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71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분명 폭도들은 ‘대장’이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케빈이 말했다.
“진짜예요. 제가 들었어요. 공작부부가 국왕을 보게 해달라고 하는 것도 들었어요. 자기들이 국왕을 위해 한 일이 있는데 이럴 순 없다구요. 그들이 그런 말을 할 상대가 폭도들일 리는 없잖아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알았다. 멍청한 그녀의 부모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분명 그들은 제철공장에 반입한 무기들을 놓고 국왕을 협박했을 것이다. 무모한 시도였다.
엘리자베스는 국왕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이제 힘도 이용가치도 없는 제 사촌의 어쭙잖은 협박을 들어주고 있었을 리가 없다.
“알겠어. 케빈. 일단 나가자.”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세 번째 방 앞에 섰을 때, 엘리자베스는 그 냄새를 맡았다.
비릿한 냄새.
끈적하고 달콤한 냄새.
엘리자베스는 문고리를 쥐는 순간부터 알았다.
문을 여는 순간 무엇을 보게 될지.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문을 열었다.
엘리자베스는 문을 열고 자신의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입술을 물었다.
눈을 부릅뜨고 이마 정중앙에 구멍이 난 두 구의 시체.
엘리자베스는 그들이 언젠가는 자신의 가족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얼어붙게 만든 것은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살점 덩어리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결국 모든 것이 운명이 이끄는 궤적대로 흘러가버렸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어.
모두 원점이야.
그 말은 어쩌면 엘리자베스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예언이 아닐까.
뒤에서 케빈이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공녀님. 보비들이 와요. 빨리 나가야 돼요. 정말 보비들 짓이라면…….”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보았다. 케빈이 매연에 억지로 눈을 뜨고 엘리자베스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언젠가는 죽는다고 해도, 지금 죽으면서 케빈의 목숨까지 담보로 잡을 수는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손을 잡고 뛰었다.
케빈이 제정신이었다면 엘리자베스가 어떻게 매연 속에서도 잘 보고 잘 뛸 수 있는지 궁금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케빈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엘리자베스의 손에 이끌려 갈 뿐이었다. 뒤에서 보비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부부가 죽었어. 불태워버려.”
“상부의 지시라는 소문이…….”
“닥쳐. 너도 여기서 재속에 파묻히고 싶어?”
* * *
쾅!
케이가 알 수 없는 폭발음을 들은 것은 앰버와 케이를 실은 마차가 리오든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부둣가에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새벽에 출발하는 증기선에는 인부들이 짐을 싣고 있었고 잘 차려입은 귀족 몇은 통행증을 손에 들고 모자를 쓴 선원 앞으로 차례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뒤에서 들리는 폭발음에 고개를 돌렸다. 앰버와 케이는 마차에서 내리며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짐을 나르던 인부 하나가 중얼거렸다.
“국왕 폐하의 이름날이라더니 또 축포인가?”
케이는 어두컴컴한 리오든 쪽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저 먼 곳 어딘가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게 축포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정확히 볼 수 없었다.
케이가 기묘한 이끌림으로 리오든 쪽을 바라보고 있자 앰버가 케이의 팔을 잡았다.
“뭐 해.”
앰버가 케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앰버는 케이의 팔짱을 다정하게 끼고는 통행증을 검사하는 선원에게로 걸어갔다.
“앰버 플래스와 케이 하커요.”
선원은 앰버의 말에 객실명단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앰버 플래스? 그런 이름은 없소만.”
선원의 입에서 나온 말에는 짙은 멜니아 억양이 들어 있었다.
“아, 앰버 하커. 그런 이름으로 되어 있을 거예요. 어차피 멜니아 서부에 도착하자마자 결혼하기로 해서요.”
앰버는 붉은 입술로 부드럽게 웃으며 팔짱을 낀 케이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렇죠?”
케이는 앰버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곤 헛기침을 하며 앰버의 팔을 살짝 밀어내곤 선원에게 가까이 걸어가 나지막이 말했다.
“맞소. 블랙필드 선장하곤 얘기가 다 되었을 텐데. 201호실이오. 못 들었나?”
케이는 불퉁하기까지 하나 목소리로 말하면서 밑으로 돌돌 말린 지폐 몇 장을 선원에게 건넸다. 선원은 그것을 보더니 주변을 괜히 두리번거리곤 얼른 지폐를 품 안에 넣었다.
“그럼, 부인 분 통행증은 굳이 볼 것 없겠구만! 케이 하커 씨? 하커 씨의 통행증은…….”
케이가 품 안에서 통행증을 꺼내 내밀었다. 선원은 그것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슈.”
앰버와 케이의 시선이 만났다.
앰버는 케이의 어깨를 살짝 그러쥐고 다정한 모습으로 여객증기선 내부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선원이 충분히 멀어지기 시작하자마자 서로에게서 화들짝 떨어졌다.
“토 나와.”
케이의 말에 앰버가 코웃음을 쳤다.
“누가 할 말을.”
케이는 제가 들고 있던 앰버의 짐을 앰버의 앞에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1층 갑판으로 걸어가 기대어 섰다. 그리고 담배를 찾아 불을 붙였다. 케이는 앰버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짐을 들고 걸어오자 주위를 살피며 앰버에게 말했다.
“넌 대체 멜니아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통행증 하나 발급 받을 수 없다니. 이게 무슨 역겨운 연극이냐고.”
케이의 말에 앰버가 케이의 손에서 성냥갑을 빼앗아 들고 제 담배 케이스에 담배를 하나 들고는 말했다.
