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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84화 (8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84화

엘리자베스는 마차 안에 들어오려는 케빈에게 무서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신사답지 못한 남자랑은 마차 안 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곤 마차 손잡이를 잡은 케빈의 손을 찰싹 때렸다. 케빈은 시무룩한 얼굴로 몸을 다시 뒤로 뺐다.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엘리자베스를 찾았다.

“아가씨?”

엘리자베스는 마차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셜리와 셜리의 다섯 발자국쯤 뒤에 서 있는 미리엄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밝은 얼굴로 셜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셜리 부인!”

엘리자베스의 말에 셜리가 얼굴을 붉히며 토비를 보았다.

“부인이라니…… 어쩜…….”

셜리나 미리엄이나 수줍음이 많은 성격 같다고,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엘리자베스는 왜인지 굳어진 표정의 미리엄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미리엄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때 셜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며 물었다.

“좀 괜찮으세요? 벌써 소식 들으셨어요?”

셜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소식? 무슨 소식?”

셜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미리엄이 재빨리 걸어오더니 현관문 앞에 감자 푸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숙사에서 식사도 변변치 않게 하실까 봐 가져왔수. 많이 드세요. 가자, 셜리.”

미리엄의 말에 셜리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방금 왔는데 바로 가요? 감자 스프를 직접 끓여드리기로 했잖아요.”

엘리자베스는 셜리의 말에 얼른 손을 내저었다.

“어어, 아니에요. 저 두 사람이 가져다주는 감자 덕에 몸에 감자 함량이 9할은 되는 것 같으니까 감자 스프는 안 끓여줘도 돼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셜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평소와 달리 아름답게 입은 엘리자베스를 보며 셜리가 말했다.

“맞아요. 이런 날은 역시 밝게 입으셔야 해요.”

엘리자베스는 셜리에게 뭔가를 물으려고 했는데, 그때 셜리가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얼른 셜리를 미리엄에게 돌려보냈다.

“감자 스프가 싫으시면 제가 뢰스티를 해놓을까요? 사워 크림을 발라 먹으면 일품이에요.”

일주일 내내 먹었던 감자를 또 먹으라고? 엘리자베스는 감자가 저장식품이라는 사실을 셜리가 잊지 말아주길 바라며 말했다.

“아뇨!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셜리 부인. 제가 지금 급하게 케빈이랑 가볼 곳이 있어서요. 감자는 다음에…… 다음에 먹어요. 네?”

엘리자베스의 간절한 표정에 셜리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미리엄이 셜리를 잡아당겼다. 셜리는 미리엄에게로 가고, 엘리자베스는 셜리와 미리엄이 놓고 간 감자푸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관문 밖으로 나와 한숨을 짓기는 메리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마차에 다시 탔다. 그러곤 우물쭈물 하는 케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냥 타. 오늘은 특별히 용서해주는 거야.”

“고마워요,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밝아지는 케빈을 보며 엄한 얼굴을 했다.

“다시는 토비한테 함부로 하지 마.”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은 토비의 어깨가 움찔움찔 대는 것을 본 케빈이 불쾌한 얼굴로 토비를 노려보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우선, 다른 여자들하고 춤을 추더라도 반드시 석식실에 가기 전에는 나한테 돌아와야 해. 안 그러면…….”

“아 잠깐 잠깐! 다른 여자들하고 춤을 춰요? 왜요?”

케빈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케빈. 여긴 무도회야. 같이 온 파트너랑만 춤을 출 거라면 무도회를 왜 오겠니!”

* * *

“그럼 어떡하라는 거예요? 나이프를 다 따로 써요?”

“당연하지!”

하지만 처음에는 케빈을 어떻게든 계도해보려던 엘리자베스의 노력도 점차 시들시들해져갔다. 그도 그럴 것이 케빈은 귀족의 예의범절에 대해서 하나도 알지 못했고, 아니, 예의범절을 모르는 것까진 그렇다고 쳐도 그런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불상사에 대해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시 좀 당하면 어때서요? 우리도 걔네를 무시하면 되잖아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당당함 앞에서 무력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을 반박하려면 ‘현실이 그렇지가 않다. 나도 다 해봤다’라는 말로 논리를 전개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오히려 그런 말들이 얼마나 현실을 더 공고하게 만들었는지 떠올렸다.

‘여자는 남자보다 아는 게 많으면 안 된다. 남자들이란 한심하지. 하지만 세상이 그런 걸 어쩌겠니.’

엘리자베스는 제 어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고 볼룸 안으로 안내를 받기 전에 기다리는 대기실에서 급사 역할을 하는 하인이 내미는 가면을 받으며 케빈에게 최소한의 충고만 건넸다.

“그냥 아무것도 먹지 말고,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 루이 교수님 근처에서 배회하면서 대화에만 짤막하게 참여하고 내가 눈치주기 전에는 춤을 시작하지도 마.”

“한 마디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네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곧 엘리자베스에게는 귀여운 토끼 모양의 가면이, 케빈에게는 약간 과한 뿔을 가진 사슴 모양의 가면이 내밀어졌다. 하인이 말했다.

“오늘 주인님과 먼저 오신 신사분들이 사냥터에서 잡은 동물 모양입니다. 석식회 때 맛있는 사슴을 드실 수 있을 거예요.”

하인의 말에 썼던 가면을 살짝 벗은 케빈이 찝찝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이상한 말을 할까 봐 케빈의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케빈이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하인이 말을 이었다.

