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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62화 (6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62화

“정말 신의 가루를 가지고 계세요?”

치료를 받던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당신이 그 공녀님……!”

남자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왜인지 모르게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부, 부끄러워……!’

다들 엘리자베스가 무슨 여신이라도 된 것처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헛기침을 하며 치료에 집중하는 척하고 말했다.

“신의 가루를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식을 알고 있는 거예요.”

“인공……? 합성……?”

남자는 엘리자베스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중얼거리다가 말했다.

“어쨌든 당신이 그분이 맞는다는 거네요! 안 그래도 제 막냇동생이 학질 때문에 고생이거든요.”

“동생이요?”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말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부끄러움은 잠시 접어두고 남자에게 동생의 증상을 몇 가지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남자가 말하는 것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동생 분은 학질이 아닌 것 같네요. 그건 식중독이에요.”

“네? 학질이 아니라구요?”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식중독으로 그렇게 오래 앓기도 하나요?”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죽기도 해요. 그러니 반드시 끓여서 식힌 물을 먹이도록 하고, 소금이 있으면 소금도 조금 타서 먹여요.”

“죽기도 한다구요?”

남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엘리자베스는 남자를 위로하듯 말했다.

“물과 염분만 잘 보충해준다면 학질보다는 훨씬 다스리기 좋은 병이에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반짝거리는 눈으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혹시 담배 필요하세요?”

“네?”

“아, 제가 여기서 담배 유통책이거든요. 술도 구해올 수 있습니다! 저는 잭이라고 해요.”

잭이 자기소개를 하자 순서를 뺏길 수 없다는 듯이 옆에 있던 남자가 얼른 말했다.

“저는 스윈든입니다.”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의 말에 놀란 눈으로 잭과 스윈든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요.”

“그럼 보고 싶은 사람은 없으세요? 제가 데려올 수 있어요. 저는 스윈든이에요.”

“알아요. 스윈든. 외웠어요, 당신 이름.”

그러자 스윈든이 얼굴을 빨갛게 달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영광이에요.”

스윈든이 수줍게 고개를 숙인 사이 엘리자베스는 스윈든의 말을 곱씹었다.

보고 싶은 사람. 지금 당장 보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단 한 명을 고르겠지만 그에게 하고 싶은 말 모두 당장 얼굴을 보고 해야 할 말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다음으로 공작 부부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이 보고 싶으냐고 하면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그들과 다시 얽히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서 잭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공녀님하고 같이 들어온 소년이 있었는데, 그 녀석을 밤에 여기로 오게 해드릴까요? 이름이 케빈이라고 하던가? 그 녀석도 경감한테 몇 대 얻어맞았는데, 그러면서도 절대 공작 부부와 공녀님에 대해선 불지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하실 얘기가 있으시면 이쪽으로 오게 할게요.”

“이봐. 오게 하는 건 내가 하는 일이라고. 남의 공로 가로채지마.”

“공로는 무슨. 그래봤자 아는 경사 몇 놈한테 내 담배를 먹여서 부탁하는 거면서.”

케빈! 케빈이 잡혀 들어왔구나.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자신이 너무 안일했음을 탓했다. 생각해보니 케빈 역시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던가. 국왕이 케빈을 그냥 뒀을 리가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두 사람의 다툼 중에 끼어들어서 말했다.

“그럼 케빈을 볼 수 있나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두 사람이 얼른 대답했다.

“네!”

“네!”

* * *

엘리자베스는 잭과 스윈든이 시킨 대로 취침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대신에 문에 귀를 가져다대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곧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방문을 열어주었다.

엘리자베스가 열린 방문 틈으로 나가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기다리자 곧 벽에 인영이 서렸다. 그러더니 틈 안으로 불쑥 손이 들어왔다. 엘리자베스가 그 손을 덥석 잡아끌자 익숙한 얼굴의 소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케빈!”

엘리자베스가 소리치자 방밖에서 경사 하나가 몽둥이로 엘리자베스의 방문을 크게 쳤다. 케빈은 움찔하며 몸을 웅크렸다.

이제 보니 케빈의 얼굴에는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상처가 선명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상처를 보며 가슴 속 여린 살이 뭉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미안해…… 나 때문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몸은 괜찮아요? 그 무지막지한 경사 놈이 공녀님한테까지 손을 댔다면서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요. 소문 다 났어요. 잭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라나.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어요? 덕분에 내일 신문에 그것까지 실리게 생겼다니까요.”

“여기서도 소문이 그렇게 빨라?”

“당연하죠. 게다가 지금 연일 화제라구요. 화제!”

케빈은 왠지 모르게 흥분한 얼굴로 품 안에서 작은 석간신문을 내밀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구한거야?

엘리자베스는 문 밖의 경사 눈치를 보며 침대 맡으로 가서 성냥에 불을 붙여 작은 양초를 켰다. 그러고는 석간신문을 그 작은 불빛에 비춰보았다. 그러자 수많은 군중들 속에 둘러싸여 작은 소년을 감싸 안고 있는 제 모습이 보였다.

