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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59화 (5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59화

엘리자베스의 말이 끝나고 오랫동안 알현실에는 벽난로가 타는 소리만이 들렸다. 타닥타닥—

엘리자베스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국왕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고개를 들어보라.”

국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

“고개를 들어보라, 짐이 말하였다.”

국왕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왕을 보았다. 그러자 여전히 얼굴에 표정이 없는 왕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꼬리를 씰룩거리지도, 눈을 찌푸리지도 않으며 국왕이 말했다.

“흠.”

그것은 진짜로 고민을 하는 신음소리라기보다는 초상화 속 모습으로 앉아 있기 위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듯, 국왕이 제 고민을 표출하기 위해 연출한 소리 같았다.

“나의 조카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엘리자베스는 국왕의 질문 앞에 잠시 얼어붙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국왕이 엘리자베스가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볼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대답이라면 여러 가지를 생각해놨다. 그러나 반대에 대한 대답이라면……. 대체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 것일까?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물었다. 그러자 국왕이 덥석 엘리자베스의 뺨을 그러쥐었다.

“왕 앞에서는 감히 치아를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 행동이 우악스럽고 재빨라 엘리자베스는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엘리자베스는 치욕스러운 기분으로 국왕을 보았다. 그러나 국왕은 엘리자베스의 뺨을 그러쥐고 맘대로 훈계하는 상황에 대한 어떠한 우월감도 없이 그저 불쌍하고 어린 학생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처럼 표정을 지었다.

국왕은 천천히 엘리자베스의 뺨을 놓아주며 말했다.

“식사 자리에서도 말을 할 때도 담배를 피울 때도 왕 앞에서는 치아가 너무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폐하.”

엘리자베스는 왕이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입모양으로 말했다.

‘개자식.’

그렇게라도 욕을 뱉고 나니 그나마 머릿속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내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그저 권력을 가진 개자식일 뿐이야.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은 명징해졌다. 제 아무리 국왕이라고 해도 공녀를 제 멋대로 처형할 수는 없었다. 그 공녀가 시민들의 영웅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저 밖에 있는 군중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윌리엄 조쉬의 말에 따르면 그런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에게 지금 이 자리는 적어도 목숨을 구걸하는 자리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협상 테이블에 가깝지.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거기에는 가련한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왕이라는 자리에 심취해 자신의 인생을 왕이라는 자리와 동일시해버린 남자. 그는 왕이라는 틀을 벗어난 자기 자신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차분하게 자신의 조건들을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그 후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제가 퀴닌을 대중적인 약으로 만들어 팔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초기 투자비용 4만 파운트의 현금과…….”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거센 심장 소리가 왕에게 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제 이름을 원합니다. 과학자로서의 제 이름이요.”

엘리자베스는 최대한 침을 삼키지 않으려고 참았음에도 말이 거기까지 이르자 침을 꿀꺽 삼켰다.

“……왕립학술원에 바로 이름을 싣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른 재능 있는 학생들처럼 저도 아카데미에서 배울 수 있게 해주세요. 제가 아카데미에서 배우고 졸업할 때 학술원 회원들 다수의 인정을 받으면 다른 남성 과학자들이 그러하듯 학술원에 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게 해주세요.”

엘리자베스는 자꾸만 메마르는 입술에 침을 바르려는 제 혀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그때가 되면 엘리자베스 경이라고 불릴 수 있게 허가해주세요.”

엘리자베스는 말을 마치고 왕을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감히 왕 앞에서는 치아를 보이는 게 아니라는 말을 무시하며 똑똑히 말했다. 뺨 한 대 정도는 내주어도 좋다는 각오였다.

“제가 폐하의 윤허하에 최초의 여자 과학자로 이름을 올리고, 좋은 제약회사를 만나 퀴닌 개발에 앞장서면 폐하께서는 저를 가지시게 되는 겁니다. 궁 밖에 있는 저들도, 저들의 고용주인 신흥 사업가들도, 귀족들도, 교회도, 신도 아닌 국왕 폐하께서 저를 가지시는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제 아버지가 그랬듯 거센 손바닥이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강타할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말은 해야 했다.

