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67화
앰버랑 멜니아로 간다고?
엘리자베스는 들끓었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내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마 케이 쪽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소파와 침대 옆에 있는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살짝 열려 있던 창문을 열고 발코니의 철제에 몸을 기대어 밖을 내다봤다.
차가운 바람이 엘리자베스의 몸을 감쌌다. 엘리자베스는 심장까지 얼어붙는 기분으로 호텔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붉은 머리의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앰버는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 슬쩍 고개를 들어 1318호 쪽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뒤로 물러났다. 엘리자베스가 다시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앰버는 이미 호텔 로비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앰버를…… 사랑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굳은 몸으로 소파에 엉거주춤하게 앉아서 대답했다.
“난 그런 건 몰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케이에겐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짓말.”
넌 저 여자를 사랑하는 거야.
아니,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야. 지금은 그저 앰버를 지켜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너를 속이겠지만, 결국은 인정하게 될 거야. 두 사람은 닮았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차마 케이 쪽을 돌아보지 못하고 말했다.
“앰버는? 앰버는 너를 사랑한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짜증스럽기까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랑이니 뭐니 그런 사치스러운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우린.”
우리라는 말에 엘리자베스의 등이 움찔했다가 잠시 멈췄다. 엘리자베스는 한참을 창 밖에서 뽀얀 입김을 뿜어내며 그렇게 있었다.
케이는 객실 안에 두껍게 깔려 있는 이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저 여자가 제 뺨을 열 대쯤 때리고 할퀴었다면 기분이 나아졌을 것이다. 케이는 견딜 수 없이 초조해졌다.
이대로라면 견딜 수 없었다.
저 여자의 등이 너무나 작아 보여서 사실 이 모든 건 거짓말이라고, 사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네가 미워서 떠나는 거라고 말하고 싶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케이가 여자의 등을 끌어안기 전에, 여자가 뒤를 돌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새빨간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여자는 새빨개진 코끝으로 자꾸만 훌쩍거리며 말했다.
“앰버는 널 사랑하게 될 거야. 앰버는 너를 많이 아껴.”
엘리자베스는 솔치노 스트리트에서 만났을 때 앰버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와 케이는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사람이에요. 그 말은 당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죠.’
엘리자베스는 그때 앰버가 케이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 사랑이 열정적이고 뜨거운 것은 아니더라도, 앰버가 케이에게 애정을 느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우린 오랫동안 평온할 거라는 거야. 서로를 파탄내거나 소모시키지 않고도 오랫동안 굴러갈 거야. 기름칠이 잘 된 기계 부품처럼 말이야. 너랑 나와는 다르게.”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케이는 몸의 한 조각이 파괴된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펫을 적시는 위스키 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남은 위스키를 몇 모금 마시고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다가 그 위스키를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그래. 너와 나랑은 다르겠지. 너네는.”
엘리자베스가 입술 아래로 흘러내리는 위스키를 거칠게 닦으며 말했다. 케이는 위스키 때문에 젖어서 번들거리는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훔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엘리자베스를 이곳에 가두고 제 안에서만 숨 쉬도록 길들이고 영원히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막았다. 제가 어떻게 얻어낸 이 여자의 자유인데, 어떻게 되찾아준 여자의 인생인데, 그것을 다시 제 손으로 빼앗을 수는 없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서 위스키 병을 받아들고 창문에 기대어 피식 웃었다.
“너도 그런 사람을 찾아. 이미 찾았는지도 모르지만.”
케이는 목구멍 끄트머리에서 달랑거리는 말들을 힘겹게 붙들어 매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삐뚤어진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엘리자베스는 붉어진 눈으로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넌 나를 절대 잊을 수 없을 거야. 네가 아무리 앰버와 행복해도, 그럴 수는 없을 거야. 나는 너 때문에 끝없이 불행해졌고 나락으로 떨어졌으니까, 네가 사람이라면 나를 잊어서는 안 되는 거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더 삐뚤어지게 웃었다. 너를 잊을 수 없을 거라고? 걱정하지 마. 그런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으니까.
네가 불행할 거라니. 네가 불행하면 얼마나 불행하겠나.
나만큼?
그럴 리가.
너는 절대 내가 지금 서 있는 불구덩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케이는 말했다.
“행복해져. 네가 원하던 대로 다 됐잖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개소리에 대꾸해줄 여력도 없다는 듯 비척비척 소파로 걸어갔다. 그리고 거기에 떨어진 손수건을 집어들며 말했다.
“이건 그럼 뭐야? 앰버 거였어?”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앰버랑은 이니셜이 달라. 그건 그냥 네 거야.”
이런 구차한 것들까지 지어낼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엘리자베스도 아주 약간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케이가 어떤 지옥 속을 거니는지. 그리고 네가 자신의 흔적 하나쯤은 품고 살아주면 좋지 않겠나.
