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88화
또 꿈이다.
젠장할 꿈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제 손바닥 안에 주어진 초록색 알약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키가 아주 작았고, 그녀의 앞에 선 딱 붙는 치마에 딱 붙는 상의를 입은 데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는 엘리자베스보다 훨씬 키가 컸다. 그 뒤에는 하얀 옷을 입은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엘리자베스를 보고 있었다.
아니, 아니지. 이것은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디트리히 폰일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여자가 말했다.
“디트리히. 뭐하고 있니? 배식을 마쳤으니 약을 먹고 들어가서 쉬렴.”
여자의 말에 디트리히가 대답했다.
“우리 형이 이 약은 고아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위험한 생체 실험용 약이라고 했어요. 먹기 싫어요. 이 약을 먹으면 이상한 꿈을 꾼다구요.”
디트리히의 대답에 여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디트리히 앞으로 쑥 내밀어졌다. 디트리히는 몸을 움츠렸다.
“형?”
여자의 붉은 입술이 왜인지 모르게 호선을 그렸다. 디트리히가 대답했다.
“네. 형.”
“아, 누굴 말하는지 알겠구나. 보호사님! 엘우드 밀을 데려오세요!”
여자의 목소리에 디트리히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뭔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보호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나긴 줄 사이에서 도망가려는 엘우드를 데려다가 디트리히 앞으로 데려왔다. 여자는 엘우드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생체 실험이라니. 넌 사상이 위험하구나.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불순한 사상은 전염병처럼 여기저기 옮겨 다니기 마련이야.”
엘우드의 버둥거리는 몸 역시 디트리히 만큼이나 작다. 열 살? 많이 쳐줘야 열두 살쯤 되었을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여긴 어딜까? 이곳에 모인 자들은 전부 갸흐통 국민의 6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혼타니스 민족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는 백발에 가까운 금발이었고 피부는 희었고 눈은 초록색이었다. 이 엘프 같은 이들은 전부 ‘순혈’ 혼타니스였다.
갸흐통은 이오페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타국에서 들어온 이민자들이 갸흐통 국민들 사이에 스며들어 이제는 다민족 국가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갸흐통 왕실은 여전히 ‘순혈’ 혼타니스들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그 탓에 왕실은 ‘순혈’에 대한 믿음이 강력한 편이었다.
단일 민족 같은 것은 이미 이오페아 곳곳에서 깨져가는 신화인데도 말이다.
“모두들 따라해보세요. 조국이 하는 일에 충성하는 것이 국민의 몫이다.”
역시나 ‘순혈’ 혼타니스로 보이는 여자가 붉은 입술로 말했다. 그러자 디트리히 뒤에 주르륵 줄을 서 있던 같은 옷에 같은 머리를 한 어린 아이들이 여자의 말을 따라했다.
“조국이 하는 일에 충성하는 것이 국민의 몫이다.”
아이들이 따라하는 사이, 보호사의 손에서 버둥거리는 엘우드와 디트리히의 눈이 마주쳤다. 그때 엘우드의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던 디트리히의 턱을 붉은 입술의 여자가 그러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왜 따라하지 않지, 디트리히? 왜 엘우드를 ‘동무’가 아니라 ‘형’이라고 부른 거고? 내가 외우라고 했던 국가는 전부 외웠니? 외우지 못하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내가?”
여자의 기묘하게 뒤틀린 미소 앞에 디트리히가 몸을 떨었다.
“저, 저, 저는…….”
그때였다. 보호사들 손에 잡혀 있던 엘우드의 입이 열렸다. 엘우드가 외쳤다.
“깃발을 높여라! 대열을 단단히 갖추어라! 돌격대가 행진한다! 조용하고도 확고한 걸음으로! 반동분자들에게 뼈와 살이 찢긴 동무들도 영혼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리!”
웅장하고 단순한 멜로디였다.
엘우드의 노래에 조용히 뒤에 있던 어린 아이들도 엘우드의 노래를 따라했다. 초록색 눈, 하얀 피부, 금발의 비슷비슷한 얼굴의 아이들이 똑같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엘리자베스를 왜인지 모르게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자가 보호사에게 눈짓했다. 보호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디트리히가 그 몽둥이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더러운 군화를 신은 채 들어왔다. 디트리히와 엘우드는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화려한 견장을 한 남자가 말했다.
“여기 엘우드 밀이라는 소년이 있나?”
남자의 말에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디트리히를 안고 있던 엘우드가 천천히 일어났다.
“무슨 일이시죠?”
디트리히는 벌벌 떨리는 엘우드의 손을 쥐었다. 남자 군인이 말했다.
“네가 엘우드 밀인가?”
엘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인이 말했다.
“이번 테스트에서 엄청난 수치를 보였더군. 훌륭해. 조국의 부름이다. 엘우드 밀. 너는 이제부터 국가에게 충성할 기회를 갖게 된다.”
군인의 말에 디트리히가 엘우드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엘우드가 디트리히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박수. 박수 쳐! 엘우드 밀이 국민으로서의 몫을 다하게 되었다. 박수!”
여자의 말에 아이들이 망설임 없이 박수를 쳤다. 엘우드를 때리려던 보호사들까지 박수를 쳤다. 여자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실내가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디트리히는 불안한 눈으로 엘우드를 보았다. 엘우드는 디트리히의 손을 놓았다.