“너만 역겨운 거 아니라니까. 그리고 별 짓 안 했어. 그냥 우리 쪽 친구를 괴롭힌 인간 하나를 총으로 쏴버린 것뿐이야.”
앰버의 말에 케이가 눈썹을 꿈틀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앰버는 그렇게 말하며 벨벳으로 된 모자를 살짝 뒤로 젖혔다. 그 덕에 앰버의 잘 손질된 붉고 단정한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물론 그때 이름은 버렸지만, 앰버 플래스로 조회하면 분명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곤란하지. 하지만 앰버 하커는…… 하커라니. 그런 이름을 누가 의심하겠어.”
앰버는 케이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케이는 앰버의 여유로운 미소를 보며 검고 일렁거리는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그 이름도 오래가지 못할 걸. 결혼은커녕 약혼하자마자 혼자 남겨질 테니, 안타까워 어쩌나.”
케이의 말에 앰버가 얼굴을 구겼다. 앰버가 잔소리를 할 것을 알겠다는 듯이 케이가 다 타버린 연초를 바다에 버리고 짐을 들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앰버는 타다 남은 담배를 케이스에 집어넣고는 그런 케이를 따라 올라갔다.
201호는 갑판에서 가까운 객실이었다. 케이가 객실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그 안에서 얇은 양복을 입은 사내, 테시톤이 튀어나왔다.
“케이 씨.”
테시톤이 붉어진 얼굴로 케이를 맞이했다. 객실 안에서는 에드워드 역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술을 마시고 있었소?”
케이의 말에 테시톤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죠. 우리 넷이 이렇게 모이는 날은 흔치 않을 거 아닙니까? 어쨌든 기념을 해야죠. 우리가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테시톤의 말에 앰버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이 자식 덕에 과부가 되기 전에 술을 진탕 먹을 수 있다니. 포커도 한 판 쳐야죠?”
앰버가 그렇게 말하며 케이의 어깨를 툭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말에 에드워드가 말했다.
“과부라뇨?”
앰버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짐을 들고 201호실 안으로 들어오는 케이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케이가 그러던데요. 이제 자기는 죽을 거니까 난 과부가 될 거라고.”
“과부는 무슨. 결혼도 안 했는데 왜 과부야. 그냥 혼자가 될 거라고 한 거지.”
케이가 앰버의 말에 대답하며 입구에 있는 위스키 병을 쥐었다.
그리고 유리잔에 잔뜩 따라 홀짝거렸다.
에드워드가 말했다.
“에이.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어쨌거나 케이는 멀쩡하게 돌아올 거라구요. 내가 십대 때부터 케이를 봤잖아요. 케이는 남들은 10초만 담그고 있어도 피부가 녹아버리는 염료에 손을 넣고도 30초나 버텼어요.”
에드워드의 허풍에 앰버가 웃었다. 앰버는 물론이요, 테시톤도 웃었고, 말을 마친 에드워드도 웃었다. 케이는 세 사람 사이에 감도는 작위적인 흥분상태를 감지하고 쓰게 웃었다. 웃어줘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네 사람이 다 잠시 웃다가 또 다 같이 웃음을 멈췄다. 웃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까보다 더한 묵직한 엄숙함이 흘렀다.
테시톤이 제 잔을 집어들고 케이에게 물었다.
“신변 정리는 좀 했습니까? 서부의 공장 말고 리오든에도 재산이 좀 있잖아요. 그런 건 남겨주고 싶은 사람에게 남겨요.”
테시톤의 말에 앰버가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앰버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 남겼어요.”
로킨트의 저택과 공장은 전부 프란시스에게로 명의를 이전하게 되었다. 프란시스는 케이를 증오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케이의 부탁을 어길 것이라면 케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인지 뭔지 하는 사내를 찾아 헤매는 동안 엘리자베스의 집과 직장을 구해줄 것이다. 집은 로킨트 저택이 될 거고, 직장은 로킨트 공장이 되겠지.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결국은 엘우드 밀을 찾아낼 테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제 이름과 엘리자베스의 이름이 올랐으니 제까짓 게 더 이상 쥐새끼처럼 엘리자베스로부터 도망갈 재간이 없을 것이다. 케이는 시간이 더 있었다면 엘우드 밀이라는 비겁한 새끼를 찾아내 멱살을 쥐고 엘리자베스 앞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케이가 위스키를 한 모금 꿀꺽 삼켰다. 뜨거운 불덩이가 목을 통과하는 기분이 퍽 유쾌했다. 이미 심장에 불구덩이가 있는 케이였으니까.
케이는 자신이 앰버를 서부에 무사히 내려놓고 나면 이국의 군도로 간다는 것이 기뻤다. 군도에 세워질 수많은 귀족원들의 돈이 투자된 무역 주식회사의 일이 험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담보로 할 만큼 위험하다는 것도 기뻤다.
무역 주식회사. 그것은 퀴닌이라는 신의 가루, 신의 은총이 재개시킨 훌륭한 사업이었다.
선원들에게 돌았던 지독한 학질 때문에 해상무역의 종주국으로 추대받던 레본은 물론이요 이오페아의 다른 국가들의 경제가 한동안 침체되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원래도 무역 주식회사는 돈은 많이 되지만 이국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주식회사의 배들끼리 크고 작은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탓에 비판의 소지도 많고 탈도 많은 사업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학질이 더해지니 무역 회사들이 철수를 목전에 둔 상황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레본의 신문에 신의 가루를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얘기가 대서특필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