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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79화 (7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79화

“그래서?”

엘리자베스가 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서 케빈과 무도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다 들은 프란시스는 차분한 눈으로 제 검은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는 것을 멈추고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검은색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검은 고양이 같은 프란시스의 앞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예? 아니, 뭐…… 그래서, 제 말은…… 아, 물론 제가 남은 천으로 직접 드레스를 만들어 입어도 되지만…… 음…… 아시다시피 제가 바느질 솜씨도 별로 좋지 못하구요…… 또 그렇게 하면 나중에 테이블보로 쓸 천이 아쉬울 수도 있구요…… 그, 그래서…….”

“응, 그래서.”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에게는 보이지 않게 살짝 돌아서 웃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헛기침을 하며 방 안으로 두 발자국 정도 들어왔다. 그러곤 프란시스의 등 뒤에 있는 작은 의자를 가져다가 프란시스의 머리를 직접 빗어주며 말했다.

“저, 전에 있었던 드레스는 화재 때 그을려서 쓰기도 어렵고, 저한테는 드레스가 그거뿐이었는데…….”

“응, 그런데?”

“……그래서 폐가 안 된다면 말이에요…….”

프란시스는 비실비실 올라오는 웃음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대꾸했다.

“응. 말해보렴.”

“프, 프, 프란시스 옷장에 있는 가장 낡은 드레스를 제가 하나 빌려 입고 쏜살같이 다시 가져다놓으면…….”

“엘리자베스!”

프란시스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깜짝 놀란 엘리자베스는 빗을 떨어뜨렸다.

“네?”

“너 지금 나한테 무도회에 입고 갈 드레스가 없다는 얘기를 그렇게 길고, 지루하고, 답답하게 하는 거니?”

프란시스가 화장대 위에 놓인 거울 너머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눈빛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끼며 땅바닥에 쪼그려서 빗을 주웠다.

“그, 그, 그…… 제가 꼭 가고 싶어서 가는 건 아니고요. 그냥 케빈은 제 동료기도 하구요…… 그리고 케빈 말이 틀린 건 아니거든요. 공장이 흑자 전환이 빨리 되어야 프란시스한테 제가 지는 신세를 갚을 수도 있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3개월 동안 집세 한 번 내지 못하고 로킨트 저택에서 놀고먹고 있다는 것을 통렬하게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데미에서 나오는 약간의 보조금은 정말이지 쥐꼬리만 했다. 엘리자베스는 이 거대한 저택은 물론이요, 수율이 낮아 연일 적자만 기록하고 있는 공장을 이끄느라고 프란시스가 매일 밤 숫자들이 빼곡히 적힌 장부와 씨름하는 것을 알았다.

엘리자베스는 가끔 그녀가 기숙사에서 집에 들른다는 사실 때문에 프란시스가 꼬리찜을 해서 엘리자베스를 먹일 때면 가슴에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답답했다. 대체 언제쯤 엘리자베스도 정당하게 돈을 내고 이 집에 붙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엘리자베스가 그런 우울함으로 시선을 떨구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프란시스가 화장대 아래 서랍을 소리가 나게 열고는 소리가 나게 닫았다. 그러더니 그 안에서 구깃구깃한 지폐를 꺼냈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네가 3개월 동안 틈틈이 모은 돈으로 나한테 준 생활비야. 200파운트. 이 정도면 대단한 드레스는 못 사도 괜찮은 드레스는 살 수 있을 거란다.”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니에요. 전 새 드레스를 사려는 게 아니었는데……!”

“시끄러워. 더 돈을 주고 싶지만 나도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 월급을 줘야 하는 처지라 과외 지출을 늘릴 수가 없어. 다음 달부턴 네 월급도 줘야 하고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말에 허공에서 손을 휘저었다.

“제 월급이라뇨?”

“그럼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공장으로 출퇴근하면서 월급도 안 받으려고 했어?”

“하, 하지만 저는 아카데미 소속의…….”

“교수들이 하인처럼 부려먹기나 하지 무슨 돈을 준다고.”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단호한 말에 정강이를 걷어차인 것처럼 아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많이 줄 순 없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간에 차등을 두기엔 아직 다들 최소한의 임금으로 맞춰줘야 하니까.”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말에 입술을 물었다.

“하, 하지만 저는 나중에 생산 이익이 생기면 제 몫을 받기로…….”

“했지. 물론 그것도 보장할 거란다. 그거랑 이건 별개야. 누구나 노동을 하면 그만큼의 대가를 받아야 효율이 오르는 거란다. 그리고 네 효율이 올라야 내 이익이 올라가겠지. 나는 공장 주인이니까.”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말에 두 뺨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임금이라니. 엘리자베스는 염치가 없기는 해도 임금이라는 두 글자에 가슴이 뛰었다. 처음으로 제 손으로 벌어보는 돈이었다.

귀족들에게는 삯바느질로 돈을 받는 것조차 불명예로 여겨졌기에 엘리자베스는 케이와의 결혼 생활에서는 물론이요, 처녀 시절 내내 엘리자베스는 무급 생활자였다.