엘우드의 눈에는 이상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아니, 디트리히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는 엘리자베스는 두려웠다.
엘우드의 표정이 점점 더 국왕과 비슷한 무표정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감정은 없지만 탐욕은 있는 표정.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떠올리며 눈을 떴다.
* * *
끔찍한 숙취였다.
엘리자베스는 누군가가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디트리히 폰, 고아원, 그리고 이상한 국가.
엘리자베스는 일련의 단어들을 잊어버리기 전에 적으려다가 끔찍한 울렁거림을 느끼며 얼른 다시 누웠다.
“으으…… 이건…….”
엘리자베스가 신음소리를 내며 옆으로 돌아눕자 침대 맡에서 잠이 들어버린 메리가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메리. 메리…….”
메리가 비척비척 일어나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아가씨. 괜찮아요?”
메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괜찮아. 물…… 물 좀…….”
엘리자베스의 말에 메리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주었다.
“살짝 일어나서 마셔요. 새벽처럼 주룩주룩 토하고 싶지 않으면.”
엘리자베스는 갈증을 해소하는 물맛에 한 컵을 단숨에 비우고 물었다.
“내가 새벽에 토했어? 기억이 하나도 안나…….”
엘리자베스는 물컵을 내려놓고는 바싹 마른 수건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기억 안 하시길 다행이에요.”
메리는 그렇게 말하며 컵을 옆으로 치우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럼 어제 누가 데려다줬는지도 기억 안 나요?”
메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제야 주마등처럼 많은 기억들이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가면무도회와 조셉 패거리의 만행.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까마귀와…….
키스.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퀭한 눈 밑 그늘에 푸석푸석한 피부와 잔뜩 엉킨 머리로 일어난 엘리자베스를 보곤 메리가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움직이는 시체 같았어요, 방금!”
“누가, 누가 데려다줬는데?”
엘리자베스는 제 머리를 감싸쥐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쳤어, 엘리자베스! 처음 본 남자랑 키스라니! 음란하기 짝이 없구만!
게다가 집까지 데려다줬다고? 아무리 가면을 벗지 않았다고 한들 집을 노출해버리면 끝이잖아!
까마귀가 어떤 놈인지 몰라도 자신이 마녀랑 키스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사교계에 소문을 내지 못해 입이 근질거릴 거고, 그러면…….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3층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기분으로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요.”
“어?”
엘리자베스는 웅얼거리는 메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메리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며 탁상 옆에 놓인 사슴 가면을 들어보였다.
“케빈 퍼킨 씨요! 청력도 안 좋아지셨어요? 진짜 어쩌려고 이러세요? 요새 정말 이상한 거 아세요? 고기는 궤짝으로 먹고 야채는 조금도 안 드시고 담배만 무지하게 피워대시고! 거기에 힘은 또 좀 좋아졌어요?”
“응?”
케빈. 케빈이구나!
엘리자베스가 벙쪄 있을 때였다.
“응은 뭘 응이에요!”
메리는 혀를 끌끌 차면서 사슴 가면 위쪽을 보여주었다. 뿔 위에 선명한 검은 색 머리카락 한 움큼이 엉켜 있었다.
“뭐, 뭐야?”
엘리자베스가 당황해서 묻자 메리가 말했다.
“케빈 씨랑 토비가 서로 아가씨를 침실에 데려다주다가 투덕거리니까 아가씨가 케빈 씨의 머리채를 쥐고 안 놔줬잖아요! 한 시간씩이나! 그거 떼어 놓느라고 어찌나 고생을 했던지. 그 젊은 사람이 대머리가 되면 어쩌려고 그래요, 진짜!”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말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에.
원래도 굉장히 고귀한 레이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사의 머리카락이나 뽑아대는 여자는 아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때 메리가 중얼거렸다.
“심지어 오늘 중요한 발표도 있다고 들었는데, 옷도 못 갈아입고 가셨어요. 제가 다림질을 하긴 했지만 소매에 아가씨가 쏟은 커피도 묻고…….”
중요한 발표!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벌떡 일어났다. 핑, 하고 어지러움이 돌았다.
하지만 비틀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 중요한 발표란 케빈과 루이의 저온 살균 관련 발표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로열 박람회 참석을 위한 발표였는데 엘리자베스 역시 박람회 참석자였으므로 반드시 참관해야 하는 발표였다.
“으아아아! 지금 몇 시야, 메리? 응? 지금 설마 2시는 아니지? 아니라고 해줘!”
엘리자베스는 비명을 내지르며 메리에게 말했다. 메리가 놀란 눈으로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하, 한 시인데요?”
“으어어어…… 말도 안 돼.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달려도 45분인데!”
엘리자베스가 울적하게 외칠 때였다. 방 안에 세숫물을 가지고 들어오던 프란시스가 대야를 내려놓으며 허리춤에 손을 얹고 말했다.
“지각이니?”
“네! 완전요!”
엘리자베스가 잠옷 위에 바지를 대충 꿰며 말하자 프란시스가 혀를 끌끌 찼다.
“토비가 심부름에 갔다가 못 돌아오고 있는데. 공장 관련된 일이라서 오전 일찍 보냈는데도 못 돌아왔어.”
그 말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에에에?”
프란시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책상 위를 굴러다니던 연필 하나로 제 머리를 돌돌 말아 올렸다. 그러곤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데려다주마.”
“네에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