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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76화 (7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76화

2장

덜그덕 덜그덕. 길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요란스러운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학술원 벽에 기대어 쪼그려 있던 한 사람이 일어났다.

그 사람은 배까지 올라오는 헐렁한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셔츠 단추를 두세 개쯤 풀어헤치고 있었다. 셔츠 깃에는 작은 스카프가 둘러져 있었는데 그이는 그것을 묶는 것도 귀찮다는 듯 목에 걸고 있는 안경 줄과 엉켜 버린 채로 그냥 두었다.

근처를 지나가던 신사와 숙녀들이 그이를 보며 수군덕거렸다.

“여자가 저런 옷을 입었어요.”

“말세예요, 말세. 요샌 여자 과학자, 여자 지식인들이 판을 친다죠?”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황급하게 들고 있던 담배를 길게 빨아들였다가 벽에 담배를 비벼 끄는 것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괜히 들켰다가 무슨 잔소리를 들으려고.

엘리자베스는 요새 잔소리가 부쩍 늘어난 한 사람을 생각하며 얼른 손에 남았을 잔향도 털어버리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자 익숙한 문양을 달고 있는 마차가 곧 엘리자베스의 앞에 섰다. 마차의 마부석에서 멋진 재킷을 입은 마부가 우아한 몸짓으로 내렸다.

“안에서 기다리시라니까요!”

마부는 멋진 재킷과 톱햇을 차려 입은 것과는 달리 칭얼거리는 말투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톱햇을 벗은 마부의 얼굴에 길게 나 있는 흉터를 보며 소리쳤다.

“토비! 내가 연고 틈틈이 잘 바르랬지? 너 진짜…….”

“아앗, 오늘만 안 바른 거예요. 진짜로요!”

토비는 엘리자베스의 잔소리가 무서운 듯 얼른 얼굴을 톱햇 안으로 감췄다.

3개월이라는 시간은 소년을 청년으로 만들었다. 엘리자베스는 토비가 3개월 만에 옆으로도 위로도 한 뼘은 커진 것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연고를 바르지 않은 것만은 용서할 수 없어, 토비.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토비는 3개월 전 리오든을 떠들썩하게 한 경찰청 테러 사건이 일어난 날 폭도들에게 큰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도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폭도 중 하나가 보복하듯 남긴 얼굴의 흉터는 평생 남을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토비의 얼굴에 흉터가 남는 것을 막기 위해 멋진 모자도 사주고 직접 개발한 연고도 주었지만 덜렁거리는 토비는 연고 바르는 것을 까먹었다. 톱햇만은 맘에 드는 듯 매일 쓰고 다녔지만 말이다.

“토비…….”

엘리자베스가 토비를 노려보자 토비가 헛기침을 하며 얼른 마차 안에서 거대한 꾸러미를 꺼냈다. 토비가 엘리자베스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그것을 엘리자베스에게 떠넘기자 엘리자베스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게 다 뭐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토비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이건 메리 아줌마가 구운 빵이구요. 이건 메리 아줌마가 만든 잼이구요. 이건 집사 아저씨가 아카데미 기숙사가 추울지도 모른다고 챙겨준 옷이구요. 이건…….”

“아, 잠깐, 잠깐!”

엘리자베스는 다급하게 토비의 말을 막았다.

“너 우리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식사가 제공된다는 얘기 안 했니? 그리고 외투? 이제 곧 있으면 여름이야!”

그녀의 말에 토비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저도 분명히 이야기했죠. 하지만 다들 걱정이 심한 걸 어떡해요! 아참! 이것도 까먹을 뻔했네요. 이건 프란시스 마님이 주신 약재예요! 목에 좋대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상에! 토비! 나 약학이랑 의학 전공자야! 실험실에 널린 게 약이라고!”

“그럼 직접 말씀해보세요.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미리엄 씨도 새벽에 장작을 가져다주면서 아가씨 드시라고 감자 몇 알을 가져왔어요.”

토비는 잊어버릴 뻔했다는 얼굴로 마차 좌석 아래에 있는 짐칸에서 감자 푸대를 꺼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토비가 쿵, 소리가 나게 엘리자베스의 발 아래 내려놓은 감자 푸대는 결코 몇 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미리엄이 끌고 왔단 말이야?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엘리자베스는 머리가 아픈 듯이 이마를 짚으며 외쳤다.

미리엄은 엘리자베스와 케빈이 고른 최초의 임상 실험 환자였다. 엘리자베스는 머뭇거렸지만 케빈은 미리엄이 강력하게 원하지 않느냐며 미리엄이 최초의 임상 실험 환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미리엄의 아내 역시 엘리자베스에 관한 소식을 듣자마자 다음날 바로 수레를 빌려 타고 리오든으로 돌아왔다. 미리엄의 아내, 셜리는 주근깨가 가득난 얼굴로 울먹거리며 엘리자베스의 앞에 무릎까지 꿇었다.

