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64화
마차 문이 열리자 검고 차분한 드레스를 입은 한 여자가 엘리자베스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여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프란시스였다.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를 못 알아본 이유는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뭔가 늘 체념한 듯 시큰둥하던 프란시스가 묘하게 결연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프란시스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경사에게 말했다.
“저 마차로 갈 거예요.”
경사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반갑다는 듯이 얼굴을 환하게 펴며 그녀를 마차 쪽으로 밀었다.
군중은 소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는 듯이 엘리자베스와 경사의 앞길을 터주었다. 그러나 경사에게 발을 걸거나 어깨를 툭툭 치는 등의 행위는 끊이질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욕지거리를 뱉는 경사를 무시하고 마차 밖에 서 있는 프란시스에게 뛰듯 갔다.
프란시스가 내민 손을 엘리자베스가 꽉 쥐었다. 그러자 프란시스는 작지만 강한 힘으로 엘리자베스를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들어가렴.”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마차 깊숙이 몸을 집어넣고 마부석에 앉은 토비와 눈을 맞추었다.
토비도 왔구나. 엘리자베스는 토비가 눈물 나게 반가웠지만 토비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토비가 엘리자베스를 무시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고 엘리자베스가 고초를 치룬 사실이 안타까워 차마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몰려드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마차 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
“프란시스 부인.”
엘리자베스가 제 몸에서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최대한 마차 좌석 끄트머리에 붙어 앉은 채로 인사했다. 그걸 본 프란시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예의를 갖출 것 없어.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일단 물부터 마시렴.”
마차가 아주 약간 가다가 서다를 반복하는 사이에 프란시스는 커다란 가방에서 물을 꺼냈다. 프란시스가 가져온 가방을 힐끔 보자 그 안에는 연고나 빵, 물 같은 것이 잔뜩 뒤섞여 있었다. 우연히 경찰청 앞을 지나다가 엘리자베스를 구해주기 위해 멈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시모가 될 뻔 했었던 부인 앞에서 격식을 갖추고 점잔을 빼고 싶었지만 물병 안에서 찰랑거리는 물과 와인을 보는 순간 주저 없이 와인을 골랐다.
“내부가 추웠어요.”
엘리자베스는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며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프란시스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평소 술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었건만 경찰청에서 나오자마자 마시는 이 와인은 무척이나 달콤하다고 느꼈다. 혀에 감기는 포도주의 맛과 향이, 춥고 딱딱한 침대에서 엘리자베스의 온 몸을 괴롭혔던 근육통을 경감시켜주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가 포도주를 벌컥벌컥 마시자 프란시스가 그것을 안쓰럽게 보다가 기다란 파이프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프란시스는 파이프를 쭈욱 빨아들여 연기를 뱉어내곤 파이프를 엘리자베스에게로 건네주었다.
“어, 저는…….”
엘리자베스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프란시스가 말했다.
“참을 것 없어. 그리고 내가 평소에 피우는 약초를 좀 넣은 거니까 몸이 좀 풀릴 거란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입가에 묻은 포도주를 소매 끝으로 쓱쓱 닦아내고 프란시스가 내미는 파이프 담배를 받아들었다.
엘리자베스는 파이프로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었으므로 서툴게 물부리에 입을 가져다대고 빨아들였다. 독한 연기가 그대로 들어올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순한 향이 엘리자베스의 입안에 감돌았다.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그것을 빨아들이고 뱉었다. 그러자 프란시스의 말대로 몸이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참을성 없이 몇 번 더 연기를 빨아들이고 뱉은 뒤 마차 창문을 열었다.
드디어 군중이 모인 곳을 벗어나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물음에 프란시스가 대답 없이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파이프를 입에서 떼고 다시 물었다.
“왜요? 어디로 가는데요?”
“어디로는 없어.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면 된단다. 엘리자베스.”
프란시스는 묘한 대답을 하며 품 안에서 궐련을 꺼냈다. 그러곤 거기에 불을 붙여 길게 빨아들이고 마차 창문을 열어 연기를 뱉었다. 프란시스는 창밖에 줄줄이 지나가는 가로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고 싶니,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조금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저는 지금 가고 싶은 곳도, 갈 수 있는 곳도 없어요. 부인.”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가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내며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엘리자베스를 또 빤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로버트 하커의 저택에서는 잘 만들어진 유리 조각상처럼 작은 행동도 조심하고 흐트러짐이 없던 프란시스가 보여주는 새로운 모습에 매혹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나를 데리러 오신 거지?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내민 도움의 손길이 지금 너무도 간절한 나머지 그런 단순한 질문조차 함부로 뱉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보고 싶은 사람은?”
나에게 보고 싶은 사람을 묻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엘리자베스는 속이 탔다.
