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73화
케이는 앰버가 ‘우리’라고 말하는 순간 기분이 더러워졌다. 앰버에게는 이제 다른 수많은 노동자들이 ‘우리’였지만 케이에게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그 여자는 절대로 케이와 ‘우리’가 될 수 없을 것이었다.
케이는 이제 영원히 혼자였다. 케이는 그것을 엘리자베스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케이의 잘못이었다.
케이가 앰버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자 앰버는 다시는 그런 제안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마치 케이에게 자신이 제안을 했던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다는 듯이 굴었다.
앰버의 행동 탓에 케이는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더더욱 절실하게 깨달았고 그럴수록 점점 더 엘리자베스가 증오스러웠다. 아니,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그 금발 왕족 여자를 주제넘게 가지고 싶어 하고 있는 자신이. 그걸 가질 돈도 힘도 자신도 없으면서 그걸 훔쳐서라도 가지려는 자신이.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가지지도 못한 것을 이미 가진 듯이 구는 자신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
케이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던 소년들과 자신이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케이는 자신 안에 죽일 수 없는 소년을 미워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앰버를 돕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희망을 한 번 알아버린 사람이 희망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것을 케이는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케이는 앰버를 모르는 척함과 동시에 앰버를 도왔다. 엘리자베스가 빌어먹을 엘우드라는 자식 때문에 이오페아에 남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땐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이오페아는 이제 엘리자베스가 평생 머무를 땅이었다. 그녀의 미래가 이오페아와 함께 할 터였다.
케이는 이오페아가 이대로 무너져가는 것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케이는 앰버를 모르는 척할 수 없었고 앰버가 실패하게 둘 수 없었다.
앰버의 실패는 역사가 될 것이고 그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회를 앗아갈 것이다. 소년들이 죽자, 앰버가 그 뒤를 이었듯이 앰버가 죽으면, 그 다음 차례를 이을 사람이 생길 것이다. 그게 엘리자베스가 될 수도 있고, 엘리자베스의 딸이 될 수도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딸이라니.
케이는 상상만으로도 지독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조그맣고 동글동글한 녀석이 얼마나 귀여울 것인가. 너무나 귀여워서 죽고 싶겠지. 프란시스가 케이를 보고 그랬듯이.
케이는 집안에서 마주칠 때마다 음울한 표정으로 케이를 내려다보던 프란시스의 공허한 눈빛을 떠올렸다.
프란시스는 켄드릭처럼 케이를 때리지도 않았고 로버트처럼 케이에게 폭언을 퍼붓지도 않았다.
그저 때때로 그녀 스스로를 죽였다.
케이가 나이가 들고 점점 인간의 모습을 갖춰갈수록 프란시스의 손목에 난 자상도 숫자를 더해갔다. 마치 네가 살아 숨 쉬는 게 견디기 힘들다는 듯이.
프란시스는 케이와 눈만 마주쳐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케이는 켄드릭보다, 로버트보다 프란시스의 그 표정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프란시스와 마주칠 때마다 순수하게 제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케이는 처음에는 프란시스를 무서워했고 나중에는 프란시스를 미워했다. 그리고 이제야 프란시스를 이해하게 되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딸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 그 딸이 엘리자베스를 외모적으로 쏙 빼닮았다면 케이는 당장 샹들리에에 목을 매달아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케이는 죽은 목숨이었다.
엘리자베스가 행복해질수록 케이는 불행해질 테니까. 불행하다 못해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 그런데도 엘리자베스의 행복을 빌어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케이는 더 나은 죽음을, 그나마 덜 끔찍한 죽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앰버에게 무언가를 ‘제안’했다.
“엘리자베스가 퀴닌의 인공 합성에 성공했어. 엘리자베스는 그 약재가 돈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난 좀 다르게 생각해. 퀴닌을 단순히 약으로 볼 게 아니라 사업으로 본다면 얘기가 달라지니까. 퀴닌은 레본뿐 아니라 이오페아 전체의 해상무역을 다시 부흥시킬 거야, 앰버 플래스.”
앰버는 독한 물담배를 피우며 다리를 꼬았다.
“그거 잘 됐군, 케이 하커. 너한테는 잘 된 일이야. 너는 돈을 좋아하니까.”
앰버는 조금 취해 있었고 그녀답지 않게 케이에게 꼬인 심사를 드러냈다.
케이는 앰버의 날선 말 한두 마디로 상처 입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앰버의 분노를 받아줄 시간이 부족했으므로 케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돈만큼 세상을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해?”
앰버는 케이의 말에 피우던 물담배를 내려놓고 눈썹을 꿈틀했다.
“세상을 바꿔? 네가?”
앰버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널 봐. 넌 그 왕족한테 미쳐 있어. 넌 그 여자를 망명시키려고 그간 잘 숨겨오던 멜니아와의 무역 거래도 로버트 하커한테 들켜버렸잖아. 덕분에 나도 곤란했어. 테시톤은 내가 소개시켜준 사람이잖아. 물론 넌 위기를 잘 넘기겠지. 넌 언제나 그랬으니까.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네가 위기에 빠졌던 건 언제나 그 여자 때문이었어. 언제나.”
앰버의 말에 케이가 앰버를 노려보았다.
“로버트 하커에게 들킨 게 차라리 잘 된 일이라면?”
