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83화
“생각해보면 로버트는 언제나 자기 말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사람이었다. 레본의 큰 사업가가 될 거라는 말도, 나와 키스할 거라는 말도 전부 이루어졌으니까. 그리고 로버트가 우리가 결혼하게 될 거라고 말했고 우린 결혼했고, 로버트가 자기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 거라고 했을 때…… 케이 하커가 나타났지.”
프란시스가 케이 하커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말하자 엘리자베스가 몸을 웅크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를 떠올렸다. 로버트와는 달리 언제나 말과 행동이 반대였던 남자를 말이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난 정말이지 엄마를 닮았어. 쓰레기 같은 남자를 선택하고는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 남자의 안 좋은 점만 쏙 닮은 남자를 낳다니.”
프란시스가 치가 떨린다는 듯이 이를 악물었다. 프란시스의 눈에는 고통과 좌절, 슬픔이 들어 있었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우리 엄마는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남자가 떠나버리자 결국은 자살했어. 목을 매달았지. 아직도 천장을 보면 엄마가 보여. 엄마가 그립다거나 한 건 아니야. 주정뱅이에 늘 소리만 지르는 괴물 같은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냥…… 그게 내 미래일까 싶어서…….”
프란시스의 눈빛이 흐려졌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천장을 바라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프란시스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천장에 매달릴 것만 같았다. 엘리자베스가 비명이라도 지르듯 소리쳤다.
“프란시스는 달라요!”
엘리자베스의 외침에 프란시스가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붉어진 눈으로 프란시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알고 있잖아요. 프란시스는 다르다는 것. 다르잖아요. 지금 여기에 나랑 있으니까.”
그 말에 프란시스가 중얼거렸다.
“케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로버트한테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아뇨. 케이가 도왔더라도 당신이 당신 어머니랑 같은 사람이었다면 벗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거예요. 프란시스랑 프란시스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라구요.”
엘리자베스가 단호하게 말하자 프란시스가 자신감 없는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한참을 엘리자베스의 손 안에서 떨고 있던 프란시스의 손이 어느 순간 멈췄다. 프란시스가 굳은 표정을 풀더니 한순간 웃었다. 엘리자베스 역시 따라 웃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지 못하고 웃음소리로 침묵이 깨져버렸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그딴 게 아니야. 엘리자베스.”
프란시스의 작위적인 밝은 목소리에 엘리자베스가 약간 안도하며 말했다.
“그럼 뭔데요?”
프란시스가 불쑥 소파 위로 올라오더니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잡았다.
“내일 무도회에서 아무 남자한테나 일단 키스를 해, 엘리자베스.”
“……?”
엘리자베스가 눈을 끔뻑거렸다.
“네?”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던 프란시스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뭘 놀라? 왜? 이미 윌리엄 조쉬를 마음에 담아 버렸니?”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윌리엄 조쉬는 절대, 절대 아니에요.”
“그럼 파트너로 같이 가는 케빈 퍼킨 씨는?”
프란시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케빈은 어린애예요. 그런 어린애한테 저 같은 여자를 붙여줄 순 없죠.”
“너 같은 여자가 어떤 여잔데?”
“나이 많고…… 또…….”
‘다른 남자와 운명적 사랑에 빠진 여자라니. 남자 입장에서는 끔찍한 상대요.’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의 말을 떠올리며 프란시스의 말에 속으로 대답을 해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이가 많은 건 문제가 안 돼. 여자든 남자든 초심자는 경험자의 도움을 받을수록 좋은 법이야.”
프란시스는 담담하게 말하곤 엘리자베스를 보고 웃었다.
“은근히 눈이 높구나? 그럼 네가 원하는 남자의 모습을 말해봐. 어떤 남자가 좋겠니?”
“어떤 남자라뇨?”
“무도회에서 키스할 남자 말이야. 내 경험상 키스를 하면 마음이 가게 되어 있어.”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쩔 도리 없이 웃었다.
프란시스는 굉장히 차분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광폭한 부분이 있었다. 그 두 부분이 극단적으로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조화롭다는 게 프란시스의 매력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일단 케빈보다는 좀 더 나이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케빈 퍼킨 씨는 조금 나이가 어려. 또?”
“또…… 윌리엄 조쉬보다는 덜 능글거리면 좋겠어요. 그 사람은 진심을 알기가 어렵잖아요. 그런 건 싫어요. 또…….”
미소를 지을 때는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냉소적인 매력을 가졌으면 좋겠다. 눈매는 날카롭지만 말투에는 다정함이 묻어 있는 것도 좋겠다. 윌리엄 같은 귀족 신사들의 허영은 없지만 케빈 같은 평민 남자들이 가진 생활력은 있으면 좋겠다. 그래도 케빈처럼 너무 마르진 않고 적당히 몸집이 있으면 좋겠고 그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때로는 순수한 소년처럼 굴면 좋겠다.
그래. 그러면 좋겠다.
딱 케이 하커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이르게 된 결론 앞에서 벽 앞에 선 것처럼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프란시스가 그런 엘리자베스의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모욕적일 정도로 매혹적인, 그런 남자면 좋겠어요. 프란시스.”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듣고는 살짝 웃었다. 프란시스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엘리자베스의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엘리자베스를 제 품에 안고 말했다.
