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63화
“그러면 저도 화학사 같은 책에 제 이름을 실을지도 몰라요! 공녀님!”
케빈의 발그레해진 얼굴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넌 반드시 그럴 거야. 원래 그러기로 정해져 있던 운명이니까. 나와 케이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운명이었듯이.
엘리자베스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케이는…… 어때 보였어?”
엘리자베스의 가라앉은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듯 케빈은 쾌활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전이랑 똑같죠 뭐. 무섭고, 커다랗고…….”
엘리자베스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질문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그 중 무얼 물어봐야 할지, 무얼 물어봐야 덜 상처받으면서 덜 못나 보일지 고민하는 사이에 밖에서 경사의 몽둥이가 드르륵하고 쇠창틀을 긁는 소리가 났다. 케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호에요. 누가 오나 봐요. 저 먼저 갈게요, 공녀님.”
케빈이 다급하게 말하며 문으로 걸어가자 검은 손이 쑤욱 들어와 케빈을 끌고 나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자베스의 방문이 닫혔다.
엘리자베스는 재빨리 촛불을 불어 껐다. 그러곤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누군가가 제 모습을 몰래 보고 있다가 불쑥 튀어나와 제 위선과 가식에 대해, 그리고 제 멍청함에 대해 조롱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끼우고 밖으로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소리 없이 울었다.
난, 난 내 마음이 창피해. 네가 내 마음을 창피해했던 것처럼. 이젠 나도 내 마음이 창피해,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이불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케이가 알현실에서 제게 내밀었던 손수건에 코를 박고 흐느꼈다.
개자식…….
이 개자식…….
* * *
다음 날은 형식적이고 짧은 취조만이 계속되었다.
취조가 시작되기 전에 엘리자베스의 방문 아래로 신문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는데,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잭과 스윈든 둘 중 하나의 소행임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말라비틀어진 담배 3대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담배는 책상 위에 고이 내버려두고 신문을 펼쳤다. 그러자 신문 속에는 레본혁명전선에서 내보낸 엘리자베스가 어린 소년을 감싸 안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고 그 위에 커다란 헤드라인이 적혀 있었다.
[레본 국왕, 엘리자베스와 공작부부를 사면키로 하다.]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간 세금을 횡령해 반역을 꾀한 혐의로 구속되었던 공작부부를 국왕 폐하가 직접 사면하라 요구했다. 공작부부의 세금 횡령은 반국가적인 위협 행위이나 반역까지는 과한 처사, 라고 하셨다. 그뿐 아니라 부부의 딸인 엘리자베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왕족의 지위는 가질 수 없는 평민이더라도 퀴닌이라는 국민들의 건강에 중요한 치료제를 개발한 공을 높이 사 아카데미에서 수학할 수 있도록 하며 앞으로도 평민의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엘리자베스는 어차피 아는 얘기라고 여기며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두 번째 페이지에는 로버트 하커에게 내려질 ‘경’ 칭호에 대한 짧은 논설이 적혀 있었고, 세 번째 페이지에는 국왕이 귀족원과 맞서며 의회에 평민들의 자리를 넓히라고 명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도 결국은 같은 얘기였다.
엘리자베스를 놓고 국왕과 하커 가문이 가장 큰 수혜를 얻었다. 군중들은 이 기사들이 쏟아지면 귀족원을 위시한 귀족들에 대한 반감을 표하며 치료제 개발에 힘써준 하커 가문과 국왕께 감사를 올릴 것이다. 케이는 훌륭한 담판을 지은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노름판 위의 말이 되었다는 게 어이가 없어 웃었다. 아니, 어쩌면 엘리자베스는 단 한 번도 케이의 말이 아닌 적이 없었던지도 모른다. 저번 생에서도 케이는 공작 부부를 배신해 제 가문을 지켜내지 않았던가.
엘리자베스는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밖에서 어슴푸레하게 들려오는 인기척에 서둘러 신문들을 침대 아래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눈이 간밤에 더 크게 부은 존슨이 엘리자베스를 보며 물었다.
“왜 바닥에 앉아 있으십니까?”
엘리자베스는 존슨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댁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에요.”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일어나서 존슨을 따라 취조실로 갔다.
취조는 짧았고, 어제보다 경감의 말투는 훨씬 부드러웠다. 더 이상 엘리자베스를 겁 줘서 얻을 게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엘리자베스 역시 고분고분하게 경감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대답해주었다.
경감이 말했다.
“오늘 한 얘기의 대부분은 리오든 경찰청에서 공식 발표를 할 때 쓰일 겁니다. 괜찮으시겠죠?”
엘리자베스는 비릿하게 웃었다. 공작부부가 파티를 일 년에 100번씩 했다더라, 옷값으로 이만큼을 썼다더라, 귀족원의 유력인사와 친하게 지내며 제 잘못을 덮어왔다더라—
엘리자베스는 귀족들을 향한 평민들의 날선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들은 적도 있었다.
‘공녀인지 뭔지도 데려와! 공작의 아내도 데려오고! 당장!’
엘리자베스는 공개처형 때 사람들의 날선 목소리를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맘대로 해요. 뭐든지. 맘대로.”
