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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85화 (8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85화

정말로, 문자 그대로, ‘노려보았다.’

남자는 엘리자베스가 무슨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듯한 경멸과 혐오의 시선을 담은 눈으로 쳐다보더니 심지어는 신사가 레이디를 만났을 때는 절대 하지 않을 법한 손짓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탓에 남자의 값비싼 커프스 링크로 고정된 소매가 벌어지면서 남자의 손등이며 손목 부분이 보였는데, 거기엔 웬 기다란 자상이 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반사적으로 그 자상이 길어봤자 한두 달 사이에 난 상처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누가 응급처치를 해줬는지는 몰라도 저 정도 길이에, 저 정도 흉터가 남을 상처라면 지금 저렇게 아문 것이 놀라운 수준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남자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저도 모르게 불쑥 말했다.

“오늘은 술을 드시지 않는 게 좋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아직 빨갛게 부푼 흔적이 남아 있는 흉터를 보며 말했다. 그러나 검은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별 이상한 여자를 다 보겠다는 듯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자신이 사과조차 잊어버리고 쓸데없는 참견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방금은 죄송…….”

엘리자베스가 얼른 격식을 갖추려고 할 때 남자가 뒷걸음질을 쳤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는 표정으로 뒤로 두세 보를 걷다가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치자 또 다시 혐오가 득시글거리는 눈빛으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곧 뒤를 돌아서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순식간에 가면을 쓴 남녀들의 틈으로 사라지는 남자를 보았다. 황당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해서 무의식중에 제 팔짱을 끼며 남자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미친 놈…….”

그 사이에 뒤에서 케빈이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토끼 양. 제가 멧돼지 친구를 찾았어요.”

케빈의 부름에 뒤를 돌자 거기엔 멧돼지 가면을 쓴 루이 교수님이 계셨다. 교수님은 능숙한 응대성 발화를 서슴지 않으며 딱 봐도 비싼 옷을 입은 신사들에게 케빈과 공동저자로 발표하기로 되어 있는 논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 주위의 신사들은 대부분 표범 가면이나 독수리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표범과 독수리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는 멧돼지라니. 엘리자베스는 존경스러운 기분이었다.

“저온 살균 공법은 앞으로 레본의 해상무역에도 지대한 도움이 될 겁니다. 안목 있는 사업가 분들이라면 놓치지 않아야 할 기회죠.”

엘리자베스와 케빈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도 훌륭하게 자신의 ‘과학’을 판매하는 루이 교수님의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케빈이 툴툴거리듯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루이 교수님은 너무 사기꾼 같아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약간의 동경과 질투가 묻어나는 것을 느꼈다.

루이 교수님은 자신의 스승을 질투하게 되었을 때부터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되는 거라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스승을 뛰어넘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케빈에게 질투가 났다. 케빈이 자신보다 몇 년이나 더 화학에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엘리자베스는 자신보다 어린 케빈이 자꾸만 자신보다 훨씬 더 먼 곳으로 향해갈 때마다 초조해졌다.

퀴닌은 신문 기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 이름을 올려 발표했고, 저온 살균은 그나마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퀴닌 인공 합성도, 저온 살균도 엘리자베스의 진짜 성취가 아니었다. 그건 그냥 시간 여행이라는 신의 장난 같은 기술에 엘리자베스에게 안겨준 우연한 습득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루이와 케빈은 자신들의 힘으로 화학자로서의 성취를 이뤘다.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의 경험과 집념을, 그리고 케빈의 천재성을 부러워했다. 엘리자베스는 죽을 때까지 진정한 과학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루이 교수가 케빈과 엘리자베스에게 눈짓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소개할 수 있는 타이밍이라고 여긴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자연스럽게 밀어 넣었다.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고는 먼저 신사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온 살균이 가능한 품목은 여러가지입니다. 우선 각종 주류가 있을 수 있지요. 사실 선더렌에서 오는 맛있는 와인들은 보관 기간이 짧습니다.”

“하지만 와인은 숙성을…….”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훌륭하게 제 몫을 해내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뒤로 빠졌다. 그리고 다과실로 향했다.

솔직히 다과실과 볼룸 사이의 경계를 지키며 예의 있게 다과실에서만 다과를 즐기는 초대객은 아무도 없어보였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래도 차마 볼룸에서 카펫을 어지르며 다과를 즐기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다과실에 있는 케이크 종류를 살피다가 오렌지로 장식한 파운드케이크를 한 조각 덜어 왔다.

엘리자베스는 다과실 한쪽에 있는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어 파운드케이크를 맛보았다.

‘맛있어.’

엘리자베스는 무도회 자체보다도 이런 무도회에 오면 먹을 수 있는 각종 파티용 케이크가 그리웠던 적이 있었다.

파티용 케이크들은 버터와 설탕을 잔뜩 넣어 외관만큼이나 화려한 맛을 자랑했다. 이런 케이크에 와인 따위를 넣어 얼린 워터 아이스를 마시면 금상첨화였다.

엘리자베스는 눈으로 워터 아이스를 찾다가 하인이 하는 말에 실망했다.

“죄송합니다. 사냥터에서 사냥하고 돌아오신 신사분들이 워낙에 워터 아이스를 많이 드신지라 소진되었네요. 지금 가장 시원한 음료는 샴페인인데, 어떠세요?”

