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80화
프란시스와 엘리자베스가 에렌델 스트리트에 있는 드레스 샵에서 내렸을 때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이 아주 오랜만에 구불거리며 예쁘게 치렁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셔츠와 바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 머리를 샵 전면 유리에 비춰 보았다.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머리를 꾸미는 것도, 꾸민 머리를 하고 드레스 샵에 오는 것도. 엘리자베스는 아직도 자신 안에 남은 허영 같은 것이 자동적으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며 우스워졌다.
넌 이제 평민이야, 엘리자베스. 귀족이던 시절을 그리워한다니, 귀족의 신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던 건 너였잖아.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푸른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유리창 안쪽에 있던 여자들 몇과 눈이 마주쳤다. 귀족 영애인 듯싶은 여자들은 엘리자베스를 보자마자 부채로 입을 가렸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보통 귀족 영애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는 것은 저들끼리 할 비밀 얘기가 있거나 상대에게 보이지 않게 상대를 비웃기 위한 행동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번에는 둘 다인 것 같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이 엘리자베스와 프란시스가 타고 온 겉면에 하커 가문의 인장이 달린 마차를 눈으로 힐끔거렸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엘리자베스와 프란시스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로킨트 저택의 두 마녀.
사람들이 엘리자베스와 프란시스를 부르는 별명이었다.
어느날 술에 취한 켄드릭이 로킨트 저택에 쳐들어와서는 프란시스에게 호되게 혼나고 돌아가기 전까지 프란시스와 엘리자베스에게 악담을 퍼부으면서 두 사람이 사람들의 입방아 속에서 ‘로킨트 저택의 두 마녀’라고 불린다는 소식을 전해주어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은 파혼녀! 한 사람은 이혼녀! 파혼녀는 과학자가 되겠다고 아카데미에 가지 않나, 이혼녀는 공장을 틀어쥐고 돈놀이를 하고! 심지어 그 둘은 시모와 며느리가 될 뻔한 사인데 지금은 동거를 하고 있대. 사람들이 두 사람을 마녀라고 부르는 것도 당연…….’
켄드릭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프란시스는 조용히 켄드릭에게 부지깽이를 휘둘렸다.
‘으악! 뭐 하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이긴. 네가 케이에게 늘 하던 짓이야. 켄드릭. 어린 네놈이 사람이건 짐승이건 가릴 것 없이 막 대할 때부터 너에게 했어야 하는 짓이고.’
프란시스는 부지깽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프란시스가 부지깽이를 망설이지 않고 켄드릭의 가랑이 사이에 꽂듯이 내려놓았을 때, 켄드릭은 욕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죽여버릴 거야!’
켄드릭의 말을 듣고 뒤에서 메리가 뜨거운 물을 켄드릭의 몸에 부었다.
‘나가요! 나가시라구요, 도련님!’
그 뒤로는 난투극이나 다를 바 없었다. 5대 1로 벌어지는 난투극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때를 떠올리며 프란시스를 보았다.
“어, 저기…… 다른 곳으로 갈까요?”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냥요…… 여긴 왠지 말 많은 영애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아서.”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 역시 유리 창 너머로 모여 있는 어린 영애들을 보았다.
“데뷔탕트 때문에 모여든 아이들인가 보구나. 저 나이 땐 남의 불행에 관심이 많은 법이지. 저런 어린 여자들한테 우리가 지금은 잠시 재미있는 구경거리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우리 같은 마녀들이 저들의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걸.”
엘리자베스가 그 말에 프란시스의 옆얼굴을 빤히 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프란시스는 대답하지 않고 드레스 샵의 문을 잡으며 말했다.
“들어가자는 뜻이야.”
* * *
아니나 다를까, 엘리자베스가 영애들과 거리가 좀 떨어진 곳에서 가게 주인에게 치수를 재는 사이에 영애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 쪽을 바라보며 앉아서 영애들을 등진 뒤 단 한 차례도 그 어린 영애들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고 꼿꼿이 앉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불편한 얼굴로 가게 주인이 보여주는 옷감 몇 개를 골랐다.
소매 스타일이나 어깨 스타일도 보여주었는데, 엘리자베스는 가장 무난한 걸 골랐다.
“너무 개성이 없어질 것 같은데, 레이스를 더하는 건 어때?”
프란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가게 주인에게 레이스를 보여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이 뒤쪽에 있는 선반을 가리키며 사다리를 가지러 갔다.
그 사이에 프란시스가 뒤쪽 선반으로 걸어가 레이스 무늬를 살폈다. 그 탓에 프란시스가 몸을 돌리자 영애들 중 한 밝은 갈색 머리의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헛기침을 하며 프란시스에게 접근했다.
그건 명백하게 프란시스에게 먼저 제 소개를 할 것을 요구하는 행위였다. 프란시스는 평민이었고 그 어린 영애는 귀족일 것임이 분명했으니까. 사교계의 예의범절이란 무조건 지위가 낮은 쪽에서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것을 보며 조마조마한 기분을 느꼈다. 프란시스가 자존심이 상할까 봐가 아니었다. 프란시스가 근처에 있는 부지깽이로 귀족을 혼쭐 내주면 어떡하나!
그러나 의외로 프란시스는 순순하게 예의를 갖춰 영애에게 인사했다.
“아, 근처에 계셨군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저는 프란시스입니다. 영애.”
프란시스는 일부러 성을 말하지 않았고, 그걸 들은 영애는 뒤쪽에 있는 제 패거리들에게 눈짓하며 키득거렸다.
