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72화
퀴닌의 합성 성공 소식이 신문에 알려지기 전날 밤, 케이는 앰버를 찾아갔다. 며칠 전 엘리자베스를 켈토로 망명시키기 위해 앰버에게 배편을 부탁해놓은 차였다. 케이는 앰버에게 치를 돈이 있었고 앰버가 그 돈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앰버는 곧 있을 의회에서 테러를 모의하고 있었다. 케이는 이때까지 앰버의 계획을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했고, 모르는 척하면서도 도와주려고 했다. 케이가 앰버의 계획을 모르는 척하려고 했던 이유는 케이가 이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리오든은.
이 빌어먹을 땅덩어리는 앰버와 같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기어오르는 것을 지켜보지 않았다.
몇 년 전, 신흥 사업가들이 최초로 의회에 저들의 자리를 얻었을 때 케이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많은 노동자들이 흥분했다.
그들은 공장장에게 착취당하고 작은 아파트에 방을 칸칸이 나눠 쓰면서도 신흥 사업가라는 평민들이 의회에 자리를 얻음으로써 자신들도 그들의 권력을 한 조각이라도 나눠 가진 듯 행세했다.
노동자들은 세상이 변해가고 있다고 평민원이 바로 그 증거라고 외쳤다. 수많은 야학이 열렸고 케이에게 글을 가르쳐달라고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다.
케이도 배움이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케이는 켄드릭을 가르치기 위해 하커 저택에 들락날락거리는 켄드릭의 가정교사에게 알파벳 정도는 뗐다. 거기에 가끔 켄드릭이 마구간에 찾아와 몰래 몰래 제 숙제를 케이에게 떠넘긴 덕에 케이는 자연스럽게 문자를 익혔다.
케이는 노동자들에게 글자를 가르쳐주었고 야학이라고 하기엔 소박한 그 모임에서 글을 배운 노동자들은 서로서로 책을 돌려 읽었다.
케이는 아직도 그들이 돌려 읽던 책 표지를 잊지 못했다. 같은 생산 라인에서 서로 돌려 읽는 책을 전달하고 또 전달하다가 케이의 손에도 그 책이 넘어온 일이 있었다. 싼 종이를 이용한 표지는 손때를 타서 더러워지고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표지에는 위장을 위한 제목인 <남녀 간의 성교 스킬 50가지>라고 쓰여 있었다. 누군가가 어설프게 그려놓은 남녀의 뒤엉킨 나체 그림도 있었다. 케이는 그 그림을 그린 남자의 이름도 기억했다.
그 남자는, 아니, 그 소년은 그때 겨우 16살이었다. 케이는 그 혈기왕성한 사내놈들이 얼마나 저질스러웠는지 기억했다. 지어낸 것이 뻔한 첫 경험 이야기를 돌려 하고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든 구절구절 기억해 머릿속에 담아서 집에서 성기를 만지작거리던. 멍청하고 또…….
한참 어리던 것들.
케이는 자신도 어렸으면서 그들을 자신보다 한참은 더 어리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케이가 나이를 먹고 또 먹어도 그들은 늙지 않기 때문이리라.
케이가 소년에서 청년이 되고 종래에는 노인이 되어도 그들은 내내 야한 말에 킬킬거리는 소년들이리라.
케이는 아직도 그때 그 표지를 열어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남녀 간의 성교 스킬 50가지>.
케이가 표지를 열어보지 않고 옆에 있던 소년에게 넘기자 그가 케이의 팔뚝을 툭 치면서 말했다.
“케이. 너는 남녀 간의 성교에 대해 관심 없나? 응? 왜? 여자한테 관심이 없어?”
그때 케이는 십대 후반이었고 십대 후반의 멍청한 소년들이 그렇듯이 케이는 자신이 늙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세상 모든 일이 따분했다. 거대한 천들을 옮기느라고 온몸이 땀에 절어 퇴근 하는 것도, 넣었다 빼면 손 피부가 다 헐어버리는 인공 염료들 속에서 천을 빠는 것도, 집에 들어가면 켄드릭의 발길질에 걷어차이는 것도—
그냥 모두 지루해.