엘리자베스는 셜리와 미리엄에게 몇 번이나 임상 실험의 위험성을 설명했다. 단호한 셜리와 미리엄 앞에서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초조하고 두려워졌다.

엘리자베스가 외우고 있던 퀴닌 인공 합성식이 약간이나마 다른 지점이 있으면 어떡하나.

엘리자베스는 셜리와 미리엄에게 다섯 번, 여섯 번씩 동의의 말을 듣고도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런 엘리자베스에게 용기를 준 것은 루이 니콜라스 교수였다.

‘모든 사람의 목숨을 책임지겠다고 생각할 거였다면 의학이나 약학은 전공하지 말고 신학을 전공했어야지. 인간의 생사는 오로지 신만이 결정할 수 있는 걸세. 환자의 동의를 구했고 자네가 최선을 다해 합성에 성공했다면 이제 남은 건 신의 몫이야. 그 이상을 하려고 들지 마.’

루이는 엘리자베스가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기가 무섭게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제자 다루듯이 했다.

엘리자베스는 엘과는 다른 방식으로 수제자의 마음을 콕콕 찔러대는 루이 니콜라스의 독설을 들으며, 왜 케빈이 루이라면 치를 떨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케빈이 끝까지 루이 밑에서 수학을 했었는지 깨달았다.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말대로 일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결정하고 미리엄에게 퀴닌을 처방했다.

학질 원충의 활동 주기는 24~72시간. 약 복용 시기 역시 그 시기에 맞추고 함량과 최대 복용 기간을 정했다. 원래대로 케빈이 미래에서 혼자 퀴닌 합성식을 개발했을 때는 임상에서 몇 차례 실패가 있었다.

약학에서는 약의 제조뿐 아니라 함량과 복용 시기를 지시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퀴닌을 개발한 이후 많은 의료진들이 다양한 시도를 통해 밝혀낼 수 있었던 약의 복용 시기와 함량을 정확하게 지켜 임상 실험에 임했다.

그리고 15일 동안 매일 같이 기도했다. 미리엄에게서 발열이 심하게 나는 날에는 온몸의 근육이 긴장을 한 나머지 로킨트 저택에 돌아온 후에도 몸을 부들부들 떨기도 했고, 셜리와 함께 밤새도록 울다가 다음 날 눈이 퉁퉁 붓기도 했다. 정말이지 끔찍하고, 또 간사하게도 다행스러운 나날이었다.

케이가 떠난 지 한 달.

미리엄 덕분에, 케빈 덕분에, 퀴닌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그 한 달 동안 케이를 생각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매일 아침 로킨트 저택의 3층 창문으로 로킨트 스트리트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오늘도 케이 하커의 꿈을 꾸지 않았다고. 어쩌면 케이는 영원히 자신의 꿈에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케이를 보지 않다보면 이제는 더 이상 케이를 생각해도 가슴 아플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엘리자베스는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다가 문득 3층 창 아래로 습관적으로 로킨트 스트리트의 끄트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남편의 퇴근을 기다리던 그 시절처럼.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로킨트 스트리트 끄트머리를 노려보는 자신을 느낄때면 스스로가 경멸스러워지곤 했다.

케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케이는 공장으로 출근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약혼자도 아니니까.

그런데 왜, 대체 왜 그 녀석을 기다린단 말인가.

엘리자베스가 하염없는 우울의 늪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그때쯤 메리나 콜린이 엘리자베스를 부르러 문을 두드리곤 했다. 그리고 그런 날들이 보름이나 지나고 나서 임상 실험 결과가 나타났다.

다행스럽게도 퀴닌의 임상 실험은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미리엄은 최대 복용기간을 일주일 정도 넘긴 시점부터 확연하게 증상이 사라졌고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케빈과 함께 논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셜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또 한 번 무릎을 꿇고 울었다. 엘리자베스는 셜리를 껴안고 울고 울다가 웃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진짜 고행의 시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논문을 써본 적이 없었고 논문을 읽어본 적도 거의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케빈은 논문을 읽어본 적도 써본 적도 없는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매일 오전에는 루이 니콜라스 교수의 조교 노릇을, 매일 오후에는 제약 공장에 출근을, 그리고 매일 밤부터 새벽까지는 엘리자베스 논문의 지도자 노릇을 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표예요! 숫자들이 일관성이 없잖아요! 통계 몰라요? 통계!’

케빈은 결코 다정한 선생님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처음에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소리를 빽빽 지르면서 울었다.

‘나도 모르니까 그렇지! 나도 잘 하고 싶단 말이야! 난 너처럼 왕립학술원에서 공부한 적도 없는 모지리라 그래! 어쩔래!’

케빈은 엘리자베스가 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엘리자베스를 달랬다.

‘아니…… 내가 언제 모지리라고 했어요? 참, 말을 이상하게 하시네…….’

정말이지 끔찍한 한 달이었다. 임상 결과를 가지고 논문을 쓰고 그걸 왕립학술원에 있는 거대한 학회실에서 발표하게 되기까지 말이다.