“그런 남자는 인생에 두 번이나 만나는 게 아니야. 그건 인생을 망치기 딱 좋은 일이야. 엘리자베스.”
프란시스의 품에 안겨서 엘리자베스는 눈을 감았다.
저는, 저는 이미 인생을 망쳤어요. 프란시스. 제 인생은 케이가 아닌, 케이를 사랑한 저 자신이 망친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에게 하지 못한 대답을 속으로 되뇌었다.
* * *
다음 날 늦은 오후,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데리러 와서는 엘리자베스의 차림새를 보곤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응접실을 헤맸다.
그가 막 도착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옷깃이 파이고 소매가 짧은데다가 허리부터 시작한 장식이 길게 들어간 무도회용 드레스를 입고 천천히 응접실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크림색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는 머리를 곱게 땋아서 위로 올렸고, 안 그래도 하얀 목덜미에는 드레스의 어깨부분과 허리부분에 들어가 있는 것과 비슷한 꽃무늬의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살짝 내려온 잔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계단 중반쯤에 서서 케빈을 불렀다.
“케빈! 뭐해!”
엘리자베스의 말에 응접실을 고장난 태엽인형처럼 뱅뱅 돌던 케빈이 걸음을 멈추고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 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레이디가 드레스를 입었을 때는 계단 위로 반쯤 올라와서 에스코트해야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화급하게 계단 위로 걸어 올라왔다.
“그저께 분명히 얘기를 들었는데 잊어버렸어요. 에, 에, 에스코트는…….”
“이렇게.”
엘리자베스가 케빈의 팔짱을 가볍게 꼈다. 그러자 케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신발장 근처의 토비는 괜히 바닥을 쿵쿵 쳤고, 메리와 프란시스는 속닥거리며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케빈에게 말했다.
“레이디는 신사가 에스코트 해주지 않으면 석식실로 갈 수도 없고 마차에서 내릴 수조차 없어, 케빈.”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레이디들은 허리라도 다쳤대요?”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사교계의 예의범절이 그렇다는 거야. 네가 날 마차에서 끌어내주지 않으면 나는 마차에서 내릴 수도 없고 그대로 마차타고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 그렇다고 소리 내서 너를 부르면 우리는 놀림거리가 되는 거라고.”
케빈은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들은 왜 그렇게 불편하게 사는 거예요? 즐겁자고 모인 무도회 아니에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 역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모르지. 내가 아는 건 사소한 행동 하나라도 누군가가 그걸 귀족들의 예의범절이라고 시작하면 다른 귀족들이 따라 하고, 그게 규칙처럼 정해지면 그 규칙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은 도태된다는 거야. 귀족 사회의 핵심은 도태를 통한 정화야.”
“한 마디로 물갈이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양식장의 물고기처럼 귀족들을 표현하는 것이 웃겨 웃었다.
“그래. 비슷해.”
“정말 야만적이에요.”
엘리자베스는 또 한번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하지만 우린 오늘 그 귀족들과 그 귀족들 흉내를 내고 싶어 하는 사업가들에게 잘 보여서 물건을 팔아야 되니까 야만인들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어. 알겠지, 케빈?”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옷깃을 정리해주는 척하면서 뒤에서 속삭였다.
“오늘의 목적이 하나 더 있을 텐데?”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말이 ‘처음 본 남자와 키스하기’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알고 뺨과 목덜미를 화르륵 달구며 프란시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항의하려고 할 때, 토비가 발을 쿵쿵 구르며 걸어와서 케빈에게 말했다.
“어찌나 멍청한지! 아가씨를 데리고 내려오는데 백 년은 걸린 것 같군! 갑시다!”
토비의 말에 케빈이 톱햇을 벗어서 토비를 가리키며 벌컥 소리를 질렀다.
“너, 너, 너!”
케빈이 씩씩거리자 엘리자베스가 얼른 케빈의 팔을 잡아당겼다.
“케빈. 신사는 화를 내는 게 아니야.”
케빈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난 신사가 아니에요! 그리고 화라는 건 뇌와 갑상선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에 의한 자연스러운 생체 현상인데, 그걸 어떻게 참아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과학자 놈들이란.’
엘리자베스는 세상에서 제일 정확하고 이성적인 척하면서 그 누구보다 감성적이었던 다른 과학자 한 놈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정정할게. 화를 참으라는 게 아니고 언성을 높이거나 사람을 향해 삿대질을 하지 말라는 거야. 이제 알겠지?”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누구보다 과학적인 가이드라인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 정도는 뭐…….”
케빈은 그렇게 말하곤 엘리자베스에게 배운 대로 문을 열고 엘리자베스를 안내했다. 문을 열자마자 토비가 세워놓은 마차가 보이자 케빈이 다정하고 조용한 말투로 토비에게 말했다.
“토비. 내가 너를 언젠가는 반드시 주먹으로 쳐서 앞니 세 개를 부러뜨리겠어.”
그러자 토비가 대답했다.
“그 솜 주먹으로 어련하겠수.”
토비의 말에 케빈은 울컥하다가 다시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앞니가 부러지기 전에 많이 말해두라고. 앞니가 부러지면 발음이 줄줄 샐 테니까.”
케빈은 그렇게 말하곤 엘리자베스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마치 칭찬해달라는 듯한 표정에 어이가 없어진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팔짱을 놓고 혼자 마차 위로 올라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