네가 아니라 내가.
케이는 그렇게 결심했다가도 결국은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네 어머니가 준 손수건을 망가뜨렸으니까. 그래서 그냥…… 그런 거야. 가지든지 태우든지 맘대로 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코웃음을 쳤다.
“어련하겠어. 그래. 이건 내 거야. 네 말이 진짜든 가짜든, 이건 내 거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품 안에 손수건을 집어넣었다. 그때,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옆으로 걸어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제 코트를 엘리자베스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로킨트로 갈 거지. 마차를 불러오지.”
“이만 꺼지라는 말을 잘도 다정하게 하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럴 것 없어. 토비가 방금 로킨트에 도착했을 거야. 호텔에서 부리는 마부한테 데려다달라고 하는 게 나아.”
“지금은 마차가 없을 거야. 요새 리오든이 밤중에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아? 폭도들이 돌아다니면서 조금만 값나가 보이는 마차는 전부 공격한다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었다. 누가 지금 누굴 걱정해주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케이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프란시스인지도 몰랐다.
프란시스는 극구 부인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프란시스가 케이를 살렸고, 이제는 케이가 프란시스를 살리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케이가 프란시스에게 엘리자베스를 돌봐달라고 한 것은 사실은 반대의 의미였을지도 몰랐다. 엘리자베스에게 프란시스를 돌봐달라는 의미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날선 목소리로 케이를 쏘아붙였다.
“그 폭도들한테 제일 먼저 당할 사람은 우리 부모님이 되겠지. 폭도들이 클레몬트 공작부부가 풀려나길 제일 염원하고 있지 않겠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빛 속에 아주 약간이나마 드러난 붉은 틈이, 그 틈으로 엿보이는 죄책감이 통쾌해 일부러 그 틈을 파고들기 위해 말했다.
“난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평생. 네가 나를 잊을 수 없듯, 나도 너를 잊지 않을 거야.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에는 나는 널 죽여버릴 거고, 널 만날 수 없다면 매일 밤 널 죽이는 꿈을 꿀 거야. 그러니까…… 그래…….”
엘리자베스는 참고 있었던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너도 행복해져. 내가 널 죽이기 전까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고 케이가 자신에게 덮어준 코트를 벗어서 케이에게 던졌다. 케이는 코트를 맞고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 그것을 주워서 엘리자베스에게 입혔다.
“그냥 입고 가. 그래야 네 원수가 이 엄동설한에 얼어 죽을 가능성이라도 생기지 않겠어?”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감싸쥐고 엉엉 울었다.
멍청이.
넌 몰라. 나만큼 널 사랑해줄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넌 몰라.
죽을 때 관에 들어가서 후회나 하라지. 바보 천치 같은 놈.
엘리자베스는 참지 않고 울었다.
* * *
케이와 엘리자베스가 호텔 로비로 내려갔을 때, 로비 소파에 앉은 앰버가 담배를 피우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담배를 사러 간다는 건 전부 핑계였던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마부를 부르는 전보를 치러 카운터로 가는 케이를 따라가는 대신 앰버에게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건너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곧 앰버가 신문을 내렸다.
“엘리자베스. 벌써 내려왔어요?”
앰버는 그렇게 말하곤 눈으로 로비를 훑었다. 그녀는 카운터에 가 있는 케이를 찾곤 엘리자베스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할 말을 찾으며 망설이는 사이 먼저 말해버렸다.
“둘이 결혼할 거라는 얘기 들었어요. 축하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그건…….”
앰버가 눈을 또르르 굴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건 말이에요, 엘리자베스…….”
앰버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케이 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건 사정이 있어요…….”
“네, 그렇겠죠.”
그래. 앰버에게도 사정이 있을 것이다. 케이에게도 사정이 있을 것이고.
둘은 혁명의 동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서로를 속이고 스스로를 위안할 테다. 그러다가 어느 밤엔 견딜 수 없이 서로가 필요해지겠지. 그렇게 사고 같은 하룻밤이 지나고, 그런 하루가 몇 날 며칠이고 쌓여가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게 사랑이라는 것. 사랑이 별게 아니라는 것.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리는 앰버에게 말했다.
“둘 다…… 안전하고 평온하길 빌어요. 꼭이요.”
앰버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담배만 줄곧 피웠다.
“멜니아라면 켈토로 가는 건가요?”
“네?”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시 케이를 보았다. 두 사람이 멜니아로 간다는 것까지 얘기할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안다는 뉘앙스를 주는 게 앰버한테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얼른 말을 무마했다.
“아니에요. 내가 알 필요 없는 거죠. 그래요. 어쨌든…….”
다시 만나요.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하고 싶지도 않은 게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