엘리자베스는 하인의 말에 입맛을 다셨다. 어제 워낙 술을 많이 마셔서 술은 자제하려고 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하인이 들어 보이는 샴페인 병 표면에 살짝 낀 살얼음을 바라보았다.

이 답답한 초여름의 볼룸에서 살얼음 낀 음료는 사양할 수 없는 법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유혹에 굴복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잔이요. 한 잔이면 되겠어요.”

엘리자베스가 입맛을 다시며 샴페인 잔을 받아가지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웬 순록 떼거리가 엘리자베스의 자리 근처에 모여 서 있었다. 세 명의 순록 가면을 쓴 남자들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가면이 터져나갈 듯한 커다란 얼굴을 한 중간에 서 있는 사내를 보고 그 사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조셉이다.

엘리자베스는 가면으로 가려진 입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재수 없네.”

엘리자베스의 중얼거림은 아주 작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순록 떼거리는 예민한 청력을 가진 듯 엘리자베스에게 시비를 걸었다.

“방금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순록 씨. 비켜주시죠. 제 자린데요.”

엘리자베스는 조셉의 양 옆에 서 있는 윌리스, 조나단으로 보이는 남자들에게 말했다. 윌리스와 조나단은 조셉의 패거리들이었다.

조셉이 피식 웃었다.

“여기 당신 자리는 없어, 토끼 양.”

조셉은 그렇게 말하며 귀를 펄럭이는 흉내를 내보였다.

“토끼들은 원래 여기 모여 있는 동물들 중에서도 제일 작고 힘없고 볼품없는 존재거든.”

조셉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토끼고기가 여기 모인 초식 동물들 중에 제일 맛이 없다는 건 동의하겠어, 순록 씨. 그래서 기분이 좋은가보지? 좋은 먹잇감이 되어서 말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셉이 움찔했다. 사교계의 냉소적인 조롱에 대해 조셉은 반응속도가 무척이나 느린 편이었다. 그런 눈치도 부족할 뿐더러 사실 조셉은 신흥 사업가의 아들로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케빈은 조셉이 엘리자베스의 출신 성분 때문에 엘리자베스를 괴롭히는 걸 거라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출신 성분으로 사람을 나누는 저열함을 장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날 놀리는 거지? 또 말이야. 감히 반역자의 딸 주제에.”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나인 건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저번에 화분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이 정도면 넌 날 따라다니는 게 아닌가 싶어. 날 열렬히 사랑해서 말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셉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이상할 만큼 흥분하며 말했다.

“당연히 너는 눈에 띄지. 너 같이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여자가 학술원 아카데미에 있는데, 그럼 눈에 안 띄길 바랐어? 셔츠에 바지라니. 네가 무슨 진짜 과학자라도 된 줄 아나 보지?”

엘리자베스는 조셉의 목소리에 어린 흥분감에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조셉은 덩치가 꽤 큰 남자였고, 지금 이곳에는 엘리자베스를 도와줄 만한 인간이라고는 하인밖에 없었다.

한 두 대쯤 맞는 건 상관없었지만 그 장면을 목격할 사람이 없다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일단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꽤나 봐줄 만하게 입었네. 이렇게 입으니까 드디어 마녀도 여자처럼 보이잖아? 엉? 안 그래?”

조셉이 엘리자베스의 팔뚝을 우악스럽게 잡아채기 전까지는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조셉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습기와 목덜미에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며 팔을 뿌리쳤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의 힘을 이기지 못한 조셉의 몸이 벽에 밀쳐졌다. 그러면서 조셉의 손에 들려 있던 위스키 잔이 깨져나가고 조셉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괜찮으세요?”

조셉의 피를 본 하인이 서둘러 달려왔다. 엘리자베스는 팔 안쪽의 여린 살로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가능한 숨을 적게 쉬려고 노력했다. 입구에서 하인에게 맡겨둔 가방을 찾을 수 있다면 거기 안에 케빈이 만들어준 약이 있을 것이다. 그걸 먹으면 충동이 쉽게 억제…….

“이런 미친년이. 너 이 사실을 내가 반드시 교수님들께 고하겠어. 반역자의 딸 주제에 학술원에 들어온 복 받은 년이 감히 나를 죽이려고 들다니!”

엘리자베스는 어지러운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서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돌았어? 겨우 그딴 상처로 사람은 죽지 않아! 넌 의학 전공자로서의 자격이 없어, 조셉. 멍청한 새끼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셉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조셉은 분노한 얼굴로 들고 있던 깨진 유리잔을 보았다. 당장 엘리자베스의 얼굴로 그것을 던지려는 듯 조셉의 어깨가 움직였다. 엘리자베스의 눈에는 아주 천천히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조소했다. 어차피 상처가 남지도 않을 거 좀 찔려주고 꼬투리를 잡아 버릴까, 아니면 피할까?

하지만 조셉의 손에서 진한 혈향이 엘리자베스의 몸을 덮쳐오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셉을 위해서 몸을 피하려고 했다.

콰광!

조셉의 가슴팍을 누군가가 단숨에 발로 걷어차지 않았다면 말이다. 조셉이 옅은 비명을 내지르며 벽에 메다 꽂혔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았다. 곧 검은 까마귀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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