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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82화 (8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82화

“솔튼 빌리스구나.”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대답했다. 프란시스의 대답에 엘리자베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솔튼 빌리스 후작. 그는 획기적인 증기기관 채굴기계로 광산을 손쉽게 개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왕비의 머나먼 친척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윌리엄 조쉬가 친한 친구라도 만나듯 솔튼 빌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을 보며 속삭였다.

“저 남자, 형을 살고 있지 않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얼마 전에 나왔어. 지금은 사교계 시즌이잖니. 왕비의 힘이 막강할 때야. 솔튼 빌리스가 한 짓이 얼마나 대단하든, 지금 왕비의 후광만큼 대단할 건 없지. 솔튼 빌리스가 형을 오랫동안 사는 바람에 왕비의 명예가 많이 깎여 내려갔어. 왕비도 오래 참은 거고, 국왕은 오래 벌을 준 셈이란다.”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를 동경의 눈빛으로 보았다. 어쩜 프란시스는 저런 모든 걸 잘 알고 있을까?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런데 윌리엄 조쉬 경이랑 친해 보이네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알 수 없는 일이야.”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도 모르는 게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솔튼 빌리스의 음울한 눈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주름이 많이 진 솔튼 빌리스의 얼굴을 보며 살짝 눈인사를 했다. 솔튼 빌리스도 엘리자베스에게 눈인사를 했다. 엘리자베스와 프란시스는 솔튼과 윌리엄보다 먼저 가게를 빠져나왔다.

엘리자베스가 마차에 오르려다가 문득 깨달았다.

솔튼 빌리스의 외모가 주는 위화감의 정체를 말이다.

솔튼 빌리스의 은발에 가까운 금발이나 초록색 눈, 하얀 피부는 생각해보니 엘우드 밀의 특징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왕비가 갸흐통 사람이죠?”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왕비와 솔튼 빌리스, 그리고 엘우드 밀이 전부 비슷한 외모를 공유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발에 가까운 금발, 초록색 눈, 그리고 새하얀 피부.

엘프 같은 얼굴은 그들의 민족적 특성이었다. 갸흐통의 사람들 중에서도 혼타니스라는 원주민이 가진 특성 말이다.

왕비는 갸흐통 왕실 혈통이었고, 솔튼 빌리스는 왕비의 혈통이었다. 그렇다면 엘우드 밀은…….

“그렇지. 갸흐통 사람이지. 갸흐통에 영지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단다.”

프란시스는 취기가 오르는 듯 살짝 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우드 밀은 갸흐통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엘우드가 통행증이 없는 이유는 그런 이유일 거고, 경찰청 감옥에서 살다나온 이후 얼굴을 숨기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다녔으리라. 그렇다면 디트리히 폰이라는 작자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그 이상한 격자무늬는 아마도 갸흐통과 관련된 무늬겠지.

엘리자베스는 무엇을 찾아보아야 할지 약간은 감이 잡힌 느낌을 받았다.

* * *

엘리자베스와 프란시스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케이가 찬장에 고이 모셔두었던 비싼 술을 땄다.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라도 된 것처럼 위스키를 젠체하며 음미하고 담배를 피웠다.

엘리자베스는 취기가 도는 몸을 소파 위에 던지듯 소파에 누워서 메리가 잘 만져준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말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음. ‘난 물론 너와 키스하는 꿈을 꿔. 널 갖고 다시는 안 놔주는 꿈을 꾸지. 하지만 그건 사춘기 소년들이 몽정할 때 인생에서 만나본 가장 재수 없는 여자를 떠올리는 거랑 비슷한 거야.’ 케이가 이렇게 말했어요.”

엘리자베스가 로킨트 펍 앞에서 있었던 얘기를 말하자 프란시스가 놀란 눈으로 소파 아래쪽에 앉아서 말했다.

“설마! 케이 하커가 정말 몽정이라는 단어를 썼단 말이니?”

엘리자베스는 키득거리느라고 진동하는 프란시스의 어깨를 보며 웃었다.

“진짜예요!”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붉히며 제 손바닥에 뺨을 묻었다. 엘리자베스는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엄마한테 제 첫 키스를 고백하는 사춘기 딸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기묘한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탐스러웠다. 그녀는 부모로부터도, 짧은 신혼생활을 했던 케이로부터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가족간의 우애 같은 것을 프란시스로부터 느끼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이대로 그냥 남은 3개월이 30년이 되었으면. 그래서 프란시스를 지켜주면서 이 저택에서 케이를 그리워할 수 있었으면.

때때로 괴롭고 지독히 슬프겠지만 그마저도 생의 기쁨으로 알고 누릴 수 있었으면. 죽지 않을 수 있었으면.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코를 들이마셨다. 프란시스가 키득거리며 웃다가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뭐야. 그게 끝이야?”

“아뇨…… 아니에요…….”

엘리자베스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어떻게든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인생에서 만나본 가장 재수 없는 여자를 보며 흥분할 수 있다면 그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 제가 말했어요. 케이는 놀란 눈을 했고, 제가 케이의 멱살을 쥐었죠. 그리고 저한테로 당겨왔어요.”

“천천히?”

프란시스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마요. 아주 세차게 당겨왔어요. 그리고 박치기라도 하듯이 입을 맞췄죠.”

