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68화
그때,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서 어느새 걸어온 케이가 말했다.
“곧 온다는군. 요새 리오든 거리에 마차가 없어서 금방 올 거래. 밖에 가서 기다리다가 마차가 오면 알려주지.”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나가려고 하자 앰버가 말렸다.
“내가 갈게.”
엘리자베스는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셋이 가요.”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곤 어색한 표정을 짓는 앰버를 지나쳐 먼저 호텔 정문을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엘리자베스는 그 바람을 맞으며 케이와 앰버가 뒤에서 몇 발자국을 남기고 멈춰서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아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개자식이야.”
엘리자베스는 석고상처럼 굳은 케이의 옆에 멀찌감치 서 있는 앰버에게 말했다.
“이 남자는 개자식이에요. 예쁜 말도 개 같이 하고, 행동은 더 개 같고, 무엇보다…… 여자의 마음 같은 건 전혀 몰라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슬픈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붙잡으려는 듯이 튀어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케이가 앰버의 팔을 잡아서 붙잡기까지는 말이다.
앰버는 케이에게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케이는 앰버를 바라보지 않고 엘리자베스의 분노 가득한 눈빛을 그대로 받아내며 서 있었다. 앰버는 포기한 듯 한숨을 뱉어냈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엘리자베스, 나는…….”
앰버가 말을 잇기 전에 케이가 말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케이의 대답에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또 한참 노려보다가 뒤를 돌았다.
그때, 저 멀리서 달려오는 마차 한 대가 보였다. 토비였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더니 케이의 코트를 벗었다.
“그냥 입고 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한텐 아무것도 받지 않을 거야. 아무것도.”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코트를 바닥에 내던졌다. 눈이 그치고 쌓여 있던 눈이 살짝 녹아 진창이 된 바닥에 케이의 코트가 뒹굴었다. 엘리자베스는 저 멀리 있던 마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설 때까지 그 코트를 발로 밟고 또 밟았다. 앰버와 케이는 그 모습을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곧 마차가 엘리자베스의 뒤에 멈춰 섰다.
“도련님!”
토비가 얼굴을 내밀고 케이를 불렀다. 케이가 뭔가를 대답하기도 전에 엘리자베스가 마차에 올라탔다. 엘리자베스는 쾅 소리가 나도록 마차 문을 닫고 마차 창문 역시 닫았다. 엘리자베스는 마부석으로 통하는 창문 역시 닫아버렸다.
토비가 엘리자베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듯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듣지 않았다. 나무 벽 너머로 케이가 토비에게 돈을 건네주며 조심히 가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마차 창문을 붙들고 울음소리를 흘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천천히 마차가 출발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꼭 감았다.
기억 속에 이 순간이 너무 생생히 남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 * *
마차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케이의 뒤로 앰버가 걸어왔다. 앰버가 케이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괜찮겠어? 이대로 보내도 되는 거야?”
케이는 앰버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괜찮고 말고가 어딨어.”
앰버는 케이의 말에 분노까지 실려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마지막 기회야. 정말 후회하지 않겠냐고.”
케이는 앰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앰버는 피가 다 빠져나간 듯 새하얗게 질린 케이의 얼굴을 보고 조금 움찔했다. 케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내가 지금이라도 내가 잔뜩 판돈을 키워놓은 이 노름판에서 혼자 도망가는 쫄보 노릇을 자청하길 원해? 너네가 다 죽든 말든 그렇게 해볼까, 어디?”
케이는 투덜거리며 쪼그려 앉았다. 코트를 집어들던 케이에게 앰버가 말했다.
“오늘 네가 그러겠다고 했으면 난 그냥 보내줬을 거야.”
케이는 뒤통수로 쏟아지는 앰버의 말을 듣고는 짜증스럽게 코트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그럼 진짜 깽판이라도 치고, 다짜고짜 날 사랑하지도 않는 저 여자를 납치해서 멀리 도망이라도 가?”
케이는 소리쳤다. 케이가 소리칠 때마다 케이의 입 안에서 뿌연 입김이 흘러나왔다. 앰버는 그런 케이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함께 소리를 질렀다.
“멍청한 자식! 누가 봐도 저 여잔 널 사랑하잖아!”
앰버가 케이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고 싶은 표정으로 말하자 케이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긴 뭐가 없어. 넌 그냥 겁이나 내는 쫄보야. 어떻게 엘리자베스를 붙잡지 않을 수가 있어? 죽을 때까지 후회할 일이야.”
케이는 앰버를 쏘아붙였다.
“너도 그랬나 보지? 그 어린 화공 놈한테서 도망쳤을 때?”
케이의 말에 앰버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닥쳐.”
케이는 앰버의 눈빛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너도 그놈을 붙잡지 못했으면서 나한테 충고하지 마.”
케이가 그렇게 말하자 앰버가 주먹으로 케이의 가슴팍을 내려쳤다.
“내가 못했으니까 너한테는 그러지 말라는 거야. 넌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어.”
케이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충분히 알고 있어. 내가 지옥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것쯤은. 그래도 나는 어차피 내 것이 되지 않을 여자한테 미쳐서 모든 걸 내다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헛소리.”
앰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이미 여자한테 미쳐서 모든 걸 내다버리고 있어.”
“시끄러워. 춥다고.”
케이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코트를 주워서 더러운 먼지를 손으로 털어내고 팔에 끼웠다. 앰버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라도 말해줘야 했어.”