프란시스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파이프를 들고 있지 않은 손에 쥐고 있던 수통에 든 와인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 것도 없어요, 이제.”
“……그렇구나. 나도 그런데.”
프란시스가 그렇게 말하며 창문 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프란시스의 표정에 든 침울함은 엘리자베스를 견딜 수 없게 하는 지점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최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란시스는 며칠 뒤에 있을, 아니, 있었어야 했을 케이 하커와 엘리자베스의 결혼식 전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 일로 로버트 하커가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으므로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결혼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프란시스는 정신병원 내에서 사고사로 생애를 마감했다고 했다.
프란시스의 장례식에서 많은 추모객들이 프란시스의 사망 원인이 사고사가 아닌 자살일 거라고 떠들었다. 그러나 로버트 하커는 극구 부인했다. 엘리자베스는 당시에는 시부의 강력한 부인 탓에 반신반의했었는데, 이번 생에서는 확실하게 알았다. 프란시스의 손목에 난 자상을 확인했으니까.
프란시스는 자살한 것이었다. 아니, 자살할 것이다. 그것도 약 한 달 뒤에.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눈빛 속에 담긴 끝없는 우울이 프란시스를 가두기 전에 어떻게든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나오고 싶었다. 프란시스가 아까 엘리자베스를 마차 안으로 끌어당겼듯이 말이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클레몬트 공작 부부도, 엘리자베스도, 케빈도, 케이도, 결국은 모두 자신의 궤적을 따라 갔다. 공작 부부는 처형을 면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처형을 당하는 것보다 못한 여생을 보낼 것이다.
케빈은 결국 퀴닌 화학 합성에 성공한 과학자로 이름을 알릴 것이고, 엘리자베스는…….
결국 케이에게 배신을 당했다.
그렇게 미래를 아는 엘리자베스마저도 자신의 궤적을 따라 질주하고 있는데, 그런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회의적이었다.
그때 프란시스가 그 우울한 얼굴을 돌려 엘리자베스를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 미소에 흠칫 몸을 움츠렸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나는 한때 케이를 죽여버리고 싶었어.”
프란시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는 한기가 담겨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파이프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후, 마차 창문 밖에 연기를 뱉는다는 핑계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이해해요.”
“아니, 넌 이해 못해. 엘리자베스.”
프란시스의 대답은 단호했다.
“내가 케이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너는 몰라. 내가 한때 로버트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가졌는지, 넌 절대 모를 거다.”
프란시스는 어느새 짧아진 담배를 마지막으로 길게 빨아들이더니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어쩌면 그건 로버트에 대한 기대라기보다는 나에 대한 기대였을지도 모르지. 나는 내가 로버트를 구원할 거라고 믿었던 것 같아. 거칠고 탐욕스러운 남자를…… 내가 길들일 수 있다고 믿었지. 아니, 길들였다고 믿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빤히 보는 프란시스의 눈 속에서 자신을 보았다. 어쩌면 그녀도 케이를 길들였다고 믿었는지도 몰랐다. 케이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구원하고 싶었고 그의 인생을 뒤바꾸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엘리자베스는 오랜 시간 케이가 자신을 구원할 야단스럽고 대단한 놈이길 바란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면 자신이 케이에게 야단스럽고 대단한 구원자가 되길 바랐던 걸지도 몰랐다.
아니, 그랬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삶을 불쌍하게 보고 안타깝게 여겼다. 천박하고 더러운 평민의 삶.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다. 엘리자베스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 되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렇게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고 싶었다.
쉐필드에서처럼 농노 위에 군림하는 공녀가 아니라, 리오든에서처럼 귀족들의 사교계를 누비고 다니는 왕족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미가 있어보고 싶었다.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너였으면 했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다시 끝없이 서러워지는 마음을 붙잡고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였다.
머리는 자꾸만 명징해지고, 가슴은 자꾸만 뜨거워졌다. 둘 사이에 격차 때문에 엘리자베스의 감정은 점점 더 극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케이는 그런 내 믿음이 깨진 순간, 그 순간을 대변하는 상징물 같은 거였어. 로버트가 나를 무시하고 방치하고 로버트의 사생아에 대한 수많은 소문이 들려왔어도 결국에는 로버트의 저택 담장을 넘은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위안하고 또 속였다. 모두 소문일 뿐이라고. 로버트는 나만을 사랑한다고.”
프란시스는 피식 웃었다. 그때의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런데 케이는 달랐다. 케이는 그 차디찬 겨울밤 내내 빽빽거리며 울어댔지. 잠을 잘 수가 없었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저택에서 케이의 울음소리를 듣다가 담요를 꺼내어 들고 나갔어. 왜 그랬는지 아니?”
프란시스가 차갑고 어두운 눈빛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말을 이었다.
“케이의 얼굴에 담요를 놓고 짓눌러 죽여버리려고 그랬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