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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66화 (6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66화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이를 바드득 갈며 대답했다.

“내게 총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그 말에 케이는 선뜻 협탁의 첫 번째 서랍장을 열었다. 거기에는 작은 리볼버가 들어 있었다.

“자, 여기.”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내미는 리볼버를 보며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트렸다. 그런 엘리자베스의 반응을 빤히 보던 케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두 번째 서랍장을 열어서 총알을 꺼냈다.

“아, 그래. 총알을 안 줬군. 여기 있어. 설마 나보고 총알도 끼워달라고 하진 않겠지. 그 정도는 직접 해.”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오만하고 건방진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다가 케이에게 달려들었다. 엘리자베스가 소파에 무릎을 세우고 케이의 멱살을 쥐었다.

“개자식. 감히 나를 배신했어? 감히 네가 나를?”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에 멱살을 잡히고도 가소롭다는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며 말했다.

“그럼 나는 못할 줄 알았어?”

너는 하는 일을. 나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케이는 그런 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거야? 내가 믿을 만한 남자인 줄 알았다니. 리오든의 귀족이나 평민이나 다들 입을 모아 이야기 할 거야. 리오든에서 제일 믿을 만하지 않은 남자를 꼽으라면 첫째는 로버트 하커요, 둘째는 케이 하커라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넌…… 넌…….”

엘리자베스는 다시금 차오르는 울음기 때문에 자꾸만 격해지는 숨을 고르며 말을 더듬었다. 케이가 그런 엘리자베스를 우습다는 듯이 구경하다가 말했다.

“그래. 물론 나는 평민이고 너는 왕족이지. 감히 나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황송해할. 하지만 이젠 아니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멱살이 잡힌 채로 위스키 병을 들어 마시려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다보다 병을 잡아채서 카펫 위로 던져버렸다. 위스키가 카펫을 적시며 쏟아졌다.

“나는…… 나는 날 다시 공작가로 돌려놓으라고 했지, 돌아갈 공작가를 없애라고 한 적 없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네 말을 들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어.”

“널 죽여버리고 싶어.”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삐뚤빼뚤한 얼굴을 보다가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엘리자베스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멱살을 놓고 케이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난 널 죽일 수도 있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을 밀어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에 엘리자베스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고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살짝 위로 올렸다. 그러곤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야. 여길 누르는 거라고.”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듣는 순간, 진심으로 케이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네가 사라지면 이 마음도 사라질까.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독인 줄 알면서도 먹게 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인생을 망치게 하는 건 바로 너야. 나의 구원자일 줄 알았던, 너라는 개자식.

엘리자베스가 케이가 말한 곳에 손을 대자 케이의 혈관이 느껴졌다.

불규칙한 박동이 엘리자베스의 손을 타고 엘리자베스의 심장에까지 가서 닿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죽이는 순간 자신도 죽을 거라는 걸 알았다.

살아 있어도 죽을 거라는 것을.

그럼에도 너무 쉽다.

이 느슨한 표정의 남자는 진짜로 자신의 목숨을 엘리자베스에게 내놓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혈관과 숨이 지나가는 곳을 그저 엄지로 지그시 누르기만 하면 한 번에 끝낼 수 있었다.

케이의 목숨도, 자신의 증오도, 자신의…… 사랑도.

엘리자베스는 엄지에 힘을 실었다. 꾸욱, 강하게 케이의 목을 압박하다가—

“씨발…… 씨발 새끼…….”

엘리자베스는 중얼거리며 케이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댔다.

두 사람의 숨이 가까워진 순간 케이가 자신을 밀어내려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밀어내면 죽여버릴 거야. 진짜로 진짜로 죽여버릴 거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협박하며 케이의 입술을 먹었다.

말 그대로 먹었다.

제 입술로 케이의 입술을 잠시 덮었다가 조금씩 케이의 입술을 맛보았다. 입술이 아니라 이로 깨물고 질겅질겅 씹었다.

너를 조각내서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이대로 혀를 끊어내어 죽여버리겠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연한 살을 노렸고 케이는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 그런 사냥 같은 키스가 멈춘 것은 엘리자베스가 차오르는 숨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떼어냈을 때였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흐느끼고 있었고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고통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입맞춤이 너를 고통스럽게 했을까? 아니면 내 울음이 너를 고통스럽게 했을까?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케이가 미웠고, 증오스러웠다. 엘리자베스가 한참이나 케이의 턱에 제 이마를 대고 울다가 말했다.

“개자식…… 개 같은 자식…….”

“이만 떨어져.”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잡고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반항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밀어내려고 하면 엘리자베스는 몸을 비틀었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가 바닥에 머리를 박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케이는 점점 균형을 잃고 소파에 눕혀졌고 엘리자베스는 그 위에 그를 깔고 앉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멱살을 쥐고 케이의 얼굴 위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그만 울어.”

