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77화
“당신?”
케빈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눈썹을 꿈틀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설마 나?”
“그래. 설마 너 말이야. 너 감히 평민 주제에 어디 우리 아가씨한테 엘리즈, 엘리즈거려? 엉? 우리 아가씨한테 애칭을 부를 수 있는 건…….”
우리 도련님뿐이라고.
토비는 그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토비가 망설이는 사이에 케빈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문틀에 기대어서 말했다.
“이봐.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너네 아가씨랑 같이 수학하는 사람이고, 너는 그냥 아가씨의 마부일 뿐이거든?”
케빈의 말투에 엘리자베스가 얼른 케빈을 나무랐다.
“케빈! 너 말투가 그게 뭐야. 토비는 내 친구나 다름없어.”
“……친구…….”
토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걸 본 케빈의 얼굴이 구겨졌다.
“치, 친구요?”
“응, 친구.”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하자 케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즈 친구는 나밖에 없잖아요! 아카데미 내에서 왕따인 주제에!”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왕따? 너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요. 밥 먹을 때도 나랑 같이 먹고, 도서관도 나랑 같이 가잖아요? 아무도 엘리즈랑 안 놀아주니까요. 그리고 내가 말을 안 했는데 사실 저번에 위층에서 화분 떨어진 거, 그거 위층에 있던 재수 없는 조셉 패거리 소행이라구요. 내가 이번에 부교수만 되면 당장 그 새끼들을 죽여버릴 거예요.”
케빈은 어느새 조셉 패거리에 대한 생각으로 분노한 얼굴로 씩씩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서 눈물까지 어린 눈으로 토비에게서 남은 짐을 빼앗아 들고는 묵묵히 혼자서 짐을 들었다. 그걸 본 토비는 케빈을 노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아, 아가씨, 제가 들면 됩니다. 안까지 모시도록 허락해주세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토비는 쩔쩔 매면서 감자 푸대라도 자기가 들려고 했지만 곧 눈치 없는 케빈이 끼어들었다.
“흥. 가만있어. 내가 들어줄 거니까. 엘리즈 방까지 같이…….”
“싫어! 내가 혼자 들 거야!”
엘리자베스는 들고 있던 커다란 빵 바구니를 해머던지기 선수처럼 휘휘 흔들었다. 케빈은 엘리자베스가 휘두른 빵 바구니에 명치를 맞아서 비명을 지르며 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으억! 아, 아프잖아요, 엘리즈는 진짜…….”
케빈은 분노에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시뻘게진 엘리자베스의 눈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다물었다. 엘리자베스가 소리 질렀다.
“왕따는 혼자 방으로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곤 낑낑거리며 온갖 짐을 가지고 뒷문으로 들어갔다. 그걸 본 케빈이 작은 목소리로 엘리자베스를 불렀지만 그녀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토비는 그런 케빈을 노려보고 있다가 케빈의 왼쪽 발을 세게 밟았다.
“윽! 뭐 하는 짓이야!”
“멍청한 자식! 네가 아무리 시대의 과학자여도 우리 아가씨를 괴롭히는 자는 우리 도련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토비가 그렇게 말하며 쾅쾅 거리며 마부석으로 뛰듯 올라탔다. 그걸 본 케빈이 꽥꽥 소리쳤다.
“이봐! 도련님은 무슨! 엘리즈를 두고 도망간 놈이 무슨 도련님이야! 리오든에 소문이 파다하다고! 멜니아로 붉은 머리 여자랑 같이 야반도주했다고! 과학적 추론 방식에 귀납적인 추론이라는 게 있어! 경험적으로 관찰된 사실을 통해 명제의 참, 거짓을 입증하는 거지! 그러니까 너네 도련님이 그 여자랑 도망간 걸로 보아한데, 너네 도련님은 여자 보는 눈도 더럽게 없고 비겁하고…… 야! 야! 내 말 듣다 말고 가냐! 엉?!”
케빈의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토비는 말을 출발시켰다.
히이잉! 어찌나 토비가 세게 말의 옆구리를 때렸던지 말들이 거세게 우는 소리가 외벽을 타고 복도를 걷던 엘리자베스에게까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복도 한복판에 서 있었다.
‘붉은 머리 여자랑 같이 야반도주했다고!’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생생하게 울리는 것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리오든의 많은 귀족들이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파혼과 갑작스러운 케이의 증발을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설이 바로 케이의 야반도주 설이었다.
그 설은 실제로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그 설의 내용은 이랬다. 로버트 하커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하지도 않는 엘리자베스와 약혼을 강제로 해야 했던 케이는 공작 부부의 반역 사건으로 약혼이 깨지자마자 원래 정부로 두었던 켄터베리 홀의 여가수와 함께 멜니아로 야반도주했다. 프란시스 부인은 케이의 방탕한 행동으로 인해 실추된 자신의 명예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왔고 로버트 하커에게 과한 위자료를 요구하였다. 명예롭고 신사다운 로버트 하커는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전 부인에게 정성을 다하기 위해 로킨트의 저택과 공장 지분을 내주었고 프란시스는 그런 로버트에게 감사한 줄도 모르고 로킨트에서 방탕한 생활을 한다.
엘리자베스는 방탕하다, 라는 말의 의미는 잘 몰랐지만 프란시스가 로킨트의 저택을 자신의 맘대로 꾸며놓고 때때로 헐렁한 차림으로 정원에서 족욕을 즐기는 모습을 목격한 많은 이들이 ‘이혼녀 프란시스가 얼마나 멋대로인지’ 떠드는 것은 자주 보았다.
