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69화
거기까지 읽었을 때 케이는 편지지를 잠시 손에서 내려놓고 숨을 크게 내쉬었었다. 그러지 않으면 숨을 쉬는 것을 자꾸만 까먹어, 목이 졸려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케이는 그렇게 자신이 죽지 않을 만큼만 쉬고 다시 편지를 읽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가 21살이었다.
얼굴이 시뻘겠고, 눈은 글자를 쫓다가도 편지지에 묻은 작은 먼지 하나라도 발견하면 거기로 도망갔다. 그 먼지가 엘리자베스의 예쁜 금발 한 올일까 봐, 그녀의 티끌 하나일까 봐.
케이는 그런 먼지를 볼 때면 또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나도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너에게 행복이 뭔지, 충만함과 설렘이 뭔지 알려주는 사람. 네가 하루하루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사람.]
편지는 그 즈음에서는 글씨가 뭉개지고 글자들이 자꾸만 작아졌다. 마치 편지를 쓰는 사람의 목소리가 작아지듯이. 종래에는 글자들이 웅얼거림처럼 저들끼리 몸을 비비고 모여 있는 곳에, 그래서 잉크가 짙게 번져 있는 곳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좋아해.]
엘리자베스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 순간의 케이가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제 아비는 공작가를 이용해 이 나라를 삼킬 계획을 세우고 공작가는 제 아비를 이용해 엘리자베스를 불행에 빠뜨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용해 또 자신은 엘리자베스에게 들끓는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이 시간들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편지는 케이를 현실로 일깨웠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로 말미암아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케이도 자신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그 편지가, 케이를 얼마나 끔찍한 기분으로 빠뜨렸는지…….
엘리자베스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더한 말을 쓰고 싶지만, 그러면 너는 또 도망가겠지.
네가 나를 외면할 때마다 네가 얼마나 얄미운지 아니? 내 기분이 얼마나 우울해지는 지 알아?
친구들은 내가 신경증에 걸린 사람 같다고 지친다고 하더라.
나도 그래.
너 때문에 내 기분이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나도 나를 주체하기가 힘들어.
이런 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할게.
나를 좋아해줘, 케이 하커.
네가 날 어떻게 봤든 이 편지를 읽고 나를 좀 더 지켜봐봐.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일 거고, 너는 나를 택한 걸 후회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잘 들어맞는 한 쌍처럼 오래도록 서로의 기쁨이 될 거야.
나를 좋아해볼 생각이 있다면…… 아니, 이 편지를 읽고 적어도 내가 궁금해졌다면 사냥터 뒤편에 있는 숲으로 와.
내가 몰래 숲으로 먼저 빠져나갈 테니까 날 따라와.
그러려면 날 그 저녁 내내 지켜봐야 할 거야.
알겠지?
나는 천년이라도 기다릴 거니까, 사냥꾼들이 내 얼어붙은 시체를 발견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거니까, 꼭이야. 꼭.]
케이는 간절함을 담아 꾹꾹 눌러담은 나머지 글씨들을 눈에 담고, 또 담고, 또 담고, 담다가 넘칠 것 같을 때까지 담다가…….
편지에서 눈을 뗐다.
우리는 잘 들어맞는 한 쌍처럼 오래도록 서로의 기쁨이 될 거야.
케이에게는 그 말이 저주처럼, 위험한 예언처럼 남았다.
케이는 그 말을 가슴에 새겼고 남은 평생 동안 우리가 서로의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 되도록 안간힘을 쓰겠다고,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왜냐하면 나도…….
아니, 나는…….
널 사랑하니까.
케이는,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에서야 케이는 그 말을 속으로나마 터트려버렸다.
눈은 시뻘게져서, 짓무른 입술을 깨물고, 엉망이 된 얼굴로 말이다.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니…… 그건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개 같은 거짓말이었어…… 개 같은 거짓말…….”
케이는 수도 없이 속으로 되뇌었던 말을 모두 어겼다.
널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말.
절대로 너에겐 내 마음을 주지 않을 거라는 말.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
그래. 사실 거짓말쟁이는 네가 아니라 나지만, 그래도 네가 나빠.
너는 결국 날 사랑하지 않았고, 나를 혼자 뒀으니까.
……사랑하는 나의…….
엘리자베스.
케이는 절대로, 남은 평생, 절대로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거라고 새로운 맹세를 가슴에 새겼다.
죽는 순간에조차 그 여자를 떠올리지 않을 거야.
엉망이 된 얼굴의 케이를 보며 앰버가 안절부절못했다. 앰버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케이의 뒷덜미를 장갑 낀 손으로 쓸어내렸다. 어색한 손짓이었지만 앰버로선 최선이었다.
케이가 말했다.
“말해봐. 어땠지? 그 어린 화공 놈을 보내고 네 삶은…… 어땠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케이는 눈이 먼 사람처럼 시선을 어디에도 두지 않고 물었다. 굳이 따지자면 하늘을 향해, 신을 향해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앰버는 케이의 뒷덜미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을 거야. 시간은 흐르는데, 시간이 멈춘 것 같을 거라고. 주변 사람들은 나이를 먹고, 네 육체도 나이를 먹지만…… 네 영혼은 멈춰 있을 거야. 영원히 그 사람의 곁에 머물렀던 시간 속에 살고 있을 거야. 끔찍할 거야. 살아 있음으로 내일을 맞이해야 한다는 게. 하지만 또 죽음으로써 이 기억을 놓아줄 용기도 없다는 게.”
앰버는 그렇게 말하며 비틀거리는 케이를 제 쪽으로 당겼다. 차마 몸을 바싹 붙이지 못했지만 대충 포옹이라고 쳐줄 수도 있을 법한 자세였다.
