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86화 (8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86화

“이봐요…… 저기…… 제정신이에요?”

엘리자베스는 깨질 듯한 두통 속에서 이마를 짚고 헉헉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까마귀가 대답했다.

“아니.”

까마귀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것이었음에도 엘리자베스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어봤지? 어디서?

하지만 의식 위로 떠오른 질문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혈향을 너무 많이 흡입한 상태였으므로 하인은 물론이요, 윌리스와 조나단, 조셉 모두 까마귀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에 몰래 하인의 뒤편에 보이는 위스키를 한 병 훔쳐서 볼룸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땀 냄새, 향수 냄새, 침 냄새, 끈적끈적한 비린내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가지고 나온 위스키의 뚜껑을 성급하게 땄다. 그 바람에 위스키가 카펫에 흘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위스키로 카펫을 적시는 것이 엘리자베스가 여기 있는 인간들을 모조리 먹어치우는 것보다는 나은 결과일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식적인 인간들의 체향을 어떻게든 위스키의 스모키한 향으로 덮어보려고 했다. 엘리자베스가 비틀거리며 위스키 병을 조금 조금씩 비워갔다.

답답한 실내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던 엘리자베스는 발코니로 보이는 곳의 커튼을 쳤다.

토할 것 같아. 어지러워.

당장이라도…….

“조심하시오.”

발코니 난간 위로 상체를 수그린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쥐었다.

“힉.”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았다.

“또, 까마귀다.”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했어야할 법한 말을 밖으로 뱉어버렸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까마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가면 속 이목구비는 안 봐도 뻔했다.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이리라.

엘리자베스는 저 가면 속 얼굴을 한 번 떠올려봤다. 까맣게 탄 피부에 우락부락한 체구, 갈색 눈동자와 갈색 머리카락.

엘리자베스는 다부진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를 떠올려봤다. 커프스 링크나 장식 단추에 달고 있는 오닉스를 닮은 짙은 느낌의 사내.

엘리자베스는 가상의 사내를 떠올리다 왠지 모르게 프란시스의 말을 불쑥 떠올려버렸다.

‘내일 무도회에서 아무 남자한테나 일단 키스를 해,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아까까지 자신을 휘감던 짙은 허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상한 열기에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 발코니 커튼 안으로 열려 있던 문이 바람에 끼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쿵.

엘리자베스가 놀라 어깨를 움츠리는 사이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두꺼운 목선과 목울대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가져갔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지금 발코니에 두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무도회 발코니에서는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라는데…….’

엘리자베스에게는 물론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열여덟의 나이에 리오든 사교계에 진입함과 동시에 케이 하커에게 빠져버렸으니까.

케이 하커와의 연애라고 부를 수 없는 연애는 사교계의 신사와 레이디가 나누는 아슬아슬한 긴장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엘리자베스는 늘 케이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케이는 엘리자베스로부터 도망가느라 바빴다.

그 어디에도 가식은 없었다. 사랑을 구걸하는 엘리자베스에게도, 사랑으로부터 도피하는 케이에게도.

하지만 지금 이건…….

엘리자베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는 까마귀 가면의 남자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얼굴을 맘대로 그려볼 수 있었다. 남자의 이름도, 나이도, 가문도 모두 베일에 가려져 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이 주는 묘한 긴장감에 긴장해 손을 달달 떨며 아까 다과실에서 훔쳐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엘리자베스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본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많이 놀랐소?”

남자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한모금 빨아들인 담배를 든 손을 난간 밖으로 내민 채 말했다.

“……네?”

멍청하게도.

엘리자베스는 남자가 제대로 된 문장을 발음하는 것을 처음 들었고, 남자의 문장에는 조금도 멜니아식 억양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리오든의 귀족이나 쓸 법한 그의 발음과 억양 앞에 놀라고 만 것이었다.

“어…… 아, 아뇨. 괜찮아요.”

“누구지?”

까마귀가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까마귀의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그냥. 직장 동료쯤 돼요. 왜요? 설마 죽여버렸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까마귀가 움찔했다. 케이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지금이라도 죽여줄까? 라고 했겠지.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저 커다란 덩치의 남자에게 케이를 대입해보는 스스로에 흠칫했다.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좀 취한 것 같길래 빨리 귀가하도록 조치했소. 그게 다요.”

남자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남자는 케이 하커처럼 미친놈은 아닌 것 같았다. 다행이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난간에 몸을 기대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심해요.”

“……안 죽어요. 어차피.”