“저는 멜리사 솔턴이라고 해요. 서부 해안가에 있는 리들스턴이 제 아버지 솔턴 자작님의 영지입니다. 리오든에서 가깝지요.”
멜리사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멜리사 쪽으로 걸어가 예를 갖추었다.
“저는 엘리자베스라고 합니다. 멜리사 양.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 말에 멜리사가 또 한 번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저 역시 영광이에요. 엘리자베스 양. 화제의 인물이시지 않습니까?”
멜리사의 말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멜리사가 자신과 프란시스를 번갈아보며 웃는 것을 보았다. 이런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은 격렬히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것이다. 저들의 장난질에서 흥미를 앗아가야 하니까. 엘리자베스는 가게 주인이 빨리 사다리를 찾아오길 바라며 묵묵히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프란시스…… 부인.”
멜리사는 짐짓 프란시스를 칭할 말이 없다는 듯이 눈을 또르르 굴렸다. 그 눈에 만들어진 곤혹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저 여자 아이는 몇 살일까? 그래봤자 이제 열여덟, 열일곱 그쯤이겠지. 엘리자베스는 데뷔탕트를 치르는 나이대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얼마나 끔찍한 규범과 시선에 시달리는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잔인하게 내재화하여 남을 괴롭히는 데에 쓰는지 알고 있었다.
멜리사가 말했다.
“부인께서는 둘째 아드님이 때때로 보고 싶으시진 않으신가요? 물론 부인께는 장성한 아드님이 둘이나 있지만 둘 모두와 교류가 없으시잖아요.”
멜리사는 케이가 프란시스와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프란시스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케이를 둘째 아들이라 칭하고 있었다. 게다가 프란시스가 어떻게 대답하더라도 놀림감이 될 것을 알면서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젠장할. 프란시스가 아니라 자신이 부지깽이를 찾고 싶은 지경이었다.
“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 아이는…….”
프란시스의 대답에 멜리사가 흥미로운 얼굴로 뒤에 있는 영애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어디에 있더라도 잘 지낼 테니까요. 성품이 올곧고 마음에 꼬인 곳이 없는 사람들은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고 자기 인생을 잘 살아가는 법입니다, 영애. 그리고 영애들.”
프란시스는 멜리사와 뒤에 있는 영애들을 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멜리사의 얼굴이 굳었다. 눈치가 아무리 없다 해도 이건 명백하게 멜리사와 영애들을 두고 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멜리사가 뭔가 말하려고 할 때, 프란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케이는 내 아들은 아니지만 그런 아이예요. 내가 오랫동안 지켜봤으니 알고 있어요.”
프란시스의 말에 멜리사가 항변하려던 말을 잃고 입맛을 다셨다. 멜리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멜리사가 반격조차 할 수 없도록 말을 끊어버린 것을 보며 약간 감탄했다.
그 사이에 가게 주인이 사다리를 가지고 올라왔다. 엘리자베스가 가게 주인을 반갑게 맞이하려고 할 때였다. 멜리사의 패거리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케이가 그런 남자인지는 알 수 없죠. 적어도 올곧은 남자라면 한 여자와 파혼하고 3개월 만에 다른 여자와 약혼한 상태로 멜니아 호텔을 돌아다니진 않을 거예요. 그렇죠? 멜리사 양? 멜리사 양의 아버지가 멜니아에 갔다가 호텔에서 케이와 케이의 새로운 약혼녀인 앰버 양을 봤다고 했잖아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얼굴을 굳혔다. 멜리사가 반격할 거리를 찾아 즐겁다는 듯이 환해진 얼굴로 말했다.
“맞아요. 게다가 어디서 양아치라도 된 건지 케이의 꼴이 무척이나 험상궂어졌다고 하던걸요. 뜨거운 태양 아래서 걷어 올린 팔소매 아래로 흉터가 무척이나 많았다고 해요. 앰버 플래스 양이 워낙에 남자들한테 인기가 좋으니, 제 새로운 약혼녀를 단속하느라 그랬겠지요.”
엘리자베스는 멜리사의 말에 참지 못하고 멜리사를 노려보았다.
“약혼녀는 짐승이 아니니 단속할 필요가 없겠죠. 그리고 앰버 양은 신의 있는 여자예요. 그녀가 약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를 둘 일은 전혀 없어요. 허영만 가득하고 신의는 찾아볼 수 없는 귀족들과는 다르니까요.”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고른 옷감과 소매, 어깨 전부 바꾸겠어요. 가장 화려한 것으로요.”
그 말에 가게 주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팔에 팔짱을 꼈다. 프란시스는 제 팔을 잡는 엘리자베스의 손가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했다. 허영만 가득하고 신의는 없는 귀족들 틈에 있으려면 약간의 위장은 필요한 법이야.”
프란시스의 말에 멜리사와 영애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멜리사는 곧 여유를 되찾은 얼굴로 두 마녀를 비웃으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 * *
프란시스는 주인에게 드레스가 완성되면 로킨트 저택으로 보내달라고 하고 마차로 돌아오자마자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뜬소문이야. 두 마녀에 대한 소문들처럼 말이야. 우리에 대한 소문이 전부 맞았다면 우린 지금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어야 해.”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마차 문을 닫았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이야. 앰버 플래스와 호텔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겠지. 둘이 약혼이라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사실이에요.”
엘리자베스가 담담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