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87화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닐까?
엘리자베스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알고 보면 리오든 사교계 바닥은 좁디좁다. 사교계에 있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서로의 얼굴쯤은 기억하기 마련이다.
엘리자베스는 까마귀의 얼굴을 리오든 사교계의 신사들의 것으로 대입시켜 보았다. 하지만 저 까무잡잡한 피부의 흉악한 상처를 가진 남자는 새하얀 도시 쥐 같은 신사들 중 누구의 얼굴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딸꾹.”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술기운이 훅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여자와 까마귀가 둘 다 뒤를 돌아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힐끔 본 까마귀가 제 귓가를 맴도는 여자의 손을 밀어냈다. 까마귀가 말했다.
“이 레이디가 얼마를 냈지?”
까마귀의 말에 여자의 뒤에 서 있던 하인이 대답했다.
“천 파운트입니다.”
천 파운트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웬만한 가문에서는 3개월 치 생활비가 될 법한 금액인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님이 초대장을 얻어온 이 무도회가 꽤나 수준 높은 곳임을 다시 한 번 직감했다.
그런데 조셉은 대체 어떻게 여기에 온 걸까? 엘리자베스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순록 떼거리를 눈으로 찾으면서 생각했다. 아마도 조셉에게 초대장을 준 것은 켈리어스 교수일 것 같다고 말이다.
켈리어스는 의학교수로 조셉에게 호의적인 교수였다. 켈리어스가 조셉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전에 생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조셉이 중대한 실수를 해서 장장 72시간 동안의 실험 결과가 날아간 것은 물론이요 실험실 관계자 모두가 새벽 3시까지 남은 날이었다.
조셉이 한 중대한 실수란 3시간 간격으로 약을 주입한 대조군의 생쥐에게 손을 물리고 화풀이를 하다가 생쥐 2마리를 전부 놓쳐버린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를 비롯한 아카데미 학생들은 모두 조셉의 실수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나 있었는데, 켈리어스 교수는 조셉에게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거라며 관대하게 굴었다.
켈리어스 교수는 원래 절대로 그런 성격의 교수가 아니었다. 보수적이고 깐깐한 켈리어스는 학생들의 작은 실수 하나도 넘어가지 않고 학생에게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나 엘리자베스에게는 엘리자베스의 모든 실수가 다 ‘여성 특유의 유약함’ 때문이라며 몰아붙였다. 그 말을 듣고 돌아온 날에 엘리자베스는 집에 가는 길 내내 멍하니 허공만 바라봐야 했다.
그런데 조셉에게는 그렇게 관대하다니. 그것도 의학 전공자들 사이에서 유명하게 멍청한 조셉에게.
엘리자베스는 켈리어스 교수가 아니면 조셉을 이런 수준 높은 무도회에 초대해줄 사람이 없을 거라고 여겼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사이에 까마귀가 말했다.
“오천 파운트.”
“네?”
까마귀의 말에 까마귀의 가면을 벗길 생각에 들떠 있던 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까마귀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오천 파운트를 기부하겠다고 했소.”
까마귀의 말에 여자의 얼굴이 굳었다. 가면 아래로 숨겨지지 못한 입매는 잔뜩 처지고, 눈은 치켜올라갔다.
“하지만…….”
여자가 무안을 당한 얼굴로 하인을 보았다. 하인은 여자의 무안 따위보다는 돈이 더 중요하다는 듯 무자비하게 대답했다.
“그럼 여기 계신 까마귀 가면을 쓰신 신사께서 가장 많은 금액을 기부한 분이시니 이 레이디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신사께서는 어떤 분의 가면을 벗기시겠습니까?”
하인의 말에 여자의 얼굴은 새빨개지고 뒤에 있던 다른 이들은 ‘벗긴다’라는 표현을 듣고는 키득거렸다. 엘리자베스는 까마귀가 천천히 뒤를 도는 것을 보았다.
까마귀는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인이 말했다.
“그럼 토끼 가면을 쓰신 레이디의 가면을…….”
엘리자베스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 까마귀가 말했다.
“아니. 아무의 가면도 벗기지 않겠소. 가면 아래의 얼굴이라니, 그런 추한 것을 누가 보고 싶겠소.”
까마귀는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리던 이들을 가만히 보았다. 키득거리던 이들의 입매가 뒤틀리는 게 엘리자베스에게도 보였다.
까마귀는 엘리자베스에게로 성큼 다가서더니 엘리자베스의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팔짱을 끼게 했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누구랑 왔지?”
“네?”
“남자랑 왔나?”
까마귀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솜털이 일어난 목덜미로 고개를 들어 까마귀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자 까마귀가 비위가 상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여자와 구경꾼들 사이로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나가면서 말했다.
“어떤 남자지? 무슨 가면을 썼소?”
“음…… 어…….”
사슴.