논문을 완성한 날,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퀴닌 인공 합성 논문의 제1 저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케빈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하며 자신은 제2 저자의 하나면 된다고 했다.

‘난 인공 합성식 같은 건 전혀 몰랐다구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제 1저자예요.’

어떻게긴.

케빈은 미래에서 원래 퀴닌을 개발한 최초의 화학자였다. 그런데 시간 여행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엘리자베스가 케빈의 자리를 빼앗은 것 같아 엘리자베스는 스스로가 도둑처럼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에게는 제1 저자로 자신을 등록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최종 제출과 임상 실험 결과 발표일에는 일일이 케빈 퍼킨,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루이 니콜라스, 그리고 엘우드 밀을 알파벳순으로 나열해 공동저자로 수정했다. 덕분에 학회 내내 케빈은 뒷목을 잡았고 루이 니콜라스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학회는 뭐랄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단정한 신사복을 입은 엘리자베스를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엘리자베스가 발표를 이어가는 중간 중간 실소를 터트렸다.

그들은 무례하게도 발표 중간에 아주 기초적인 화학을 가지고 엘리자베스를 비판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똑 부러지게 대답했지만 엘리자베스의 대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학회가 끝났을 즈음엔 엘리자베스는 온몸에 힘이 풀려서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학회 중간 중간 곤혹을 당하는 자신을 찍어간 신문 기자들이 얼마나 끔찍한 소리를 신문에 실을지 두려웠다. 하지만 다음 날 신문에 실린 것은 오히려 엘리자베스의 성공적인 발표를 찬양하며 새로운 여성 과학자를 배출하고 해상 무역을 선도하게 될 레본의 밝은 전망을 분석한 기사들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국왕의 장기 말이 된 것 같아 불쾌했지만 그 덕분에 제약 공장에 투자하겠다는 연락이 빗발쳤다. 초기 투자금이 늘어나서 안 그래도 낮은 수율 때문에 대량 생산의 마진율을 어느 정도로 정해야 할지 고민했던 엘리자베스와 케빈은 생각보다 더 저렴하게 빈민들에게 치료제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엘리자베스와 케빈이 만들고 프란시스 명의의 공장에서 정제로 찍혀 나올 퀴닌 덕에 수많은 학질 환자들이 목숨을 구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국왕의 장난감이 된 보람이 있다고 느꼈다. 이제 제 2의 미리엄, 제 3의 미리엄들이 다 그들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가정에 평화가 깃들 테니까…….

“미리엄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미리엄은 도리어 아가씨를 걱정해요. 미리엄뿐 아니라 다들…….”

토비가 말을 이어가려고 할 때였다.

아카데미 뒷문으로 누군가가 쑥 얼굴을 내밀었다. 토비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내민 케빈을 보고 움찔 눌렀다.

“왜, 왜, 왜……!”

엘리자베스가 더듬거리며 묻자 케빈이 토비와 엘리자베스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일주일 전 있었던 루이와의 학회 준비 탓에 눈 밑에 새까만 그늘이 생긴 케빈이 웬일인지 엘리자베스에게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고 말했다.

“왜긴요. 빌려줬던 책도 좀 받고…… 또…….”

케빈은 어울리지 않게 몸을 배배 꼬며 망설였다.

토비만큼이나 훌쩍 커버린 케빈은 원래도 토비보다 컸던 만큼 지금도 토비보다 반 뼘 정도는 큰 편이었다.

토비가 아무리 청년의 모습을 갖췄다고는 한들 아직 앳됨이 남아 있는 얼굴에, 생활근육과 키가 붙은 것이다.

하지만 케빈은 조금 달랐다. 케빈은 원래부터도 근육이 없고 마른 뼈대를 가지고 있었긴 해도 키가 크고 골격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약간 살이 붙고 얼굴에 성숙함이 감돌자 지나가는 여자들이 흘끔흘끔 바라볼 정도의 미청년의 느낌이 확실히 생겨났다.

엘리자베스는 아카데미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주는 하녀들이 케빈을 보고 ‘퇴폐미가 있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다. 케빈은 별로 그런 말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엘리자베스는 피곤한 눈의 케빈이 유독 붉은 입술로 창백하게 질려서는 꾸벅꾸벅 졸 때면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하기도 했다.

물론 잠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엘리자베스를 구박하는 떽떽거리는 잔소리쟁이로 변했지만. 요새 어찌나 케빈의 면박 주는 솜씨가 늘었던지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말만 걸면 심장이 다 떨렸다. 케빈이 일주일 전 부교수 자리 심사를 넣었다는 것을 들었는데 어쩌면 면박 주는 솜씨도 교수가 되는 데에 크게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말에 더듬거리며 물었다.

“나한테? 나, 나, 나,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는데?”

“그게…… 엘리즈랑 단둘이 하고 싶은 얘긴데요…….”

케빈의 말에 토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 방금 우리 아가씨를 뭐라고 부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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