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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60화 (6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60화

꿈에서 신혼 첫날밤 케이의 목을 물어뜯어버렸던 흰색 괴물이 되어 케이를 죽여버리는 상상은 통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은…….

엘리자베스는 드레스 자락을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엘리자베스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울음소리는 절대로 밖으로 내지 않았다.

결국은 너를 죽여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없는 곳에서 네가 어떻게든 살아 있었으면 좋겠는 것이다.

사랑하면 보답 받고 싶어지는 것이라고 했던 말은 전부 가짜였어, 케이 하커.

사랑하면 눈이 머는 거야. 네가 얼마나 개자식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결국 네가 행복하길 바라게 되는 거야.

내가 그로 인해 저 심연까지 불행해지더라도.

그래. 나는 네가 행복하면 불행해져.

그만큼 네가 미워.

그런데도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래서 나는 나의 불행을 바라게 돼.

이게 내 인생에서 가장 개 같은 부분이야.

“나의 조카야. 얼굴을 들어보아라.”

엘리자베스는 고심하는 척하는 가증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국왕의 목소리에 응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붉은 눈으로 왕을 보았다.

왕이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이런. 얼굴이 엉망이구나. 나의 조카가 겁에 질렸구나. 신사로서 레이디가 이렇게 떠는 것을 가만히 두는 것은 결례다. 케이, 손수건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조카의 눈물을 닦아주어라.”

왕의 말에 케이가 멈칫거리다가 품 안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의 옆에 한 쪽 무릎을 꿇고 그것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손수건을 받아들고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엘리자베스는 살의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 드러냈으나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흉흉한 표정 앞에서도 차분해 보였다.

왕이 말했다.

“불쌍한 것. 네 아비와 어미의 잘못을 알고 있었느냐?”

엘리자베스는 잠시 갈등했으나 단호하게 말했다.

“몰랐습니다. 폐하.”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할 생각은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없었다.

왕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부드럽게 웃었다. 역시나 눈은 웃지 않는 기괴한 웃음이었다.

“그래. 몰랐겠지. 어찌 이런 어리고 힘없는 여인이 제 부모의 모든 잘못을 알고 그것을 계도할 수 있었겠느냐. 그것은 너무 과한 요구이다. 허나—”

왕은 웃음기를 싹 지우고 마지막 말에 강세를 주었다. 그러더니 엘리자베스의 눈앞에 손가락질을 하며 침을 튀기며 말했다. 놀라울 만큼 재빠른 태도 변화였다.

“감히! 짐의 기대를 배신하고 짐의 충실한 백성이었던 로버트 하커의 믿음을 저버린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감히! 감히!”

왕이 얼마나 흥분하였는지 발을 쾅쾅 구르는 통에 엘리자베스가 움찔 몸을 숙였다. 그때,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가 화들짝 놀라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놓았다. 엘리자베스의 한 쪽 눈이 찌푸려졌다. 케이가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베스 역시 고개를 돌렸다.

왕이 말했다. 이번에는 또다시 부드러운 말투였다.

“나의 조카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고 있는가?”

엘리자베스는 이 미친 새끼로부터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며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폐하.”

“그것은 너와 케이의 약혼 때문이었다. 내가 두 가문의 악연을 만들어준 것이다. 내 손으로. 왕족과 평민의 결합을 윤허했기 때문이야.”

왕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밭은 숨을 뱉었다.

“그러니 내 손으로 둘의 악연을 끊어야겠지.”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케이가 아까 했던 말이 이해가 갔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던 말.

케이와 로버트 하커, 그리고 국왕은 이미 많은 것들을 맞춰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공작 부부가 진 빚을 눈치챈 로버트 하커는 원활하게 두 사람 사이의 결혼을 파행시킬 방법을 떠올렸을 것이고, 국왕은 거기에 장단을 맞춰주는 대가로 무언가를 가져갈 것이다.

“불만이 있는가? 나의 조카?”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비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없습니다, 폐하.”

“자네는?”

국왕은 케이를 보며 물었다. 케이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케이의 말에 국왕이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엘리자베스.”

국왕은 이번에는 엘리자베스를 ‘나의 조카’라고 부르지 않았다. 케이에게 했듯 그저 이름을 불렀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국왕이 말했다.

“짐은 너의 재주가 무척이나 아깝다. 불충한 아비와 어미 밑에서 자랐다고는 하나 너의 재주는 신이 내린 것이다. 신의 가루라 함은 원래 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냐.”

“감사합니다, 폐하.”

엘리자베스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니 짐은 너의 재주를 높이 사 너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다. 다만 짐은 너의 이름을 거둬갈 것이다.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가 아니다. 엘리자베스. 짐에게 충성을 다 하지 않은 신하는 왕족의 이름을 쓸 수 없다. 너의 부모는 나의 삼촌이 내린 클레몬트의 이름만은 유지해주되 부정한 재산을 몰수하고 자손에게 자신들의 이름과 작위를 물려줄 권리를 빼앗을 것이다.”

“황송합니다, 폐하.”