사슴이라고 말해야 되는데, 엘리자베스는 사슴이라는 단어 대신에 사슴의 모양만 생각났다. 눈앞이 핑핑 돌고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똑바로 걷고 있는 것인지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레이디에게 무안을 주고 구경꾼들을 신랄하게 까 내린 이 무례한 까마귀가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의 팔짱을 끼도록 만들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는 볼룸의 카펫 위를 처참하게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사슴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머리 위로 손가락을 한 개씩 올려 보이며 말했다.
“대충 이런…… 이런 건데…….”
엘리자베스의 말에 까마귀가 얼른 엘리자베스의 손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그만, 그만.”
엘리자베스가 만들어 보인 손 모양은 리오든에서는 욕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살짝 얼굴을 붉히다가 종래에는 키득거렸다.
“크흡…… 큿…….”
엘리자베스가 어깨를 씰룩거리자 까마귀가 이를 악물곤 중얼거렸다.
“그만. 그만하라고.”
엘리자베스는 까마귀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너무 웃겨. 이 상류층의 무도회장에서 손가락 욕을 하다니. 심지어 나는 지금 토끼 가면을 썼는데!
“토끼가 욕을…… 욕을…….”
엘리자베스가 중얼중얼 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자 까마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엘리자베스의 허리춤에 손을 얹고 조금 힘을 주어 엘리자베스를 문 밖으로 이끌었다.
차가운 바람이 엘리자베스의 얇디얇은 드레스 자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웃다가 깜짝 놀라서 까마귀의 재킷 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까마귀의 움직임이 멈췄다. 엘리자베스는 까마귀의 재킷 안에 차가운 이마를 기대고 말했다.
“추…… 춥다…….”
엘리자베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까마귀가 재킷을 벗어서 엘리자베스의 어깨에 둘렀다. 엘리자베스는 그동안 꼼짝도 않고 까마귀의 셔츠 위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까마귀는 재킷을 엘리자베스의 앞섶 근처까지 잘 여미어주고는 엘리자베스의 어깨 근처에 손을 올렸다가…….
“…….”
……내렸다.
“왜 우는 거요?”
까마귀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당신이…… 당신이 어떤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까마귀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어떤 사람?”
“그래요. 어떤 사람. 나한테서 도망쳐버린 어떤 나쁜 자식 말이에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까마귀의 갈색 눈동자에 이상한 빛이 감돌았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턱 끝으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차가운, 너무 차가운 눈물이었다. 내 몸에서 나온 것이 이렇게 차갑고 낯설 수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오늘 그 사람이 아닌 남자와 키스하려고 했는데…….”
“키스?”
까마귀의 입매가 냉소적으로 뒤틀렸다. 엘리자베스는 그 입매가 무척이나 익숙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그 사람을 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할 때, 저 멀리에 다닥다닥 멈춰 서 있던 마차 중 하나가 슬그머니 움직였다.
엘리자베스는 어지러운 중에도 그 마차가 움직여서 이쪽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까마귀도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따라 그 쪽을 잠시 응시했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엘리자베스도 까마귀를 올려다보았다. 까마귀는 왜인지 모르게 화난 듯한 눈썹으로, 그리고 화난 듯한 입매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소. 하지만 해보지 않으면 영영 모를 테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까마귀의 말이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맴돌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게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문장이라는 생각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3개월 후에 괴물이 될 것이다. 프란시스는 아직도 불안정하고 엘리자베스는 과학자도 마녀도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떠나버린 남자를 잊지 못하고 있고 엘우드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할 때, 까마귀가 자신의 재킷으로 감싸진 엘리자베스의 허리에 손을 올려 엘리자베스를 잡아당겼다. 엘리자베스는 까마귀의 어깨를 잡았다.
추위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대체 뭣 때문인지 엘리자베스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두 사람의 코끝이 닿았다.
멀리서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까마귀가 자신의 코끝으로 엘리자베스의 코와 뺨을 훑어 가다가 귓가에 이르러서 나지막이 말했다.
“……해보겠소?”
까마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엘리자베스는 목덜미에서부터 온 몸의 혈관이 수축하며 혈액이 빠르게 도는 것을 느꼈다.
쿵, 쿵!
마차 소리인지 말발굽 소리인지 심장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감았다.
“네.”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까마귀가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얇은 드레스와 한 겹 셔츠 너머로 두 사람의 아랫배가 맞닿았다. 엘리자베스가 까마귀의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까마귀의 입술이 단숨에 엘리자베스의 숨결을 삼켰다.
까마귀는 엘리자베스가 더듬는 자신의 목덜미로부터 엘리자베스의 손을 내려서 자신의 손을 잡게 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집어넣고 열기가 전해지도록 꽉 쥐었다. 두 사람의 혀가 얽혔다.
맞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엘리자베스는 까마귀의 허리로 손을 넣어 베스트 옆선을 잡았다. 까마귀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받친 손을 올려 엘리자베스의 등을 받쳤다.
두 사람의 몸이 단단하게 얽혔다.
점액끼리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 선명함에 엘리자베스는 몸을 떨었다.
지금 나는 네가 아닌 남자와 키스하고 있어. 너에게 반드시 보여주고 싶은 나의 가장 끔찍한 순간이야.
하지만 끔찍한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아.
케이 하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