[인민 앞에 무릎 꿇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엘리자베스는 신문의 이름을 살폈다. 레본혁명전선. 엘리자베스는 이것이 윌리엄 조쉬가 쓴 기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옆에서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팔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 사진, 선물로 줄게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돌아보았다. 케빈의 얼굴에는 아까부터 묘한 열기가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 너 아까부터 왜 이렇게 즐거워 보여? 세상에. 입안이 잔뜩 터졌잖아. 며칠 고생 좀 하겠어.”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싱글벙글 웃을 때마다 보이는 입안의 상처에 미간을 찌푸렸다. 엄청 아플 텐데도 케빈은 조금도 찌푸리는 기색 없이 말했다.

“왜긴요. 아까 통신국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둘째 여동생이 잠깐 사식을 넣어주러 왔다가 시골에서 전보를 받았다고 했거든요. 전보라니! 아버지가 그런 데에다가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요! 시골에까지 신문이 잔뜩 퍼졌다고 제가 자랑스럽다고 전해달라고 하셨대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이상하게 가슴 속에 송곳이 돌아다니는 듯 심장께가 찡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케빈. 아버지가 네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집에 있게 만들고 싶어 하셨다며.”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케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죠.”

“그런데도 아버지가 그렇게 말해서 기쁘니?”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얼굴에서 기쁨을 거둬간 것이 미안해져서 다급하게 위로의 말을 건네려고 했다. 그러나 케빈이 한발 빨랐다.

“네. 솔직히 말해서 그래요. 어쨌든 아버지는 아버지잖아요.”

케빈의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서러워졌다. 그것은 엘리자베스가 클레몬트 공작부부를 떠올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케이 하커를 떠올렸다. 자신을 죽일 뻔했던 아버지에게라도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이 여린 마음이 케이 하커 앞에서는 한 없이 어린 아이처럼 변하는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엘리자베스는 차오르는 눈물을 숨기고 말했다.

“그래. 다행이야. 이 기회로 가족들과 잘 지내면 좋겠어, 케빈.”

“고마워요. 공녀님.”

케빈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은 수줍은 듯이 제 머리를 헝클이며 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공녀님 방은 정말 좋네요.”

“어? 어…….”

엘리자베스는 제 방을 둘러보며 왠지 민망해져서 대답했다. 케빈은 고초를 겪고 있을 텐데 나만…….

“제 방도 좋긴 엄청 좋아요. 독방에 침대도 있거든요. 이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데 엘리자베스의 미안함이 무색하게 케빈이 신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경감이 자꾸 알지도 못하는 공작 부부 얘기를 물어보거나 공녀님 흠을 잡으려고 들 때는 짜증나지만요.”

“그냥 경감이 시키는 대로 대답해줘. 그래야 빨리 나갈 거 아니야.”

“뭘요. 어차피 여기, 제 방보다 침대도 더 좋아요. 가족들이랑 살 때는 침대도 없어서 지푸라기에서 잤는데요.”

케빈은 기지개를 펴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케빈이 중얼거렸다.

“케이 하커가 손을 쓴 거 같죠? 아무래도?”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동작을 멈췄다. 엘리자베스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 하커? 그 남자 이름을 알고 있었니?”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눈을 또르르 굴리며 제 입을 가렸다.

“아 맞아. 자기 얘기 하지 말랬는데.”

케빈은 좋은 아이였지만 촉새였다. 엘리자베스는 입을 가린 케빈의 손을 끌어내리고 말했다.

“무슨 말이야? 케이가 널 보러 왔었어?”

엘리자베스의 다급한 물음에 케빈이 헛기침을 하며 허공을 보았다.

“아뇨?”

“얼른 말해.”

“아, 아니라니까요.”

케빈은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가더니 창가에 붙어 섰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을 노려보며 말했다.

“케빈.”

“저 그렇게 보지 마요.”

케빈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제 눈을 가렸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러자 곧 케빈이 슬그머니 손을 치우곤 시무룩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진짜 얘기하지 말라고 했어요. 진짜요.”

“나도 진짜 내 얘기하지 말랬는데 네가 루이 교수님한테 내 얘길 다 일러바쳤잖아. 빚을 갚을 차례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얼굴을 찌푸렸다.

“칫.”

“빨리.”

“아, 알았어요. 그게…… 케이가 제가 경감한테 얻어맞는 취조실에 들어와서는 경감을 끌고 나갔어요. 갑자기 튀어나와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나 때문에 화가 난 건지 뭔지 들어올 때부터 씩씩거리면서 들어와선 경감을 거의 들어올려서 짐짝처럼 데리고 나가더라니까요. 그러더니 벽이 쾅쾅 울리고 난리가 나고…… 잠시 뒤에 보비들은 전부 나가고 케이 혼자 들어왔어요.”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거지같은 성질머리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개 같은 자식.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미웠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케이는 어린 소년이 얻어맞는 걸 가만 보진 못하는 놈인 것이다.

“그러더니 여동생 면회를 시켜주면서 저한테 앞으로는 공녀님을 도와서 퀴닌을 만들게 될 거라고 하더라구요. 1년만 열심히 하면 교수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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