엘리자베스는 조금의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국왕은 그런 엘리자베스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너는 이제부터 성이 없는 평민이다. 그러니 너는 평민 여자 최초로 아카데미의 입학생이 되고 졸업생이 되며 학술원의 회원이 될 것이다. 짐이 너에게 베푸는 은혜는 나의 조카가 아닌 나의 백성에게 베푸는 은혜인 것이다. 고개를 들어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단번에 깨닫고 국왕의 신발에 입을 맞추었다. 차가운 국왕의 신발 가죽에서는 역겨운 비린내가 났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았다. 피 냄새였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바다처럼 깊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엘리자베스가 신발에서 손을 떼고 얼굴을 치우자 국왕은 다시 허공에 박수를 쳤다. 그러자 밖에 있던 하인이 들어와 국왕에게 망토를 다시 입혔다. 국왕은 망토를 입으며 케이에게 말했다.

“그리고 로버트에게는 짐이 짐의 권한으로 ‘경’ 칭호를 다시 건의하겠다고 전하게. 쓸모없는 귀족원. 3개월 있으면 의회가 열릴 때이니 이번에는 반드시 로버트의 충심에 레본이 답할 것이야.”

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왕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드립니다, 폐하.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저와 제 아버지가 영적 선물을 준비하였습니다.”

케이는 품 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그러자 하인이 그것을 빨간 쿠션에 받아들고 왕에게 가져갔다.

국왕이 그것을 받아들더니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커 가에서 이번에 사들인 쉐필드 장원 전부입니다. 현재 가치로 따지자면 4만 파운트쯤 됩니다. 폐하.”

4만 파운트.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계속 처박은 채로 케이가 내밀었던 손수건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케이가 말을 이었다.

“땅은 아버지의 선물이고 제 선물도 있습니다. 저는 폐하의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깊은 마음에  감동하여 지금 제 이름으로 되어 있는 공장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공장에는 화학 염료 실험실이 있으니 제약 공장으로 바꾸기도 좋을 것입니다. 폐하. 부디 성왕으로서 치세를 이어가소서.”

케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왕이 대답했다.

“짐은 그대의 선물에 탄복하였노라.”

이번에도 역시 고저가 없는 인위적인 목소리였다.

* * *

국왕이 나가고 나서 알현실에 들어온 것은 두 명의 보비였다. 엘리자베스는 순순히 그들의 손에 이끌려 경찰청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1만 명의 군중은 보비들에게 썩은 계란이나 과일 껍질을 던졌다. 분명 보비에게 던진 것이었으나 그 일부는 엘리자베스에게도 던져졌다. 엘리자베스는 몸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를 맡으며 검은 마차에 올랐다.

엘리자베스가 탄 호송용 마차 뒤로 마차 한 대가 더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요란스러운 목소리로 그 마차에 타는 것이 누군지 알았다.

“놓지 못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다니! 나는 국왕 폐하의 사촌이다. 폐하께서 너희들을 용서치 않으실 것이야!”

“당신은 지금 반역죄로 호송되고 있는 것이오!”

“반역죄? 반역죄라니!”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반역이라니. 엘리자베스는 아까 알현실에서 들은 것과도 말이 달라지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관자놀이를 쥐고 덜컹거리는 호송용 마차에서 토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보비들 중 누군가를 물어버리고 도망가지 않으려고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마차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창문이 없는 호송용 마차 문에 기대었다.

“공녀님! 공녀님! 가지 마세요!”

“천벌을 받을 거야, 나쁜 놈들!”

“감히 우리 공녀님을 데려가다니! 더러운 보비들!”

“제발, 저희에게도 신의 가루를 나눠주세요. 제발!”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 뺨으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느꼈다. 클레몬트라는 이름에 아쉬움이 남아서 우는 것은 아니었다. 케이와의 결혼이 깨졌기 때문에 우는 것도 아니었다. 케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전생에서나 이번 생에서나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이 비굴해서 울고 있는 것이었다.

‘뭐든지 지금 물어봐. 이게 마지막이 될 테니까.’

그게 마지막이었다니.

그랬다니.

그랬다면 엘리자베스는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고.

너를 무척이나 사랑했으니까 잊지 말라고.

나는 이 사랑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말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라도 케이의 기억 속에 자신을 심어줬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 속에서 엘리자베스가 보비의 억센 손에 이끌려 마차 밖으로 나갔을 때는 경찰청 앞에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해 있었다.

“다들 언제 여기까지…….”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듯 보비들 근처로 용감하게 걸어온 젊은 여자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저희 전부 마차를 따라왔어요. 공녀님, 이것 좀 드세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갓 구운 스콘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두 팔이 보비에게 잡혀 있어 그것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여자의 눈빛만큼은 끝까지 마음에 담았다.

여자가 군중 속으로 떠밀려가며 소리쳤다.

“공녀님! 저희에게 신의 가루를 허락해주세요!”

여자가 엘리자베스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즈음, 보비들과 엘리자베스의 머리 위로 전단지가 꽃가루처럼 흩날렸다.

-보통 선거! 비밀 선거! 아동 노동 금지!

전단지를 뿌린 검은 모자를 쓴 남자들은 유유히 군중들 사이로 흩어졌다.

“전단지 줍지 마! 주우면 체포한다! 이 쥐새끼 같은 것들! 당장 저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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