엘리자베스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기 시작한 프란시스를 보며 자신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해보면 멍청한 첫 키스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엘리자베스에겐 진짜 첫 키스는 아니었지만, 전생을 기억할 도리 없는 케이에게는 첫 키스이리라. 엘리자베스가 벌이라도 주듯 해버린 그것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첫 경험을 망쳐버렸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엘리자베스는 배를 부여잡고 무너지는 프란시스를 보며 한참을 웃다가 물었다.

“프란시스는요?”

“나?”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프란시스는 카펫 위에 앉아 위스키를 마시며 소파 위에 턱을 괴었다.

“나는 생각도 잘 안나. 벌써 그게 20여 년 전이잖니. 나는 빼주렴.”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어. 절대 안 되죠. 오늘은 전부 털어놓고 전부 잊기로 했잖아요. 오늘 얘기해야 잊을 수 있는 거예요. 프란시스. 기억해내요.”

엘리자베스의 재촉에 프란시스가 웃었다.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진심으로 기억 저편에 있는 추억을 꺼내듯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 옛날이야…… 너무…….”

엘리자베스는 중얼거리는 프란시스를 보며 생각했다.

나에게도 케이와의 첫 키스가 잊히는 날이 올까?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몰록이 되어 이성을 잃지 않는 한.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이미 3개월의 시간을 엘우드 밀의 시체가 하일 강 어딘가에서 떠오르길 기다리며 보냈고 시체 안치소에 찾아가 부랑자들의 시체를 일일이 살펴보다가 어느 날 그냥 결심해버렸다.

몰록이 되느니 죽겠다고.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을 충분히 빠르게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한 독성물질을 만들어 가지고 다닐 계획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를 부러워하며, 또 안타까워하며 보았다. 프란시스가 그때까지는 충분히 강해져야 할 텐데.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프란시스의 헐렁한 소매 안쪽으로 보이는 자상을 바라보는 사이 프란시스가 말을 시작했다.

“그래.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드레스 샵에서 본 영애들 정도 나이였구나. 열여덟? 그 정도였어. 우리 엄마는…… 남자 없이는 못 사는 여자였어. 만나는 남자들마다 다 쓰레기 같았고, 그 쓰레기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쓰레기들로부터 쓰레기 같은 자식들을 낳았지. 그게 우리 오빠 두 명과 나야.”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진지해지는 분위기에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란시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았다.

“오빠들은 제 아빠들을 닮았지만, 나는 엄마를 닮았어. 큰 오빠는 주정뱅이인 엄마의 첫 번째 남편을 닮아 술을 먹고 도랑에서 미끄러져 죽었고, 둘째 오빠는 도박꾼인 엄마의 두 번째 남편을 닮아 도박을 하다 손이 잘려 파상풍으로 죽었어. 그리고 나는…….”

프란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때는 그 웬수같은 오빠들이 살아 있었다는 거야. 매일 밤마다 큰 오빠는 술에 취해 뻗어 자고, 엄마는 그런 큰 오빠한테 소리를 지르다가 울면서 방에서 나오지 않고, 또 둘째 오빠는 도박판을 전전하느라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왔지. 그날도 그런 밤이었어. 그런데 조금 다른 일이 생겼지. 둘째 오빠가 도박판에서 자정쯤에 돌아온 거야. 웬 남자의 등에 업혀서, 완전히 취해 있더라고.”

프란시스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는 듯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 남자는 다짜고짜 자기소개를 하면서 자기가 도박판에서 우리 둘째 오빠를 우연히 봤는데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면서, 자기가 술을 사준다고 말하고 빼왔다고 하더라고. 난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았지. 결국 그 말이 진짜라면 그 남자는 도박꾼이니 믿을 만하지 않고, 그 말이 가짜라면 더더욱 믿을 만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남자는 오빠의 방으로 오빠를 업어가는 내내 헛소리를 하더라. 자기가 지금은 좀 허름해도 언젠가는 큰 사업가가 될 거라고. 레본의 누구나 자기 이름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엘리자베스는 그 남자가 누군지 그제야 눈치챘다. 자기 말대로 정말 레본의 큰 사업가가 된 그 남자 말이다.

“그러면서 내 이름이 뭐냐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 ‘난 처음 보는 도박꾼하곤 대화 안 해요.’ 그랬더니 남자가 그러더라고…….”

프란시스는 목이 탄다는 듯이 술을 홀짝거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 시절의 로버트가 아닌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을 향한 미소인 것 같았다.

“‘그럼 처음 보는 도박꾼하고 키스는 하나요?’라고…….”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의 눈에서 빠져나가는 생기를 보며 다급하게 프란시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프란시스는 살짝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엘리자베스의 손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키스했어요? 그래서?”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피식 웃었다.

“아니? 뺨을 때려줬지. 두 대나. 무례하다고 욕도 했고, 침도 뱉었던 것 같아. 그리고 같이 계단을 내려와서 현관문 밖에서…… 키스 했어. 오래도록.”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주먹을 쥐었다. 프란시스의 얼굴에 떠오른 차가운 기운이 엘리자베스에게도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모욕적일 정도로 매혹적이었거든. 그때 그 남자.”

프란시스가 말했다. 마치 그때의 로버트와 지금의 로버트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지난 20여 년 간 함께 산 남자가 완벽한 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프란시스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가 완벽한 타인이 되는 순간을 경험해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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