그런 걸 보면 방탕하다, 라는 말의 의미는 결국 자유롭다, 라는 말일까? 엘리자베스는 비슷한 이유로 케이 역시 방탕하다, 라고 이르는 이들을 자주 보았다.
그들이 케이를 자유로운 사람으로 보았다면 그건 맞았고 도덕적으로 해이하여 홀에서 일하는 여가수 따위를 사랑하는 방종한 사람으로 보았다면 그건 틀렸다.
케이 하커가 사랑한 여자는 엘리자베스가 리오든에서 본 그 누구보다 행동력 있고 용기 있는 여자였으니까.
엘리자베스는 말이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앰버를 떠올렸다.
케이를 떠올릴 때보다 앰버를 떠올릴 때, 엘리자베스는 심장 께가 더 아파왔다.
학회에서 모욕을 당하다시피하고 나왔을 때, 논문을 쓰면서 엘리자베스가 그간 배웠던 수많은 귀족으로서의 지식은 아카데미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카데미 내에서 함께 수학하는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엘리자베스는 자꾸만 스스로를 앰버 플래스와 비교하게 되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고운 흰 피부, 적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여자는 엘리자베스처럼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당할 때 단순히 참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는 세상에 순종하기보다 저항하며 살아왔고 여자와 노동자들을 위해 싸워왔으니까. 그 여자였다면 어깨에 총을 맞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싸웠겠지.
엘리자베스는 며칠 전 위층에서 화분을 던진 것이 다른 신사들의 소행일 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막상 제 눈앞에 떨어진 화분을 보니, 그리고 주변에서 낄낄거리며 지나가는 남학생들을 보니 몸도 마음도 얼어붙은 기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순진한 척, 모르는 척하며 그냥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당장 위층으로 올라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한다고 한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기분이었고, 무엇보다도 안 그래도 기숙사에 여자 화장실을 만드는 건으로 한번 큰 분란을 일으킨 탓에 한 번 더 일을 쳤다가는 교수님들에게 낙인이 찍힐 것 같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상황을 모면하고 나서 내내 머리가 멍하고 했어야 했던 말, 하고 싶었었던 말들이 불쑥불쑥 가슴을 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 나는 왜 이렇게 소심하고, 소심한 주제에 제 소심함을 망각하지 못할까. 혹시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닐까.
“하…….”
엘리자베스는 감자 푸대와 빵바구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한숨을 내쉬며 벽에 붙었다. 그리고 거기에 이마를 두세 번쯤 찧었을 때, 불쑥 누군가의 손등이 엘리자베스의 이마와 벽 사이로 들어왔다. 쿵!
엘리자베스의 머리가 그 손등을 짓이겼다. 케빈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너무 아프잖아요! 이 돌 머리!”
케빈은 허공에서 재빨리 손을 휘휘 털어내며 엘리자베스에게 툴툴거렸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케빈을 보며 뒤로 물러났다.
“뭐야. 언제부터 있었어?”
“엘리즈가 벽에 머리 찧을 때부터요. 왜 머리를 찧어요? 안 그래도 나쁜 머리를…….”
“이봐!”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항의했다. 케빈은 알았다는 듯이 엘리자베스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내가 할 말 있다니까요? 왜 먼저 가버려요.”
케빈은 그렇게 말하곤 엘리자베스가 바닥에 내던져버린 짐들을 들어올렸다. 끙, 하는 신음소리가 분명히 들렸는데 엘리자베스가 말려도 케빈은 이쯤은 가뿐하다며 우겨댔다.
“날 뭐로 보고. 난 남자예요. 엘리즈는 여자고.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신사죠.”
“그런 거 안 해도 신사 대접해줄 거야, 케빈 퍼킨.”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며 케빈의 뒤를 쫓았다. 케빈은 묵묵히 엘리자베스가 머물고 있는 5층 끄트머리에 있는 여자 기숙사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의 방은 몇 가지 사건 이후 남자들과 분리하기 위해 하인들이 주로 머무는 꼭대기 층에 자리하게 되었다. 케빈은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헐떡이곤 5층 복도에 짐을 내려놓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을 한심하게 보며 케빈이 내려놓은 짐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짐은 방 한구석에 몰아넣고 케빈에게 빌렸던 책을 꺼내 들고 나온 엘리자베스가 케빈에게 책을 내밀며 물었다.
“할 말이 뭔데?”
엘리자베스의 말에 계단 층계에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던 케빈이 말했다.
“아, 그게…… 일주일 후면 부교수 심사 결과가 나오잖아요?”
“그렇지. 행운을 빌게, 케빈.”
엘리자베스는 혀를 차며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차가움이 감돌았다.
엘리자베스가 되돌아서 가려고 하자 케빈이 얼른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그런 주제에 막상 잡자마자 놀라서 손을 빼며 얼굴을 붉혔다. 혼자서 그런 짓을 하던 케빈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아, 자, 자, 잠깐만요. 할 말이 좀 있다니까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잠시 그런 케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계단에 앉았다.
“뭔데.”
엘리자베스는 무릎 위에 팔을 놓고 그 팔에 턱을 괴며 말했다. 케빈은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더니 복도를 휘휘 둘러보곤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그…… 약은 좀 듣는 것 같아요? 내가 저번에 새로 만든 거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는 입술을 물었다.
아, 그 약.
케빈이 말하는 약은 엘리자베스의 야성을 잠재우는 약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내부에 살고 있는 몰록을 진정시키는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