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78화
엘리자베스는 케빈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뭐, 식욕이나 충동 억제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해.”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케빈의 얼굴이 흐려졌다.
“큰 효과가 있진 않다는 뜻이네요?”
케빈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본 엘리자베스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처음 만들어본 건데, 뭘. 그리고 충동 억제 효과가 있다는 건 정말 큰 거야. 저번에 머리 위에서 화분이 떨어졌을 때, 하인 하나가 화분을 줍다가 손을 다쳤는데 피 냄새를 맡고도 아무 일도 없었거든.”
엘리자베스는 그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화분 조각에 손을 벤 하인이 제 앞에서 피 냄새를 풍길 때만 해도 엘리자베스는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엘우드가 말한 시간 6개월 중에 남은 시간은 3개월.
엘리자베스의 몸은 가끔 끔찍할 정도로 강한 허기와 폭력적인 충동들에 지배당했다. 특히나 감정적인 격양 상태일 때 더더욱 그런 경향성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모든 감정의 격양 상태에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노와 같은 감정 상태에서는 대체로 충동이 심해졌다.
“조셉네 패거리가 그랬다는 걸 몰랐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분노가 일지 않아서 말이에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가 말해주지 않았어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 조셉이라고 딱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엘리자베스의 씁쓸한 표정에 케빈이 입술을 물었다.
“엘리즈, 내가 부교수만 되면 그런 놈들은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 맨날 끔찍한 실험의 조교만 하도록 만들고…….”
“그러지 마.”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하면, 너도 나도 결국 조셉이랑 다를 바 없어지는 거야. 힘없고 약한 사람을 지위를 이용해서 괴롭히는 거 말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조셉은 별로 힘없고 약해 보이지 않는데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케빈이 한숨을 푹 쉬며 계단 난간에 머리를 기댔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한 거야?”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케빈이 고개를 들었다.
“아.”
“왜?”
“아, 그게요…….”
케빈은 왜인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며 헛기침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귀가 빨개지기까지 한 것 같은 케빈의 모습을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뭔데? 왜 그렇게 망설여?”
“제가 다음 주에 부교수 심사 결과가 나오잖아요.”
“알아. 안다고. 그것만 몇 번째 얘기해?”
엘리자베스가 양심 없게도 튀어오르는 질투심에 툴툴거렸다.
케빈은 자신보다 훨씬 선배인데, 이제 겨우 수학한 지 3개월이 된 주제에 왜 이렇게 케빈이 부러운 걸까?
아카데미에 있어보니 알 것 같다. 여기서 학생으로 지내는 것은 마치 교수님들의 발닦개가 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교수님들이 8시간 단위로 살펴야 되는 곰팡이 배양을 맡기면 실험실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자다가 일어나서 실험 기록지를 써야 하고, 동물 분변 조사를 맡기면 야행성 동물의 흔적을 찾아 뒷산을 헤매야 한다. 교수님들이 멋들어진 양피지에 기록하는 논문은 전부 그런 발닦개들의 희생을 통해 탄생한 것이었다!
그런 발닦개 신세를 탈출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실력을 검증받는 것뿐이었다. 루이 교수님의 논문에 참여하고 퀴닌 개발에 일조한 덕에 부교수 자리를 넘보게 된 케빈처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케빈이 말했다.
“이제 부교수가 되면요, 장래의 ‘경’이 되는 거나 다를 바 없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루이 교수님이 루이 교수님의 후원자 분의 초대로 가게 된 커다란 사냥터에서 열리는 파티에 저를 초대해주셨어요. 모레 밤이에요.”
케빈이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잔뜩 구겼다. 엘리자베스는 손을 비비면서 말을 더듬는 케빈을 보며 씨익 웃었다.
“너, 그거 나한테 자랑하려고 한 거야?”
“예? 아, 아뇨. 뭘. 엘리즈는 그런 데 많이 가봤을 거 아니에요. 공녀님이니까!”
“공녀님이었던 거겠지.”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손을 절레절레 휘저으며 하는 말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엘리자베스는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말했다.
“잘 갔다 와! 재밌겠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응? 그럼…….”
엘리자베스는 과거의 자신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귀족들의 사교모임을 떠올렸다.
일주일 뒤면 의회가 열릴 테고, 의회 개회시기에 맞춰서 보통 귀족 영애와 영식들의 데뷔탕트 시즌이라는 게 시작된다. 그러니 지금은 시골에서 올라온 어린 귀족들뿐 아니라 수도에서 아직 데뷔를 치르지 못하고 지냈던 귀족들이 여기저기 초대장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이다.
물론 영명 축일 때 제대로 왕비에게 눈도장을 찍지 못하여 컬로든 궁 앞에서 어떻게든 왕비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서성이는 이들도 남아 있었다. 데뷔탕트, 커밍아웃이라고도 부르는 어린 귀족들의 사교계 진입식은 어찌되었던 컬로든 궁 내부에서 왕비에게 이름을 알리고 왕비의 소개로 무도회나 정찬회에 초대되어야만 ‘데뷔를 치렀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정상적인 귀족들이라면 이미 제 자식들을 왕비 마마의 재가 하에 좋은 모임에 소개시켰으리라.
