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74화
케이가 중얼거렸다.
“내가 살아 돌아와도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에드워드가 억지로 피우는 담배를 바다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담배 피우지 마. 억지로 배울 필요 없어.”
케이의 말에 에드워드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저, 저도 담배 가끔 피운다구요!”
“앰버 앞에서나 그러겠지.”
“네? 그, 그, 그건…….”
에드워드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전 두 분이 자, 잘 되길 바랐어요.”
에드워드의 말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두 분?
“설마 나랑 앰버 말이야? 방금은 엘리…… 다른 사람 얘기를 해놓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말하려다가 이를 악물었다. 멍청하긴.
“그야 윌슨 영감이 케이는 약혼녀를 두고 한 눈 팔 사람이 아니라고 했으니까요. 상어 밥이 되러 자청해서 가는 것도 약혼녀 때문이잖아요. 클레몬트 공작가가 제 발로 위험 속으로 걸어들어 갔으니까.”
에드워드는 아무도 없는 갑판 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케이는 철제 난간에 위태롭게 기대어 서서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이제 그런 얘기는 잊는 게 좋아. 클레몬트 공작 부부는 오래 가지 못해. 이미 국왕을 한 번 협박했으니까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로킨트 저택으로 도망 나오고 난 뒤, 클레몬트 공작 부부는 제철 공장을 가지고 로버트를 압박했다. 로버트를 압박해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업에서의 지분율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는 그런 것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로버트에게서 반응이 없자 클레몬트 공작 부부는 도를 넘었다. 국왕을 협박한 것이다.
케이는 국왕의 공허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국왕은 그 스스로가 곧 국가이자 권력인 사람이었다. 탐욕스러운 레본을 상징하는 인간.
현재의 국왕은 태어난 순간부터 왕이 되기로 결정된 인간이었고 컬로든 궁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이였다. 제 아무리 사촌이라고 해도 스스로를 국가 그 자체라고 여기는 인간이 클레몬트 공작의 반항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케이가 퀴닌과 해상무역의 일로 찾아갔을 때부터 국왕은 클레몬트 공작가를 쳐낼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케이는 위험을 직감했고 무너져가는 공작가라는 배를 버리고 엘리자베스를 탈출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어제라니.
케이는 시곗줄에 매달린 회중시계를 열어보았다. 자정을 넘긴 시각. 이제 벌써 어제의 오늘은 오늘의 어제가 되어버렸다.
시간은 이토록 잘만 가는데 케이의 시간은 여전히 어제에 머물러 있는 기분이 들었다.
케이는 섬뜩한 얼굴로 케이의 목에 가녀린 손가락을 가져다대던 엘리자베스를 떠올렸다. 제 입술 사이를 파고들던 뜨거운 살덩이도.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그 여자는 더 이상 내 약혼녀가 아니야. 에드워드.”
에드워드는 케이의 붉어진 귀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
“그야 그렇죠. 이제 앰버 플래스 양이 케이의 약혼녀잖아요.”
케이는 에드워드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며 에드워드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끔찍한 일이지. 저런 여자랑 약혼이라니. 내 인생의 오점이 될 거야.”
케이는 피식거리며 농을 했다.
“그러니…… 재빨리 파혼하러 돌아올게.”
케이의 말에 에드워드가 케이를 보았다. 케이가 에드워드의 눈가가 다시 촉촉해지는 것을 보며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에드워드의 머리를 재빨리 헝클이고 말했다.
“상어 밥 안 되고 돌아온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해!”
에드워드는 케이의 말에 결국 울먹거리며 참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케이! 진짜 꼭 돌아와야 해요!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 붙은 채로 돌아오란 말이에요! 흐흑…… 흑…… 상어 밥 된 케이는 싫다구요…… 싫어…… 흑…… 해적을 만나거나 이국 놈들의 습격을 받으면 재빨리 숨어요! 괜히 허세 떨다가 화살 맞지 말구…… 흐흑…….”
케이는 제게 붙으려고 드는 에드워드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말했다.
“닥쳐. 에드워드.”
케이의 말에 에드워드가 훌쩍거리며 자꾸만 더 케이에게 칭얼거렸다. 케이는 에드워드의 가슴팍을 세게 때리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품 안에서 담배를 찾아 꺼냈다.
케이는 담배를 물고 불을 찾다가 담배를 입에서 뗐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케이는 로킨트 스트리트의 허름한 가게 차양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던 작은 어깨를 떠올렸다.
제기랄.
엘리자베스.
케이는 또다시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고 혼자 분노했다. 미치광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 케이의 주변에는 온통 엘리자베스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뿐이었다.
케이는 일그러진 얼굴로 담배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 * *
엘리자베스는 반쯤 무너져 내린 경찰청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하일 강 다리 아래쪽에 자리를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커다란 돌 위에 앉아서 부랑자들과 다를 바 없는 재투성이의 얼굴로 외쳤다.
“다음요! 다음!”
엘리자베스가 외치자 잭과 스윈든이 데리고 온 화상 환자들 중 하나가 엘리자베스 앞으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능숙하게 천을 잘라주는 케빈의 손에서 천을 받아들고 중증 화상 자국을 살폈다.
얼룩덜룩 여기저기 다친 곳이 많아보였음에도 중증 화상 자국만 살펴야 했다. 나중에 물집을 잘못 터트렸다가 세균 감염을 일으켜 목숨에 위협이 될 정도로 심한 화상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초조한 얼굴로 환자의 화상 자국을 깨끗한 물로 씻어내며 옆을 힐끔거렸다. 어디선가 가져온 술로 화상 부위를 씻어내려는 환자들이 보였다.
“안 돼요! 술은 불순물이 섞여서 안 된다구요! 내 말을 듣지 않을 거면 내게 치료받을 생각도 하지 말고 썩 꺼져요!”