엘리자베스가 체념한 얼굴로 말하자 경감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자정쯤에 풀려나실 겁니다. 공작부부는 며칠간 더 잡혀 있겠지만요. 먼저 가셔서 신변 정리를 하시던지, 맘대로 하십쇼. 할 것도 없겠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미 몰수당한 공작부부의 타운하우스를 떠올렸다.
그런데 자정이라니. 왜 하필 자정인가? 노숙을 하기에도 너무 추운 시간이 아닌가.
“왜 자정이죠?”
“그야 지금 나가면 위험하니까 그런 게 아닙니까. 지금 리오든이 난리입니다. 깡패 같은 놈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귀족들 집에 화염병을 던지고 있어요. 당신 같은 곱게 생긴 아가씨가 돌아다닐 시기가 아닙니다.”
엘리자베스는 경감이 하는 말이 어이가 없어서 경감을 노려봤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주는 것인가.
“그럼, 곱게 낮잠이나 주무시다가 자정에 시키는 대로 방 빼쇼.”
경감은 킥킥거리며 웃다가 엘리자베스에게 취조실 문을 열어주었다.
* * *
엘리자베스는 일단 방 안에서 촛대와 의료 도구를 챙겼다. 정확히 말하면 훔친 거지만.
정말로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여차하면 남의 가게 처마 밑에서 임시로 병원을 열어 돈을 벌어볼 생각도 있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되면 합숙생활을 하게 되지만 아직 아카데미가 개원하려면 1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카데미 학비부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도 엘리자베스는 잘 몰랐으므로 일단은 제 몸은 제가 지키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격식을 차린 펑퍼짐한 속바지 안에 훔칠 물건들을 잔뜩 넣고 일어나서 매무새를 살폈다. 이틀 동안 경멸하던 드레스 차림이었지만 이럴 때가 되니 귀족의 풍성한 드레스가 고마워질 지경이었다.
케이는 여자들의 가짜 엉덩이를 늘 쓸모없다 불렀지만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멍청한 놈.’
엘리자베스는 습관처럼 그 녀석을 떠올리고, 또 그 녀석을 저주하며 늦은 밤 제 방을 찾아온 경사의 손에 이끌려 경찰청 입구로 걸어갔다.
늦은 밤이었는데도 경사들이 복도에 쫘르륵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긴장된 얼굴이나 눈빛을 보며 의아했다.
이 밤에 무슨 흉악범이라도 잡혀온단 말인가?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경찰청 뒷문을 열어주는 보비를 따라 걸어 나갔을 때였다.
처음에는 밤이 왜 이렇게 대낮처럼 환한가,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땅 위에 떨어진 수많은 별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철제로 된 계단 위에서 촛불이나 횃불을 들고 서 있는 수많은 민중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쇼.”
경사가 엘리자베스의 팔꿈치를 잡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어차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틀이 지나고도 여전히 이들이 여기에 모여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고함치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히 경찰청의 뒷문과 앞문을 지키고 있던 리오든의 시민들이 서서히 제가 가는 길 앞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눈으로 눈 한 쪽이 탁하던 소년과 제게 스콘을 내밀던 젊은 여자를 찾았다. 하지만 그들이 들고 있는 촛불은 밝고, 주변은 어두웠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개개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었고, 그들은 그저 거대한 빛무리였다.
엘리자베스는 군중들이 손쉽게 국왕과 하커에게 붙어 제게 돌을 던질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빈약한 상상력을 한탄했다.
군중들이 든 팻말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여자 과학자를 의회로.]
[신의 가루는 이제 인간의 것이다.]
[꺼져라, 귀족원.]
엘리자베스는 이제 그들에게 자신이 더 이상 귀족도 아니고, 왕족도 아니며 그저 한 명의 과학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 길바닥에서 자야 할지도 모르는 오늘밤을 두려워했던 나약한 마음은 어느새 촛불 앞의 어둠처럼 사라져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그들 사이로 걸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긴장된 호흡을 느꼈고 자신도 그들과 함께 숨을 쉬고 있다고 느꼈다.
단 한 번도 우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우리.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우리.
엘리자베스가 빨개진 눈시울로 그들을 보고 있을 때 경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젠장할. 아직도 안 꺼지고 모여 있다니.”
엘리자베스는 경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는 이 사람들을 해체시킬 권리가 없을 텐데요.”
경사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당장이라도 엘리자베스의 뺨을 내려칠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 거대한 빛무리들이 경사를 주시하고 있었고 중간 중간에는 기자들도 있는 것 같았다.
경사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마차를 준비했소?”
엘리자베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경사는 그 표정의 의미를 알고는 빨리 다른 질문을 했다.
“어디로 갈 거요? 클레몬트 타운하우스?”
엘리자베스는 경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경매 처리가 완료되지 않았다면 그 집에 쥐새끼처럼 숨어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집과 집에 딸린 가솔들이 함께 경매처리가 되는 귀족 타운하우스의 특성상 분명 거기엔 캐런과 미치가 있을 것이다. 거기론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럼 어디로 가겠다는 거요!”
경사가 자꾸만 어깨에 톡톡 떨어지는 촛농에 질색을 하며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엘리자베스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경사를 골려주기 위해 할 말이 있는 척 입을 달싹이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마차 하나가 멈춰 섰다. 엘리자베스는 그 마차의 인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젠트리라 비웃음을 사던 하커 가의 인장이었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