앰버는 케이가 짐승처럼 우는 것을 들으며 자신도 잠깐 감상에 젖었다.
애써 저 깊은 곳에 묻으려고 노력했던 감정들을 잠시나마 자유롭게 풀어놔버렸다.
하루쯤은 이런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많은데.
하루쯤은.
케이에게도 앰버에게도 이런 날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 * *
엘리자베스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다가 다시 마차에 올랐다. 멍청하게도, 엘리자베스는 잠깐 근처에서 기다려보았던 것이다.
토비에게는 저 멀리 돌아서 호텔 근처에 마차를 세워달라고 말하고.
혹시 모르니까. 케이가 저 여자한테 질려서 나한테 오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그때 엘리자베스가 도개교를 건너 너무 멀리 가버리면 이 리오든의 어둠 속에서 케이가 마차를 잡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그냥…… 기다려본 것이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본 것은 두 사람의 포옹뿐이었다. 서로를 위로하고 쓰다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애틋한 포옹.
개 같은 자식. 나한테는 한 번도 저런 느낌으로 손을 내밀어본 적 없으면서.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보여줬던 모습은 언제나 충동적이고 우악스러웠다. 케이의 말대로 못돼 처먹은 선생한테 욕구를 느끼는 남학생처럼 말이다. 한때는 그런 욕구마저도 애정이라고, 아니, 애정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거라고 여겼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짐승을 길들여 집 안에 들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 집안을 엉망으로 만든 꼴이다.
엘리자베스는 목구멍 안으로 느껴지는 텁텁함을 애써 꿀꺽 삼켰다.
“가자.”
엘리자베스가 마차에 올라 나지막이 말하자 토비가 대답했다.
“가요?”
괜히 의문형으로 묻는 토비가 얄미워서 엘리자베스는 퉁명스레 말했다.
“추워.”
거짓말이다.
엘리자베스는 별로 춥지 않았다.
오히려 더웠다. 심장 안에 누가 마른 장작을 넣고 태우고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엘리자베스는 이마를 짚었다. 미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엘리자베스는 감기에 걸렸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다. 지난 며칠간 얼마나 지독한 시간을 보냈나.
엘리자베스는 마차 자리에 딸린 등 쿠션에 몸을 기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 순간이었다.
“우웁.”
울렁거림이 밀려왔다. 비릿하고 달착지근하면서 끈적한 냄새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 며칠간 느껴봤던 충동 중에 가장 강렬한 충동이 엘리자베스의 내면을 추동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피 냄새가 짙게 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마부석으로 통하는 창문을 열었다.
“토비. 토비. 잠깐…….”
“왜 그러세요? 멀미 때문에 그러시나요?”
엘리자베스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이고 달리는 마차 창문을 열었다. 토비가 놀라서 말고삐를 세게 쥐었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멈춰 섰다.
엘리자베스는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미지근한 액체를 토해내고 마차에서 뛰듯이 내렸다. 그 순간,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잡아챘다.
“귀족이야! 젠트린가? 어느 쪽이든! 이년이 입은 드레스를 봐! 비싼 거잖아!”
“아가씨!”
순식간에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엘리자베스를 보고 토비가 놀라서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엘리자베스는 토비가 단숨에 폭도 한 놈에게 제압당하는 것을 보곤 자신의 머리를 잡아챈 남자의 팔을 쥐었다.
“꺼…… 꺼져…….”
네 팔 힘줄을 끊어놓기 전에.
엘리자베스는 그렇게까지 긴 인간의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디트리히 폰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억들이 자꾸만 왔다갔다 거렸다. 지금은 꿈속이 아닌 것 같은데. 꿈속에 있어야 할 그의 기억의 잔상들이 엘리자베스를 괴롭혔다.
‘조국을 승리로 이끌 실험이야.’
‘그건 인권을 말살하는 생체 실험이야, 엘우드 밀!’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것이 아닌 감정들로 숨이 턱턱 막혀왔다. 엘리자베스는 남자에게 경고조차 하지 못하고 남자의 턱을 쥐고 뒤로 밀었다.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남자가 마차에 부딪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젠장.
이러려는 게 아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기절한 남자에게 달려간 폭도들이 자신에게서 집중력을 잃은 사이 땅바닥에 붙어서 울먹거리는 토비를 짓누른 폭도에게로 걸어갔다.
이 힘을 자제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토비를 짓누른 남자의 가슴팍에 새겨진 선명한 손톱자국을 보았다. 남자의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를 보았을 때, 그 손톱자국은 여자귀족의 것이었으리라.
엘리자베스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이 남자는 엘리자베스가 경찰청 밖에서 보았던 선량한 이들과는 다른 족속이었다. 그 선량하고 용기 있는 시민들이 빛으로 어둠을 쫓아내고 있는 사이에, 몰려나는 어둠 속에서 약탈을 일삼는 진짜 폭도였다.
‘그들은 우리의 국민들을 무참히 살해했어.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그들이 먼저 조국민들의 인권을 훼손한 거야. 그런 이들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보나, 디트리히 폰?’
엘리자베스는 엘우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건 엘리자베스의 귓가에서 울렸으나 진짜 목소리는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단숨에 남자의 목을 노렸다.
남자가 욕지거리를 하며 엘리자베스에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엘리자베스는 조금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집게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약간만 더 힘을 주면 분명 죽일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여겼다.
그때 또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그래. 그렇다고 봐. 누군가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이 엉망진창은 절대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잖아. 그게 우리가 먼저여야 한다고, 그게 내 조국이고 나여야 한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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