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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81화 (81/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81화

“뭐가 사실이야?”

프란시스가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두 사람 말이에요. 두 사람 약혼이요. 진짜예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어. 나도 그 여자를 알아. 앰버 플래스? 그 둘이 연인이라면 내가 맨손으로 불타는 장작을 잡겠어.”

“그러다 중증 화상입어요. 제가 화상 환자를 많이 봤는데…….”

“엘리자베스!”

프란시스는 벌컥 소리를 질렀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푹 쉬며 프란시스를 보았다.

“프란시스. 제가 직접 봤어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와 오래도록 평온할 거라던 케이의 표정을 떠올렸다. 3개월이나 지났는데도, 케이의 표정이나 말투 따위는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가슴 한구석을 누가 잡아 뜯은 것처럼 통증을 느끼며 말했다.

“1318호에서요. 케이가 앰버와 함께 있었어요. 프란시스가 데려다줬잖아요.”

그 말에 프란시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프란시스가 입술을 달싹이며 더듬거렸다.

“말도 안 돼. 그냥 잠깐 들른 거겠지.”

“아니에요. 케이가 직접 얘기해줬어요. 두 사람이 멜니아로 같이 갈 거라구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입술을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개 같은 자식. 나쁜 자식. 내가 앰버보다 훨씬 더 좋은 여잔데.”

내가 널 앰버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해줄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걸 보던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잡았다.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짜증나요. 너무…… 너무…….”

그때 마부석으로 통하는 창문이 열리며 토비가 말했다.

“어디로 갈까요? 보닛가게는 에렌델에도 있고 솔치노에도 있습니다, 마님.”

토비의 말에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우리 보닛 사지 말자. 그 돈으로 내가 아는 커피 하우스로 가서 물담배를 피우고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서 탕진하는 거야.”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새빨개진 커다란 눈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당장 가요.”

* * *

엘리자베스와 프란시스는 솔치노 스트리트 끄트머리에 있는 낡디낡은 커피 하우스로 갔다.

거기에는 집시처럼 보이는 사람들 몇과 무희들 몇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커피 하우스만큼이나 낡고 지쳐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피로가 편안했고 쉽게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그곳에 앉았다. 낡고 좀먹은 소파에 몸을 기대니 자신이 얼마나 늙어버렸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겨우 22살인데도, 부모의 죽음과 실연 따위를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두 번씩이나 겪어버리니 정신이 늙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은밀하게 권하는 이상한 약재가 들어 있는 물담배 대신에 사과 맛의 달콤한 물담배를 시키고 음식과 술을 푸짐하게 시켰다.

“그래도 대마 같은 건 절대 안 돼요. 중독성이 강하다구요, 프란시스.”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지겹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대마를 하자는 건 아니었어. 그냥 이국의 향신료 같은 거야.”

프란시스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얼굴로 엘리자베스가 곧 연달아 나오는 음식과 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프란시스는 씹고 삼키라고 세 번이나 말했지만 엘리자베스는 겨울 밤 한 달씩 굶어가며 산을 헤맨 늑대처럼 먹었다.

배가 너무 고팠다. 어떻게 이렇게 배가 고플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오랜만에 느끼는 허기에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허기……. 엘리자베스는 스스로가 한 생각에 골몰하려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프란시스가 가게 한 구석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시선도 옮겼다. 그러자 거기엔 구석진 테이블에서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더러운 옷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엘리자베스와 프란시스의 시선이 쏟아지자 시선을 느낀 듯 뒤를 돌았다. 은발에 가까운 금발, 새하얀 피부와 초록색 눈동자—

엘리자베스는 남자를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에게 남자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려는 찰나에 누군가가 불쑥 두 사람의 테이블 앞에 나타났다.

“아리따운 레이디들이 이런 가게에는 웬일로 오셨나요?”

엘리자베스는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팍 구기고 고개를 들었다.

윌리엄 조쉬가 엘리자베스의 굳은 표정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프란시스는 능글맞은 윌리엄 조쉬를 보며 피식 웃고 말했다.

“이런 가게에 다닌다고 쓸데없이 훈수를 할 생각이라면 썩 꺼지고 진짜로 오랜만에 만난 사교계 친구가 반가운 거라면 술이라도 한 잔 사주죠.”

프란시스가 그렇게 말하자 조쉬가 손을 내밀었다. 조쉬의 자연스러운 손짓에 프란시스가 제 손을 조쉬의 손 위에 얹었다. 조쉬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손등 위에 입을 맞추며 과장된 행동을 해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조쉬를 보며 몰래 고개를 내저었다.

‘저 한결 같은 인간.’

조쉬는 씨익 웃으며 프란시스에게 말했다.

“아름다운 레이디가 주시는 술이라면 독을 탔대도 사양하고 싶지 않네요.”

프란시스는 턱짓으로 엘리자베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름다운 레이디는 저쪽이죠. 안 그래요?”

조쉬는 그 말에 엘리자베스를 슬쩍 보곤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이쪽 레이디의 기사가 되고 싶은데요.”

엘리자베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저야말로 댁의 레이디가 될 생각이 없어요, 윌리엄 경.”

“네네, 피차 마찬가지니 다행이군요.”