물론 엘 선생과 함께 남부를 떠돌 때 엘리자베스는 귀족이 아니었지만 엘 선생은 치료에 대가를 받지 않았다. 돈 대신 음식이나 방을 제공 받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니 자신이 번 돈을 지폐로 받는 것은 처음이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프란시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이 200파운트는 내가 너한테 돌려주는 게 아니고, 내가 너한테 주는 첫 월급이야.”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월급이요? 그럼 이건 매달?”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프란시스의 손에서 지폐를 받았다.

돈을 받는 엘리자베스의 손이 덜덜 떨렸다. 프란시스는 그걸 보며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는 말했다.

“그럼 이제 돈이 생겼으니 드레스를 사러 가겠지?”

“예? 아, 아, 그건…… 그래야죠…….”

엘리자베스는 제 손에 들려 있는 지폐가 무슨 소중한 생명체라도 되는 듯이 계속 쓰다듬으며 말했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간 김에 첫 월급 받은 선물로 내가 예쁜 보닛도 사주마.”

“보닛이요? 아, 아니에요. 저는 그냥…….”

엘리자베스는 보닛이라는 말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보닛도 괜찮은 것으로 사려면 또 프란시스의 신세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눈치챈 프란시스가 말했다.

“왜? 네 몫으로 예쁜 보닛이 새로 생기면 나도 가끔 빌려 쓸 수도 있잖니. 이제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공원 산책할 때 불편해.”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정말요? 프란시스가 그렇다면…….”

엘리자베스는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사야겠죠…….”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것을 보며 프란시스가 웃었다.

“그래. 꼭 필요해. 그러니 너에겐 선택지가 없겠구나.”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엘리자베스는 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3층 창문 근처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성냥을 꺼내 담배에 불을 붙여 연초를 길게 빨아들이고 연기를 뿜어냈다.

엘리자베스가 재떨이에 재를 털며 창문을 열었다. 완연한 초여름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엘리자베스는 끈으로 대충 머리를 올려 묶고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크흠.”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놀라서 담배를 꺼버리고 뒤를 돌았다. 거기엔 메리가 서 있었다.

“메리!”

엘리자베스가 깜짝 놀라 말하자 메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 아까부터 있었어요. 아가씨가 담배를 꺼내실 때부터요.”

“난 몰랐어!”

엘리자베스는 벌컥 소리쳐놓고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프란시스한테는 말하지 않을 거지?”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담배에 알 수 없는 약초를 넣어 피우는 것은 물론이요, 가끔 과하게 즐기는 술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만큼 엘리자베스 본인도 담배나 술에 대해 프란시스에게 잘못 들키면 호되게 혼났다. 자업자득이었다.

메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가씨가 몰라서 그렇지 마님도 가끔씩 담배 태우세요.”

“정말이야?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가 성난 목소리로 몰아붙이자 메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엘리자베스가 앉은 창틀에 놓인 재떨이를 가져다가 제가 들고 있는 푸대 안에 탈탈 털었다. 엘리자베스가 그걸 보며 입맛을 다셨다.

프란시스는 환자라고!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항변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엘리자베스는 아직도 프란시스의 우울증이 완치되었다고 믿지 않았다. 프란시스는 가끔씩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잠을 잤고 소설책을 오랫동안 읽지 못했으며 두통약을 달고 살았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를 지켜내고 싶었다.

어찌 보면 모든 것이 제 운명대로 굴러간 속에서 단 한 명, 프란시스의 운명만이 바뀌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를 지켜내야만 자신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여겼다.

케이가 앰버와 떠났어도, 부모가 죽었어도, 조의 손가락이 원래대로 잘려버렸어도, 프란시스만은 살아남았듯 자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여린 촛불을 지키듯 프란시스를 지켰다.

메리는 담배를 포기하고 창틀에서 걸어 나오는 엘리자베스를 보더니 말했다.

“왜요?”

“그냥. 저택에서 피우다가 프란시스한테 들킬까 싶어서.”

“담배를 태우면서 창틀에 오래 앉아계셨잖아요, 늘.”

메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창 너머의 로킨트 스트리트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랬지.

그랬었지.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는 다른 생산적인 걸 하겠어. 이를테면…….”

엘리자베스가 뭘 할지 눈을 굴리며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메리가 대체 언제 화로에 올려뒀는지 모를 잘 달궈진 집게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를테면 머리 같은 거요!”

메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어?”

“머리에 곱슬기를 주기는커녕 요새 매일 묶고 다니셨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에렌델에 옷 사러 가신다면서요? 새 옷에는 새 머리를 해야죠?”

그렇게 말하며 메리가 집게를 딱딱 소리가 나게 힘을 줘 다물게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이 어째 가재 머리를 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요리사 같아서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하, 하지만 귀, 귀찮은데…….”

“귀찮으면 숨은 어떻게 쉬세요? 네?!”

메리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머리를 휘젓곤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쥐었다.

“오늘이랑 내일은 완벽하게 꾸미는 거예요. 담배도 멀리하고 피부에 뭐도 좀 바르고요. 꾸미고 밖에 나가면 기분이 완전히 다르다구요!”

메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평소에도 단정하게 하고 다닌다며 항변했다. 메리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엘리자베스의 머리끈을 풀어냈다.

그런 두 사람의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프란시스는 몰래 문 밖에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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