케이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쥔 채로 나지막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왜 손수건에 내 이름을 수놓았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얼굴을 보며 울음기가 섞인 숨을 뱉어냈다. 엘리자베스는 호텔에 올라올 때부터 꽉 쥐고 있던 손 안의 손수건을 케이의 얼굴 옆에 던져버렸다.

손수건이 허공에서 펼쳐지면서 거기에 붉은 실로 수놓아진 알파벳이 선명하게 보였다.

E.

엘리자베스는 겨우 한 글자뿐이었지만, 케이가 준 손수건에 수놓아진 이 삐뚤빼뚤한 알파벳을 보는 순간 알았다. 이건 자신의 이름을 수놓으려고 한 것이었다.

손수건 끄트머리에 배어나온 붉은 색은 케이가, 이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자가 서툰 솜씨로 바느질을 하다 몇 번이나 피를 봤을지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손수건을 보는 순간부터 케이가 손수건에 수를 놓다 몇 번이나 손수건을 던져버렸을지, 얼마나 많은 욕을 했을지, 가슴을 몇 번이나 쳤을지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케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허공을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그랬으니까.

“네가 너무 미워…….”

말과 행동이 이렇게 다른 네가. 그래서 나를 헷갈리게 하고, 벗어날 수 없게 하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너를 사랑하는 나를 닮아가는 네가.

나는 너무 미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가 장악한 하체는 두고 상체만 일으킨 케이가 엘리자베스가 팽개친 손수건을 들어올리곤 말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당장 벽난로에 던져버려도 돼. 이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찌푸리는 케이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전생에서 네가 찢어버렸던 게 내 마음이 아니었듯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손수건을 태워버린다고 한들 너를 잊을 수는 없어.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케이에게 말했다.

“멜니아로 떠난다는 얘기 들었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굳었다.

케이는 자꾸만 우는 엘리자베스 아래에 깔린 채로 상체만 들고 힘줄이 돋은 목으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프란시스군.”

“네 어머니야.”

“이제 아니야. 나랑 한 약속을 어겼으니까.”

케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 케이의 뺨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랑 같이 가.”

“뭐?”

“이번에는, 나랑 같이 가자고.”

엘리자베스는 이번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전생에서는 그러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케이와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케이에게 우리가 얼마나 전생에서 엉망이었는지, 그 엉망 속에서도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그런 자신의 삶에 나타난 거지같은 시간여행자와 괴물이 아직까지도 자신을 얼마나 두렵게 하는지, 모두 말해줄 생각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뺨을 잡았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

“그럴 수 있잖아.”

“그럴 수 없어.”

“왜. 왜!”

엘리자베스는 소리쳤다.

“그 잘난 혁명을 하려고? 그래서 뭘 어쩔 건데? 세상을 바꾸려고? 넌…….”

엘리자베스는 흐느꼈다. 케이에게서 손을 떼어낸 엘리자베스는 제 얼굴을 가렸다.

“넌 이미 내 세상을 바꿨어. 그걸론 충분하지 않아?”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잠시 고통스럽게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잡고 엘리자베스와 붙어 있던 몸을 물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가린 손 위에 제 손을 가져다대고 끌어내렸다.

엘리자베스의 뿌연 시야로 케이의 표정이 들어왔다. 차갑고 단단한 표정이었다. 케이가 말했다.

“같이 갈 사람이 있어.”

케이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차분함이 들어 있었음으로 엘리자베스는 떼를 쓰듯 몰아붙이는 것을 멈추고 케이를 주시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누구?”

케이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저 그가 굳어 있다는 것만 몸짓으로 알 수 있었다.

“앰버.”

“……멜니아에 혁명을 하러 가는 거야? 아니면…….”

이 나라를 통째로 팔아넘기러 가는 건가? 윌리엄 조쉬가 한 말처럼?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삼켰다.

케이가 말했다.

“우린…….”

우리,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부터 엘리자베스는 직감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냥 그랬다. 케이는 한 번도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우리라고 부를 땐 이런류의 동질감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입술이 바싹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케이가 말을 이었다.

“우린 약혼할 거야. 나는 앰버를 지켜주고, 앰버는 안전하게 멜니아에서 지낼 거야. 우린 네 말대로 본질이 비슷한 사람들이니까 아마도 평온하겠지.”

케이는 제가 하는 말의 울림을 들으며, 그리고 그 울림이 가닿는 순간 제 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깨달았다.

앞으로 나는 이 여자 때문에 잠이 안 오겠구나. 어느 날은 이 여자가 불행할까 봐 잠이 안 오고, 또 어느 날은 이 여자가 행복할까 봐 잠이 안 오겠구나.

평생을 불면의 나날로 채우겠구나.

그냥 알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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