어진 사내 하나가 자신의 몸집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조셉과 함께 엘리자베스와 경비병 앞에 멈춰 섰다.
엘리자베스는 요제프가 조셉의 아버지이자 최근 꽤 큰돈을 만진 제약회사인 돌커프의 사장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돌커프는 제약 회사 시장에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이어가는 곳으로 ‘젊어지는 마법의 물약’이라든지 ‘어린 아이의 지능을 개선해주는 건강 주스’ 따위를 판매하며 약병의 표면에 사장인 요제프 돌커프의 얼굴이 인쇄된 종이를 붙여주기로 유명했다.
엘리자베스는 시장 조사를 위해 몇 번 분석해본 돌커프 제약 회사의 약병에 그려진 요제프의 사진과 실제 요제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여겼지만 그렇다 해도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았을 때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특히나 요제프와 조셉의 등 뒤에 선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켈리어스 교수가 요제프에게 손을 살살 비비는 것을 보니 더더욱 말이다.
“이번 박람회에서 사장님의 전시실에 이렇게 장성한 조셉이 발표를 할 것을 생각하니 기대가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켈리어스 교수가 박람회에서 선보일 공산품이 수술에 필요한 현미경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켈리어스 교수의 발표에도 참석했었는데, 확실히 배율을 획기적으로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가격이 너무 세서 ‘공산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애매했다. 그리고 그 켈리어스 교수의 발표에 조교로 참여하게 된 것이 바로 조셉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셉을 보았다.
그러자 조셉이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느끼기가 무섭게 경기를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다. 조셉의 얼굴에는 어젯밤 넘어지면서 생긴 것이 분명해 보이는 멍이 잔뜩 들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조셉을 한심하게 보면서도 조셉이 어젯밤의 일로 또 무슨 꼬투리를 잡아 자신을 괴롭힐까 싶어서 벌써부터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조셉은 왜인지 뒤로 물러나더니 얼굴을 가릴 뿐이었다.
요제프가 말했다.
“초대장이오. 박람회의 후원자로서 발표회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았소.”
요제프가 내미는 초대장은 발표자들은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초대장에는 박람회가 열릴 예정인 유리로 된 거대한 피라미드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곳은 박람회가 열리는 장소인 크리스탈궁이었다.
크리스탈궁은 레본 왕실이 박람회를 주최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부어 만든 화려한 전시실이었다. 이오페아 대륙에 레본의 산업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만든 하나의 거대한 유리 조각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크리스탈궁을 볼 때마다 그 건축이 얼마나 화려하고, 또 얼마나 화재, 통기 같은 것에 취약한 쓸모없는 건물인지를 떠올리며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탈궁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레본 왕실이 얼마나 화려하게 발전하였으며 그 발전상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
레본 왕실은 그 크리스탈궁을 지을 때 신흥 사업가나 돈이 많은 귀족들을 상대로 돈을 걷어 전시실에 그들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로열 박람회의 ‘후원자’라고 부르며 이런 예비 발표회의 초대장까지 발송한 것이었다.
“그럼 들어가시지요.”
엘리자베스는 후원자의 초대장 앞에서 경비병의 콧대도 낮아지는 것을 보았다. 요제프는 경비병의 굽실거리는 태도 앞에서 피식 웃더니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곤 경비병이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문 안에 한 발을 들여놓고 뒤를 돌아 조셉에게 손짓했다.
“뭐 하고 있어. 들어오지 않고.”
조셉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대답은 하는 둥 마는 둥하며 요제프에게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가 조셉의 앞을 막기 전까지는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조셉의 앞을 막아서곤 경비병을 보며 말했다.
“5분 지났네요. 그리고 조셉은 제가 알기로 후원자가 아니라 발표자구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셉 뒤에 있던 켈리어스 교수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봐! 너 우리 의학과 학생이지?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켈리어스 교수의 분노 앞에 엘리자베스가 차분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교수님. 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엘리자베스라고 해요. 저도 이번 박람회의 발표자구요. 그리고 지각생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규정은 제가 아니라 이쪽이…….”
엘리자베스는 경비병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정했는데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경비병이 침을 꿀꺽 삼켰다. 엘리자베스의 눈빛은 무시무시했다. 그 눈빛의 의미는 이것이었다. 쟤네만 들어가고 나는 못 들어가면 가만 안 있을 줄 알아라.
엘리자베스는 어버버거리는 경비병을 향해 허리 아래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손가락 한 개를 쓰윽 들어보였다.
손가락 한 개의 의미는 이것이었다. 나는 손가락 한 개만으로도 너를 죽여버릴 수 있다.
지금의 엘리자베스에게는 정말이지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