특히 여자들이란 더더욱 지루한 존재였다. 여자들은 더러운 유제가 묻어 얼룩덜룩한 케이의 얼굴을 보면 저들끼리 속닥거리고 괜히 케이 옆에 와서 치근덕거렸다.
“너 몇 살이니? ……겨우 그 정도 밖에 안 돼? 거짓말. 엄청 늙어 보여, 너.”
그런 말을 하며 케이의 허벅지를 은근히 만지는 여자들의 눈에는 심술궂은 눈빛이 감돌았다.
“애기네, 애기. 다 큰 애기.”
케이를 놀리는 것이었다.
고된 노동에, 피부는 얼룩덜룩하고, 코는 삐뚤어진 케이가 못생겨서 괜히 희롱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케이는 그렇게 여겼다.
그 당시의 케이는 앰버를 제외한 모든 여자들을 싫어했다.
앰버는……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앰버는 그냥 편했고 별로 여자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앰버는 케이를 놀리지도 않았고 치근덕대지도 않았다. 그녀는 케이의 외모나 허벅지 근육 같은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케이가 가끔 가르쳐주는 글자에만 관심이 있었다.
케이에게 앰버의 무관심이 편했듯, 앰버 역시 케이의 무관심을 편안해했다. 다른 여자들처럼 케이의 관심을 끌려고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앰버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거 아니었어?”
그래서 옆에 있던 소년이 케이에게 그렇게 물었을 때 케이는 진절머리를 쳤다.
“닥쳐.”
“크큭, 넌 정말 이상한 놈이야. 유별나.”
“난 이런 거 관심 없어.”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아직도 자신의 손에 있는 <남녀 간의 성교 스킬 50가지>를 소년에게 떠넘기듯이 줘버렸다.
그때 그 말이 소년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그로부터 불과 몇 달 뒤에 시민들이 세워준 바리케이드 뒤에서 죽어가던 그 소년에게는 케이의 그 무관심이 어떻게 들렸을까?
케이는 오래도록 관심이 없다며 소년이 읽어보라 권하던 그 책을, <남녀 간의 성교 스킬 50가지>를 읽어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읽어라도 볼 것을.
바리케이드 뒤에서 함께 피를 흘리며 죽어갈 수는 없었다 해도. 그들이 어떤 것 때문에 죽어갔는지 알고는 있었어야 했는데.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그들에게 글자를 가르쳐주지 말았어야 했다. 괜히 그 천박하고 순진한 소년들에게 글자를 가르쳐주어서…….
그들을 결국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케이는 그들이 죽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제야 진정으로 자신이 늙어버렸음을 말이다.
그리고 케이는 이미 늙어버린 몸으로 남은 평생 그 표지를 머릿속에 담고 또 늙어가야 했다.
그 표지는 케이의 죄책감과 후회의 상징이자, 리오든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레본에서 신분과 계급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유물이었다.
케이는 그래서 앰버의 위험한 행동들을 알고 싶지 않았고 개죽음을 당할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소년들이 죽고 불과 얼마 후, 케이의 인생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케이가 제일 혐오하는 여자이자 왕족인 여자.
그 여자는 케이와 같은 생산 라인에 있던 소년들 중 3분의 1이 죽어나간 바로 그 공장에 거의 매일 들락거렸다.
그 여자는 케이에게 사소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자꾸만 물어봤다.
쉬지 않고.
케이는 거의 대부분은 대답해주지 않으면서도 여자를 자꾸만 힐끔거렸다.
애 티를 아직 벗지 못한 여자는 아름다웠고 모든 행동에서 기품이 흘러넘쳤다.
케이는 그 여자가 싫었다.
아니, 싫어해야만 했다.
케이는 여자의 흠을 잡으려고 매일 여자를 힐끔거리는 셈이었다.