엘리자베스는 사냥터에 있는 컨트리하우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보았다. 그 언덕 아래에는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20살 때 함께 걸었던 숲과 비슷한 자작나무 숲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때를 떠올리며 피식 웃고 담배를 피웠다.

엘리자베스의 미소를 보던 까마귀가 슬그머니 엘리자베스의 옆에 걸어왔다.

엘리자베스는 남자를 꾀어 낸 것이 제 담배 냄새라고 생각하고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내밀었다.

“피울래요?”

“아니.”

“왜요?”

리오든의 신사들은 죄다 담배를 피운다. 리오든의 신사들은 담배는 건강에 좋다는 낭설을 믿는 척한다. 그건 본인들의 중독을 믿음으로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다. 마치 케이에게 중독되었던 엘리자베스가 그러했듯이.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믿었고, 거하게 배신을 당했다.

“……피우지 않소.”

엘리자베스는 까마귀의 말에 흥미를 가졌다.

엘리자베스는 이제는 혈향 때문이 아니라 술기운에 몰려오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내일도 끔찍한 숙취를 맞이하게 될 거라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다면야 더더욱, 이라고 생각하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까마귀는 엘리자베스의 손에 들린 위스키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이번에는 술을 내밀었다.

“마실래요?”

“아니.”

“왜요?”

“……마시지 않소.”

엘리자베스는 이쯤 되면 까마귀가 거부하고 있는 것은 술이나 담배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봐요. 나랑 대화하기 싫어요?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하며 구겨진 얼굴로 술과 담배를 하자 까마귀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위태로워 보여서.”

“내가요?”

“…….”

남자가 대답하지 않자 엘리자베스는 손을 휘저었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이럴 거면 나가요. 혼자 있고 싶으니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난 처음 보는 사람하고 대화를 잘 못해요. 그러니까…….”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하는 순간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또 거칠게 쓸어올렸다. 그때 남자의 커프스 링크가 벌어지다 못해 튕겨져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소매가 벌어지면서 보이는 흉흉한 상처를 눈에 담았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곤 남자의 아마도 염증 때문일 열기가 잠식한 팔을 잡았다. 남자가 움찔했다.

엘리자베스는 비틀거리며 남자의 팔을 자세히 살폈다.

“술을 안 마신 이유가 있군요. 이 정도면 인대가 잘렸을 수도 있어요. 멀쩡한 건 기적이에요. 흉터를 낸 칼이 어떤 녀석이죠? 놀라울 정도로 상처가 깊어요. 곡도인가요?”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상처에 몰두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남자가 자신의 팔위에 올려진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열기를 느꼈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열기가 단순히 염증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남자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엘리자베스는 멀어지는 남자의 열기를 느끼며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갈증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궁금해졌다.

정말로 키스를 하면 마음이 갈까? 정말로? 키스를 해버리면 케이에게 주었던 마음을 모조리 되찾아올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랑 대화는 못해도 입은 맞추나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두 사람 사이에 차디찬 침묵이 흘렀다. 엘리자베스는 제가 생각해도 뻔뻔하게도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미쳤소?”

“아뇨.”

물론 미쳐버릴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은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취했군.”

“그것도 아닌데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체향이 남자의 걸음보다 빨리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남자의 체향은 묵직하면서도 이상하게 달콤한 느낌이 났다. 엘리자베스는 이 남자를 먹고 싶은 것인지, 이 남자를 탐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깊은 갈색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한 뼘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남자의 눈에 서린 날선 경멸을 엘리자베스는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이 남자와 키스하게 되리라는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그때였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까마귀 씨를 찾아야죠! 까마귀 씨!”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가 뒤를 돌며 이를 악물었다. 남자가 엘리자베스를 두고 나가려는 듯 발코니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발코니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껏 상기된 표정의 여자가 들어왔다. 귀족으로 보이는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는 남자를 보자마자 외쳤다.

“내가 찾았어요. 까마귀 씨를. 이제 까마귀 씨의 가면을 열면 되겠네요.”

“뭐요?”

뒤에서 벙찐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여자가 엘리자베스를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제 기부회가 시작되었어요. 지금까지는 제가 최고액이에요. 저는 까마귀 씨의 가면을 벗기기로 했어요.”

그렇게 말한 여자는 붉은 입술로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까마귀의 가면을 손으로 직접 벗겨줄 작정인 모양이었다.

발코니 커튼이 바람에 흩날리면서 볼룸 안의 사람들이 전부 이쪽을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가면의 끈에 닿은 여자의 손을 보았다.

까마귀는 누굴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