앰버는 케이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너 주식회사가 뭔지 알지?”
“알지. 한때 이오페아 여기저기서 무역 주식회사를 만들었잖아. 이 사람 저 사람 돈 받아서 사업을 나눠먹는 거잖아.”
앰버는 그렇게 말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졌다.
“그 무역 주식회사를 다시 만들 거야. 내 이름으로. 퀴닌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고 국왕에게 국왕의 군대를 허락받아서 군인과 일반 선원으로 이루어진 업자들을 꾸릴 거야. 돈은 주식 형태로 귀족들에게 받고.”
앰버는 케이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 좋네. 귀족들 배부르겠어. 안 그래도 터지려는 배가 이 김에 찢어지면 좋겠군.”
앰버는 귀족과 왕의 배만 불리는 사업 계획을 듣고 고개를 내저었다. 케이는 앰버의 꼬인 말투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국과 무역을 하려면 군도로 가기 전에 중개 무역을 할 항구가 새로 필요해. 멜니아가 부족들끼리 오합지졸로 모인 땅이었을 때야 레본 같은 국가가 항구를 점거하고 총질하면 끝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멜니아 중앙 정부의 협조를 얻어야겠지.”
“내가 언제까지 이런 얘기를…….”
“무역 활로만 확실하다면 레본의 공장들은 무역회사에 물건을 대지 못해 안달일 거야. 알다시피 레본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대로 커져버렸고 내수 경제만으로는 감당이 안 돼. 그래서…….”
케이가 그쯤에서 잠시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밖은 어두웠고, 케이는 새근새근 자고 있을 엘리자베스를 떠올렸다.
지독한 거짓말쟁이. 너만큼 나를 불행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엘리자베스.
케이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국왕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거고.”
케이의 말에 앰버가 이마를 짚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앰버의 눈동자가 닫힌 방문으로 향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앰버는 듣는 이가 없는지 확인하고 싶은 듯 방문으로 향했다.
앰버는 열쇠구멍으로 제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옆으로 서 문을 세게 쳤다.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앰버는 잠시 그대로 서서 케이를 노려보았다.
“전쟁이라고?”
“그래. 귀족이고 국왕이고 해상무역이 멈춘 이후로 내내 적자에 허덕이고 있어. 증기기관이 남긴 피해가 천문학적인 액수라고.”
케이의 말에 앰버가 입술을 물었다.
“나는 그런 건 몰라. 관심 없어. 나는 이미 ‘우리’ 문제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파.”
‘우리’라는 말에 케이가 앰버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이게 ‘우리’ 문제야. 이제부터 그렇게 될 거야. 돈이 궁한 귀족들과 국왕이 전쟁보다 확실한 사업처에 눈이 뜨면 거기에 돈을 투자할 거고 그 사업에 멜니아가 뛰어들기 시작하면 레본도 멜니아 눈치를 보게 될 테니까.”
“멜니아가 원하는 게 뭔데?”
앰버는 팔짱을 꼈다. 케이는 앰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은 더럽게 안 듣는 주제에 힘만 센 깡패 같은 왕정을 깨부수는 것. 그리하여 레본에 민주주의를 수입하는 것. 멜니아는 레본 왕정의 간섭 없이 레본의 공장들과 거래하고 싶어 하니까.”
앰버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앰버가 입술을 물고 쏟아지는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겨우 그딴 걸로 세상은 변하지 않아.”
케이는 앰버의 말투가 몇 년 전의 자신의 말투를 닮은 것 같아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지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더욱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케이가 말했다.
* * *
케이와 앰버, 에드워드, 그리고 테시톤은 잔뜩 취해서 포커를 쳤다. 케이가 대부분의 돈을 땄다.
케이가 자꾸만 이기자 에드워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운이 좋으려나 봐요?”
에드워드의 말에 케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반대일지도 모르지. 여기서 운을 다 써버려서 이제는 남은 운이 없을지도.”
케이의 말에 에드워드가 어두워진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소리 할 거면 내 돈 내놔요! 짜증나게, 진짜!”
에드워드는 앰버와 테시톤이 놀랄 정도로 분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앰버는 놀라서 에드워드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에드워드는 앰버의 만류보다 빨리 일어나 선실 밖으로 나갔다. 앰버는 비릿하게 웃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빨리 나가 봐. 빨리.”
“…….”
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워드를 따라 나갔다. 그러자 평소에는 피우지 않는 담배를 들고 켈록거리는 에드워드가 보였다.
케이가 에드워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봐.”
케이의 말에 에드워드가 빨개진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 꼭 가야겠어요?”
“날 아껴주는 건 좋지만 너무 엉기지는 마. 나 이제 임자가 있는 몸이야.”
에드워드는 케이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구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이요?”
케이는 당연히 앰버를 놓고 농담을 한 것이었기에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하자 얼굴을 굳혔다.
“그 이름 이제 내 앞에서 이야기하지 마.”
“내일이면 헤어질 건데 어떻게 이야기를 해요. 서부 땅을 밟자마자 앰버를 테시톤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군도로 떠날 거라면서요. 군도로 가면 상어 밥되는 건 시간문제랬어요.”
상어 밥이라니.
케이는 에드워드의 표현에 피식거리다가 한순간 검은 파도에 의식이 삼켜진 얼굴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