엘리자베스의 데뷔탕트도 비슷했었다. 그녀는 열여덟의 나이에 왕비 마마 앞으로 나아가 제 이름을 더듬거리며 말하곤 왕비 마마의 소개로 초대된 무도회에서 어설프게 춤을 췄었다. 방문 카드를 적는 법부터 시작해 식사 예절은 물론이요, 경칭 방법까지 전부 달달달 외워갔는데도 엘리자베스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귀족들은 그 누구도 초심자를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엘리자베스를 초대한 정찬회의 주인조차 엘리자베스가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귀족의 소개를 받기도 전에 먼저 자기소개를 했을 때 비웃음을 흘렸을 뿐 그 어떤 눈치도 주지 않았다.
18살의 봄은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했다. 엘리자베스는 정찬회나 무도회에 연달아 참여하고 집에 돌아오면 캐런이 절대 들어올 수 없도록 문을 꼭 잠그고 엉엉 울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엘리자베스는 혼자였다. 공작부부에게 이야기했다간 집안 망신을 시켰다고 뺨을 맞거나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호된 사교 시즌을 맞이한 그 즈음에 매일 밤 울다 지쳐 침대에 누워서 캐노피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생각했다. 건방지고 무례했던 케이 하커를.
‘귀족 아가씨는 마차에서 내리는 것도 혼자 못하는군.’
겨우 한 번 봤을 뿐이었는데도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처음 자신에게 했던 말을 계속 생각했다.
그 이상한 억양, 말투, 자신을 쏘아보던 눈빛.
엘리자베스는 매일 매일 케이를 떠올리다 못해 겨우 한 번 본 남자애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주는 직접적인 경멸이, 그 아이의 가식 없는 표정이, 그 아이의 노골적인 혐오가 그리웠다.
사교계에서는 그 누구도 엘리자베스의 잘못을 교정해주지 않았고 그저 뒤에서 헐뜯기만 했으니까. 바보 천치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하면서도 엘리자베스가 직접 따질 수도 없게 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그 시절의 사교계가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다. 하지만 들떠 있는 케빈에게는 사실을 말할 수 없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사람들을 사귀어 두면 좋잖아. 루이 교수님처럼 너도 너의 연구를 지지할 사업가나 귀족을 만날 지도 모르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환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럼 같이 가요! 엘리즈!”
“엉?”
“사실 루이 교수님께서 파트너를 동반하는 것도 허락된다고 하셨거든요. 남녀가 짝을 지어서 노는 가면무도회래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눈이 동그래져서는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케빈! 그런데 같이 가는 건…….”
그건 둘이 굉장히 ‘그런 쪽으로’ 친하다는 은유였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파혼녀로 낙인 찍혀 사교계에서 퇴출된 거나 다름없었지만 케빈은 달랐다.
케빈의 말대로 이제 케빈이 교수가 되면 진짜 귀족 사회에서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귀족들의 불문율 같은 건 고루하고 쓸데없다고 여기는 엘리자베스였지만 그래도 케빈이 자신 때문에 시작부터 불명예를 얻는 것은 싫었다.
“……나는 일단 사교계에서 평판도 좋지 않고…….”
“좋지 않긴 뭘 좋지 않아요?”
케빈이 정말 모른다는 듯이 말했다.
“공녀님이잖아요. 나는 모르는 사교계 예의범절 같은 걸 잔뜩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젠 평민이잖아.”
케빈이 코웃음을 쳤다.
“난 원래부터 평민이었어요.”
“케빈…….”
엘리자베스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케빈을 보자 케빈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눈꼬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같이 안 갈 거라구요, 그래서? 진짜로? 내가 젠체하는 귀족들의 놀림거리가 될 지도 모르는데?”
케빈은 어미 고양이한테 아양을 떠는 새끼 고양이처럼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무릎 사이에 턱을 괴곤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보여주는 불쌍한 눈동자 때문에 제 심장께가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케빈이 놀림거리가 된다구?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틀 후면 너무 얼마 안 남았잖아. 알잖아. 나 한 달 뒤에 있을 박람회 준비를 하고 있어. 거기서 퀴닌으로 만들어낼 건강음료를 잘 선보여서 공장을 흑자 전환시키지 못하면…….”
로열 박람회.
그것은 몇 해 전부터 왕실이 주최하는 레본 산업의 훌륭한 공산품들을 전시하는 잔치였다. 의회 개회 이후 3주 후에 끝나는 이 잔치는 한 해 사교 시즌의 마무리를 알리는 축제로 여겨졌다. 의회 개회 시즌부터 시작된 일련의 지난한 귀족들의 파티는 사업가들이 귀족들에게 자신의 기발한 사업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바로 그 박람회에 퀴닌으로 만들 토닉워터를 소개할 생각이었다.
전생에서 토닉워터는 입소문을 타서 천천히 전국민의 건강음료가 되었지만 레본의 로열 박람회를 이용한다면 단순히 레본 국민 뿐 아니라 전 세계로 뻗어나갈 음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아직은 적자로 허덕이는 제약 공장에 여유를 불어넣어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때, 케빈이 얼른 말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모레 있을 가면무도회에는 가야죠! 거기 가야 우리 고객님들을 많이 만날 거 아니에요? 루이 교수님이 늘 그러시잖아요? 팔리지 않는 과학은 쓰레기로 남을 뿐이다.”
“루이 교수님 욕은 맨날 하면서 어째 교수님 말씀이라면 경전이라도 만들 기세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버럭 화를 냈다.
“제, 제, 제, 제가 언제요! 엘리즈도 참! 이상한 말씀을 하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