“뭘?”
케이가 눈썹을 꿈틀했다.
“뭐긴 뭐야. 네가 꾸미는 모든 짓 말이야. 네가 네 인생을 망치려고 꾸민 모든 짓을 저 여자도 알아야 하잖아.”
“왜.”
케이는 당장이라도 이빨을 드러낼 준비를 한 짐승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앰버는 그런 케이의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그럼 네가 직접 얘기를 해주든지! 네가 저 여자한테 네가 사실은 나랑 같이 켈토나, 멜니아로 떠나는 게 아니라 저 먼 군도로 떠난다고 얘기를 해주던지! 그 먼 바다로 떠나면 이제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잘릴 지도 모르고 아니면 팔이나 다리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가 다 잘릴지도 모르지만 네가 여자한테 미쳐서 완전히 돌아버려서 원래는 변할 거라고 믿지도 않았던 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고 얘기를 해주든지! 이제는 귀족도 왕족도 아닌 평민이 된 저 여자 하나 때문에 평민원에 진짜 평민들의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그렇게 저 여자의 세상을 바꿔주려고 목숨을 걸었다고! 그랬다고…….”
앰버는 울컥해서는 제 가슴을 쳤다. 체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말이라도 해보든지…… 이 멍청한 자식…….”
앰버는 한참을 케이에게서 뒤를 돌아 제 머리를 짚고 큰 숨을 들이 쉬었다 내쉬었다. 앰버는 제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중얼거렸다.
“네가 진짜 평민원 의석 때문에 이러는 건지, 아니면 그냥 실연의 상처로 돌아버려서 죽으러 가는 건지 모르겠어. 내가 지금 내 가장 친한 친구의 자살을 돕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돼서 돌아버릴 것 같다고, 나도…… 그러니까 엘리자베스한테 마지막으로 제대로…….”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 케이를 보았다. 그 순간 앰버는 케이의 표정을 보곤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케이는…….
커다란 어깨에 앰버보다 두 뼘은 커다란 키를 가진 케이는…….
울고 있었다.
붉은 눈에 이 세상의 모든 좌절과 절망을 다 껴안은 채로 케이가 으르렁거렸다.
“다시는. 다시는 내 눈앞에서 그 이름 얘기하지 마.”
앰버가 케이를 보다가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는 것을 깨닫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케이에게로 손을 뻗었다.
케이가 그것을 거칠게 쳐냈다.
“이제 앞으로 평생 내 앞에서 그 이름 이야기하지 마.”
앰버는 아득해지는 기분으로 말했다.
“케이…….”
“…….”
앰버는 케이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신음소리 같은 울음을 살짝 흘리곤 이를 악무는 것을 보았다. 붉어진 눈을 손등으로 거칠게 비비다가 그걸로도 모자라 손바닥으로 짓무른 눈을 꾹꾹 누르는 것을 보았다. 잇새로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막기가 힘들어 경련하는 그의 입매를 보았다.
앰버는 이 미련한 남자를 어떡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봐…….”
케이는 앰버에게서 뒷걸음질 치더니 눈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저 여자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어? 저 조그마한 여자가 나한테…… 뭐라고 지껄였는지 아냐고.”
“케이…… 제발…….”
케이는 빨개진 코를 한 채 앰버를 노려보았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 잘도…… 잘도…… 나 때문에…… 제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했어. 나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어. 나는…… 나는 이렇게 지옥에 빠뜨려놓고 말이야.”
케이는 이를 악물었다. 두 사람이 약혼하던 날,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억지 청혼을 마치고 나서 집에 오자마자 엘리자베스가 자신에게 주었다던 고백 편지를 불태워버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벽난로에 집어넣기 위해 봉투에서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꺼낸 순간부터, 그 편지에서 엘리자베스가 가끔 사용하는 향수냄새가 나는 순간부터 케이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케이는 편지지를 펼쳐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멋들어진 필기체로 적힌 편지가 있었다. 아직도 글씨를 읽는데 익숙하지 않은 멍청한 노동자 소년이 읽기에는 힘든 글씨였다.
케이는 그것을 필기체 책까지 찾아가면서 밤새 읽고 또 읽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케이에게.
내 편지가 너에게 갑작스러울까 봐 걱정이야. 나는 언제나 너를 보고 있었는데, 너는 나를 단 한 번도 봐주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건 네가 날 눈치채지 못해서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 거라면 이제부터라도 날 봐주겠어?
난 매일 매일 혹시라도 네가 어느 골목에선가 나를 보고 있을까 봐 착하게 굴려고 노력하고 있단 말이야. 괜히 길바닥에서 자는 아저씨한테 페니를 주기도 하고 평소엔 무시했을 법한 사람에게도 항상 친절한 미소로 다정하게 말하려고 노력도 해. 같이 있어도 늘 시선을 피하는 네가 혹시라도 잠깐 나를 봤을 때, 그때의 내 모습이 네 맘에 들어야 하니까.
네 맘에 들려고 노력하는 건 참 피곤하고…… 또…… 기분 좋은 일이야. 왜냐하면 네가 날 맘에 들어 했으면 좋겠어서 하는 모든 일들이 나를 하루하루 더 나아지게 만드니까. 나를 좋게 변화시키니까.
너 때문에 내 세상은 매일매일 더 나아져.
너 때문에 행복이 뭔지, 설렘과 충만함이 뭔지 배워가는 요즘이야.
케이 하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