“규칙을 설명 드리죠. 기부회가 끝날 때까지 절대로 가면을 벗으시면 안 됩니다. 기부회가 끝나면 돈을 가장 많이 기부하신 분의 요구를 받는 분부터 얼굴을 공개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기부하신 분은 요구에 거절할 권리가 있구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대꾸했다.

“그 말은 돈을 가장 많이 기부하신 분은 끝까지 얼굴을 공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그렇죠. 신상을 지키고 비밀리에 놀고 싶다면 돈을 써라. 그런 겁니다.”

하인의 저급한 말에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하인은 다음 계절에 고용을 보장받기 어려워 보였다.

귀족들은 실제의 마음은 더럽고 불결하더라도 겉으로는 포장된 그럴싸한 말을 듣고 싶어 했다.

“가면무도회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사담을 나누시거나 춤을 추더라도 절대로 서로의 이름을 묻거나 섣불리 이름을 공개해서는 안 됩니다. 유의하세요.”

‘사담’이라는 말을 하는 하인의 눈에 묘한 생기가 돌았다.

결국 서로의 신상을 숨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다.

첫째는 계급이나 약혼,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짝이 맞는 사람들끼리 환담을 나누며 발코니 커튼 뒤로 사라지기 위해서일 것이고, 둘째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뜬소문을 조장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토끼 가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 마디로 이곳은 이제부터 거대한 인간 사냥터가 되는 셈이다.

엘리자베스 역시 몇 번 이런 식의 가면무도회를 경험해봐서 알고 있었다. 먹고 먹히고 사냥하고 사냥 당하는 귀족들의 잔치.

이런 잔치에 익숙한 귀족들은 단숨에 케빈이나 엘리자베스 같은 뜨내기들을 알아볼 것이고 그들에게 따라붙을 것이다. 이곳에서 엘리자베스와 케빈은 토끼와 사슴처럼 먹이사슬의 최하위권인 초식동물을 담당하는 셈이었다.

“물론, 문제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초대받으신 분들의 이름 옆에 가면을 기입해둡니다. 엘리자베스 양은 토끼, 그리고 케빈 씨는 사슴이로군요.”

하인은 엘리자베스와 케빈의 가면 문양을 적어두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이에 어떻게든 하인의 리스트를 훔쳐보아서 정보를 빼내려고 했지만 그런 눈치는 빠른 하인이 슬그머니 리스트를 제 몸 쪽으로 붙였다.

“그럼, 이제부터 무도회를 즐기시면 됩니다.”

하인은 공손한 척하면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교양 없다는 듯이 쳐다보곤 뒤로 슬그머니 빠졌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대기실 밖에서는 벌써부터 귀족들의 가식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열여덟 살의 어린 귀족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현기증마저 느꼈다.

오히려 용기 있게 일어나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들어간 것은 케빈이었다.

“갑시다, 토끼 양.”

* * *

거대한 인간 사냥터가 될 것이라던 엘리자베스의 예상은 한 치도 빗겨나가지 않았다.

보통은 음식이나 술을 마시는 것이 금지된 볼룸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다소 예의 없는 자세로 술잔을 들고 대화를 나누었다. 케빈과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님으로 예상되는 사람을 찾아서 조금 헤매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간에 입장하기로 했으므로 루이 교수님도 엘리자베스와 케빈처럼 입구 쪽에서 서로를 찾고 있을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두 사람이 루이 교수님을 찾아 헤매는 사이에 레이디들과 신사들이 엘리자베스와 케빈 쪽을 힐끔거렸다. 특히 케빈을 보면서 레이디들이 피식 피식 웃는 일이 잦았다.

“오늘 먹을 사슴이 왔네.”

“잘 생긴 사슴이야. 난 저런 소년 같은 남자가 좋더라.”

케빈은 그 말을 듣고는 귓가가 새빨개져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대체 귀족들은 예의를 어디에 갖다 팔아먹은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약간 망설이며 말했다.

“물론 예의가 없는 건 맞지만 여긴 무도회장이야. 다들 짝을 찾으러 온 걸 거야.”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무슨 소리긴. 너도 마음에 드는 영애랑 사담 같은 것도 좀 나눠보라는 거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런 여자들이 어떻게 마음에 들 수가 있어요? 나는 진중하고 나와 비슷한 지적수준을 갖춘 데다가 가끔 화도 불 같이 내는…….”

케빈은 말을 이어가려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뒷말을 기다리며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엘리자베스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밀려갔다. 그 누군가는 제 가슴팍을 등으로 공격하려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가볍게 그러쥐고 엘리자베스를 멈춰 세웠다. 엘리자베스는 그 손길에 놀라서 뒤를 돌았다. 그러자 검은 색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사과의 말을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잠시 그 남자의 눈을 보았다. 갈색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열기 같은 것을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왜인지 몰라도 이 남자가 뿜어내는 공기에 압도된 기분으로 남자를 뚫어져라 보았다.

남자는 턱시도라고 불리는 멜니아 식의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제비 꼬리 같은 트임 장식이 없어 간편해 보이는 재킷에 조끼에는 따로 단추가 없어 아주 비싸 보이는 장식 단추를 달고 있었다. 그 단추는 커프스 링크에도 똑같은 게 달려 있었는데 금이 분명한 테두리에 검은 오닉스가 달린 것으로, 보석이 달린 것보다 비싸진 않아 보여도 세공한 방식이나 작은 디테일로 보아 실제로는 보석만큼 비쌀 것으로 예상되었다.

엘리자베스는 멜니아의 복장 예절을 훌륭하게 갖춘 이 남자가 멜니아 귀족의 말투로 자신에게 사과를 요청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흠칫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남자는 엘리자베스가 예를 갖춰 인사를 하기도 전에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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