프란시스는 평소 나긋나긋한 성격의 신사가 엘리자베스 앞에서는 서슴없이 거친 언행을 보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업원이 계속 안 보이니 내가 직접 술을 달라고 말하러 가야겠어. 잠시 둘이 이야기 나눠요.”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가 말리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자리를 뜨기가 무섭게 프란시스의 자리에 앉는 윌리엄 조쉬를 노려보았다. 윌리엄 조쉬는 엘리자베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 않고 자리에 앉아서 프란시스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좋은 분이에요.”

“나도 알아요.”

“아니, 당신은 몰라요. 저분은 당신이 좋은 남자를 만나길 바라고 있다구요.”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게 당신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죠?”

윌리엄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쿡쿡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아니죠. 나는 굳이 말하자면 개새끼 쪽이오.”

“어련하시겠어요.”

윌리엄은 엘리자베스의 성의 없는 대답을 듣다 지나다니는 행인들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또 다른 개새끼가 멜니아에서 돈 꽤나 만졌다고 들었는데?”

“누구요?”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 쪽을 보는 대신 술에 집중하며 물었다. 윌리엄이 대답했다.

“케이 하커 말이에요.”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었다. 엘리자베스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케이 하커에 대한 소식에 관심이 많나 보군요?”

“당연하죠. 말하지 않았소. 케이는 나에게 꽤 유용할 수도 있는 남자요.”

윌리엄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정말 연락하지 않나 보군?”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썹을 꿈틀했다.

“지금 나를 시험해보는 거예요?”

“아니. 그냥 확인해보는 건데.”

“그게 그거거든요!”

엘리자베스는 소리를 지르며 윌리엄 조쉬를 들고 있던 포크로 가리켰다.

“케이 하커든 케이 하커 할아버지든 연락 같은 거 전혀 하지 않으니까 나를 이용해서 그 자식한테 돈 뜯어낼 생각하지 마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코웃음을 쳤다.

“궁금하지도 않소? 당신과 밀접한 관계였던 남자가 멜니아의 대부호가 됐어. 이제 로버트보다 케이가 더한 재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들리는 바에 의하면 레본에서 재개된 무역 사업에서 돈을 크게 벌었던 신시 주식회사가 케이의 것이라고 하던데. 멜니아에서는 모두가 이름만 대면 아는 호화스러운 케이의 대저택에는 수영장이라는 것도 있다고 하더구만.”

“수영장?”

엘리자베스는 술잔을 들고 꿀꺽꿀꺽 마셔대며 말했다.

“그게 뭔데요?”

“방수처리가 된 호수 같은 거요. 엄청나게 커다랗고 깊고 파랗지. 거기서 수영하는 여자들은 가슴하고 엉덩이만 대충 가린 옷을 입고 다닌다지.”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의 손짓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무척이나 부러운가보군요?”

엘리자베스의 흥분한 얼굴을 본 윌리엄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무척이나 질투가 나나 보군?”

“누구한테요?”

“당연히 케이지. 케이와 케이의 여자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의 여자들이라니. 케이 하커는 약혼자를 두고 여자를 여러 명 거느릴 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것도 그 약혼자가 앰버라면 더더욱.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여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제 머릿속에 떠오른 붉은 머리카락의 여가수를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앰버를 떠올리자 미칠 듯한 허기가 다시 찾아왔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날 놀려먹어서 당신이 얻는 게 뭐예요?”

“……약간의 즐거움? 그리고, 음…….”

윌리엄 조쉬는 망설이며 제 턱을 긁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의 대답이 솔직히 별로 기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그저 술을 마시는 데에 집중했다. 그때 윌리엄이 말했다.

“당신하고 대화하는 게 즐거우니까. 이렇게라도 해보는 거지.”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윌리엄의 얼굴은 답지 않게 빨개져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윌리엄이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요. 난 좋은 남자가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당신도 좋은 여자는 아니니까.”

“무슨 헛소리예요?”

“그렇잖소. 다른 남자와 운명적 사랑에 빠진 여자라니. 남자 입장에서는 끔찍한 상대요.”

엘리자베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걸 왜인지 빤히 바라보던 윌리엄이 말했다.

“드디어 웃는군. 오랜만에 보는 미소야.”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다정한 것 같아 어이가 없었다.

“또 무슨 신통방통한 방식으로 나를 놀리려고…….”

엘리자베스는 중얼거렸다. 윌리엄은 뭔가를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윌리엄의 말은 이내 테이블로 돌아온 프란시스에 의해 공기 중으로 뱉어지지 못했다.

“곧 영업이 끝날 거라는 구나. 내일 새벽부터 참배가 있어서 일찍 나가야 한대.”

프란시스가 말하며 가리킨 주인은 곤란한 얼굴로 엘리자베스 쪽으로 눈인사를 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윌리엄이 방금 전 보였던 묘한 수줍은 얼굴은 저쪽으로 밀어두고 밝은 얼굴로 프란시스와 엘리자베스에게 인사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이 두 사람의 뒤쪽에 있는 테이블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윌리엄이 돌아간 테이블에는 아까 엘리자베스가 주목했던 그 하얀 엘프처럼 생긴 남자가 있었다.

“저 남자…….”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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