왜 얼굴이 저렇게 하얗지? 왜 눈은 저렇게 파랗고 깊지? 코는 왜 저렇게 곧고 오똑하며, 입술은 왜 저렇게 촉촉하고 붉지? 왜 머리카락은 저렇게 부드러워 보이고 빛이 나지?
케이는 여자의 모든 것을 꼬투리 잡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점점 여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여자의 머리카락과 손짓, 눈동자와 코가 떠올랐고 그와 정반대에 있는 자신의 더러운 피부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과 거친 손짓, 삐뚤어진 코가 신경 쓰였다.
케이는 어쩌면 왕족들이란 애초에 다른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이상하고 신비로운 존재.
엘리자베스는 그런 주제에 자꾸만 케이를 함정에 빠뜨렸다.
은유적인 의미로도 그러했지만 진짜로 함정에 빠뜨릴 때도 있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케이의 친구인 척하고 하일 강변으로 불러내기도 했던 것이다. 하일 강변에 도착해서 케이가 자신을 부른 게 제 친구가 아니라 엘리자베스인 것을 알았을 때 심장이 얼마나 뛰던지.
케이는 화가 났다.
왜 가지지도 못할 것에 욕심을 부린단 말인가.
케이는 제 기억 속 소년들이 죽고 나서 스스로 죽여왔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을 느끼며 엘리자베스에게 툴툴거렸다.
엘리자베스는 그래도 자꾸만 케이에게 환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고 하일 강을 따라 산책하다 길의 끝이 보이자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다음 국왕 폐하의 영명축일에는 같이 갈래?”
“국왕 폐하의…… 영명축일?”
케이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는 얼굴로 묻다가 엘리자베스가 그런 것도 모르냐는 눈빛을 보내자 얼른 엘리자베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국왕이라니. 그런 건 나랑은 관련 없는 거잖아.”
케이가 국왕을 물건처럼 이야기하자 엘리자베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왜 관련이 없어? 내가 왕족이잖아. 그분의 평안과 안녕이 레본은 물론이요 나랑도 관련이 있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돌아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케이가 묻자 엘리자베스가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하면 같이 갈래?”
그날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두고 혼자 공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공장에서 출고된 옷감을 잔뜩 들고 솔치노로 갈 일이 있어 앰버에게 음료수를 한 잔 얻어마셨다.
그날이었다.
앰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케이에게 함께 참정권 운동을 하자고 제안한 날이 말이다.
“운동이 뭔데?”
“이 세상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모든 게 운동이야. 책을 읽는 것도, 돈을 쓰거나 돈을 쓰지 않는 것도, 물론 조금 폭력적인 방식도 운동이 되겠지. 레본과 마찬가지로 왕정을 유지하던 갸흐통 역시 국왕과 그 일가친척을 모두 단두대에 세워서 나라를 엎어버렸어. 모두 시민들이 한 일이지.”
“단두대?”
“그래. 단두대. 목을 자르는 거야. 머리부터 댕강. 상징적이지.”
앰버는 살벌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에게는 낯선 표정이었다.
케이는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천진한 얼굴을 떠올렸고 그녀의 아름답고 희고 기다란 목을 자를 칼날을 떠올렸다.
케이는 누군가가 제 목을 자르려고 하는 것처럼 목덜미를 쥐었다. 두근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케이는 이를 악물었다.
“싫어. 난…… 난 그럴 수 없어.”
동시에 그 책의 표지가 어른거렸다.
[남녀 간의 성교 스킬 50가지].
케이가 열지 못했고, 열지 못함으로 영원히 케이의 기억 속에 남은 그것.
케이는 이를 악물고 앰버에게 충고했다.
“평민 몇 명 쯤 죽는다고 바뀔 세상이 아니야.”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면 더더욱 아무것도 안 바뀌어. 그래도—”
앰버는 케이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래도 네 뜻은 알겠어.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살 필요는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