엘리자베스는 제 목구멍에서 흘러나온 노기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조금 놀랐다. 내 성격이 이렇게 더러웠나?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조금씩 엘 선생처럼 변해간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불쾌함에 젖어 있을 시간도 없었다. 곧 있으면 동이 틀 거고 지금은 경찰청에 있는 중요한 자료를 빼내느라 정신없는 보비들도 하일 강 아래쪽에 모여 있는 범죄자들을 발견하게 될 거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치료를 마친 환자에게 말했다.
“물을 많이 마시고 돈을 버는 족족 피부 발진에 좋은 연고나 소염 작용을 하는 물약을 사먹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환자의 얼굴이 굳었다.
“전 지금 도망칠 거예요.”
“그래도 그렇게 해요. 도망쳐서 길거리에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에요.”
엘리자베스는 폭언을 쏟아내며 소리쳤다.
“다음!”
그때 엘리자베스에게 잭이 걸어왔다.
“이쯤 해야 될 것 같아요, 공녀님. 상처가 심각한 사람들은 다들 치료를 마치고 도망갔고 이제 조금 있으면 동이 트니까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보았다. 케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가 그걸 보곤 가죽으로 돌돌 말아둔 수술용 도구를 다시 싸 넣기 시작했다.
경찰청에 머물렀다던 의사가 쓰던 도구들이었다. 엘리자베스가 훔쳐서 속바지 안에 잘 고정시켜 넣어둔 것들이었다.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가죽 속에서 수술용 절개도구 하나가 떨어졌다. 혹시 몰라 다 펼쳐놓긴 했지만 쓸 일이 없었던 도구였다.
“제기랄!”
엘리자베스는 욕지거리를 하며 절개도구를 집어들었다.
엘리자베스의 거칠어진 말에 잭과 스윈든이 조금 놀란 눈을 했고, 케빈은 알 만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어깨가 굳었다. 엘리자베스는 절개 도구를 집어들고 그 아래에 있는 작은 표식을 보았다.
E.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낯설지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절개 도구를 웬 놈들이 자꾸 부엌 가위랑 헷갈리지 않냐! 그래서 천으로 둘둘 감아놓은 손잡이 부분에 내 이니셜을 써 놨다. 내 걸 건드리면 죽인다고도 쓰고 싶었는데 그것까지 쓸래니까 팔이 아파서.’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예전에 보았던 글자보다 훨씬 더 또렷한 E라는 글자를 보았다. E는 엘우드의 E였다.
엘리자베스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잭과 스윈든을 보았을 때였다. 잭이 얼굴을 찌푸리고 하일강 다른 쪽 둑을 가리켰다.
“저거 악어 아니야? 얼른 챙겨서 나가자고. 요새 악어들은 인간 맛을 봐서 쉽게 인간을 공격한다고. 악어한테 공격당해서 떠오른 시체가 한두 구가 아니라잖아. 몸 여기저기가 뜯긴 시체들 말이야. 저 자식, 아무래도 우릴 노리는 것 같아. 아직은 우리 숫자가 많으니까 지켜보고 있는 거지. 영리한 놈들.”
잭의 말에 스윈든이 새파래진 얼굴로 다리 아래에서 꾸물거리는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스윈든은 욕을 하고 뺨을 때리며 그들을 재촉했다.
“잭…… 잭…… 이봐요…… 잭!”
엘리자베스는 잭을 조용히 부르다가 못 참겠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잭이 그제야 악어로 추정되는 검은 실루엣으로부터 시선을 옮겨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네, 공녀님!”
잭이 후다닥 엘리자베스에게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손으로 절개도구를 들고 물었다.
“내가 있던 방에 머물렀다는 의사 말이에요. 그 의사 이름이 뭐예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잭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의사요? 그 사람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요? 자기 이름 말하는 걸 꺼려했어요. 근데 다들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렀어요.”
“생긴 건요? 이상한 가면 같은 걸 쓰고 다니진 않던가요?”
“가면요? 아뇨. 그냥 잘 생긴…… 여기 여자들이 하는 말로는 엘프 같이 생긴 선생이었는데요?”
잭은 ‘엘프’라는 말이 탐탁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프.
엘리자베스는 새하얀 피부에 은발에 가까운 금발을 가졌던 엘우드를 떠올리며 말했다.
“초록색 눈을 하구요?”
“네, 맞아요. 초록색 눈이요. 엉? 그걸 어떻게…….”
“어디로, 어디로 갔어요. 그 사람. 경찰청을 언제 떠났어요? 왜 떠났어요!”
엘리자베스는 울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잭이 놀란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말을 더듬었다.
“여, 열흘 쯤 전인가? 서, 석방됐어요. 가판에서 의료 행위를 하다가 적발됐는데 신분증이 없어서 걸렸죠. 돈 몇 푼 줬으면 끝날 일이었는데 보비한테 대들다가 괜히 잡혀온 거였죠. 어,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잭이 손바닥을 내밀어 제 무고함이라도 증명하듯 손을 휘저을 때였다. 뒤에 있던 화상 환자가 불쑥 말을 했다.
“그 사람, 죽었어.”
엘리자베스와 잭, 그리고 케빈이 동시에 그 환자를 보았다. 잭이 얼굴 전체에 화상을 입고 눈만 보이게 해놓은 환자를 보며 물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넌 그 선생 알지도 못하잖아. 이틀 전에 들어온 주제에.”
“내가 3일쯤 전에 보비들한테 쫓기다가 봤어. 솔치노 스트리트 근처 강둑에서 남자 하나가 튀어나오는 걸. 손가락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남자였는데…….”
엘리자베스는 환자의 말에 뒷골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