국왕은 지금 교회와 귀족, 신흥 사업가들과 동맹을 맺고 궁 밖에 있는 저들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국왕은 저들 위에 군림할 권리를 교회와 귀족, 신흥 사업가들과 다투고 있는 것이다.

왕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지 오래였고 부르주아들과 귀족, 교회는 그런 왕정을 도와주겠다며 손을 내밀고 왕정의 힘을 나눠가지려 들고 있었다. 국왕은 수세에 몰려 있었다.

국왕이 엘리자베스의 뺨은 몇 대 칠지 몰라도 그런 상황조차 파악이 안 될 리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국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국왕은 엘리자베스를 때리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무슨 말이라도…….’

엘리자베스가 점차 초조해지는 기분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국왕이 허공에서 박수를 쳤다.

짝!

그 소리에 엘리자베스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제 뺨을 때리는 소리인 줄 알았던 탓이었다.

국왕은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발발 떠는 것을 보며 또 다시 짧게 웃었다. 두 번째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웃음 소리였다. 국왕은 한참을 또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다가 크게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라.”

문어체로 한 그 말에 알현실 입구가 아닌 다른 쪽 문이 열렸다. 그 문틈으로 연결된 다른 방이 보였다.

위엄 있는 기사 두 명이 그 문을 지키고 서 있었는데, 그 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는 케이 하커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를 보며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케이가 천천히 들어오더니 국왕의 앞에,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옆에 서서 말했다.

“폐하.”

케이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잠시 맞닿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에 담긴 번뜩임을 보고 몸을 움츠렸다. 국왕은 엘리자베스에게 했던 것처럼 몇 마디 대답조차 해주지 않고 케이에게는 조용히 시선만을 보냈다. 그러곤 말했다.

“케이. 옆방에서 나의 아름다운 조카의 말을 들었느냐?”

국왕은 케이를 제 시녀처럼 이름으로 불렀다. 국왕의 말에 케이는 대답했다.

“예, 폐하.”

“어떻게 생각하느냐?”

국왕의 말에 케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폐하.”

“나의 조카가 나에게 4만 파운트와 아카데미에서의 이름을 요구한 것 말이다. 너의 아버지는 레본에 엄청난 돈을 가져주었음에도 여전히 ‘경’ 칭호를 받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쓸모없고 뚱뚱하기만 한 귀족들이 차지한 의회의 자리 때문이지.”

국왕은 쓸모없고, 뚱뚱하다, 라고 말할 때는 침을 튀겨가며 분노한 말투였으나 표정만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엘리자베스는 국왕과 케이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잠자코 들으면서 불안감에 떨었다. 엘리자베스가 힐끗 케이를 다시 올려다보았을 때 케이는 차가운 눈으로 국왕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그것이 클레몬트 공작가의 요구사항이라면…….”

엘리자베스는 들어올 때만 해도 공손했던 케이의 몸짓이 묘하게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권위적이고 딱딱한 그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손동작은 어디서 본 것 같으면서도 케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고개를 다시 내렸다.

케이가 말을 이었다.

“배은망덕하기 그지없지요. 하커 가문에서 그들이 가져간 돈과 공장, 그리고 몇 가지 이득을 다 계산해본다면 4만 파운트를 또 요구하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일입니다. 하커 가문은 언제나 투명하게 레본의 위대한 국왕 폐하께 기쁜 마음으로 세금을 내고 있지만 클레몬트 공작가는 다르지 않습니까.”

배은망덕. 그 네 글자를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깨달았다.

케이가 지금 흉내 내고 있는 몸짓과 눈빛, 표정이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지.

바로 엘리자베스였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말투를 흉내 내듯, 케이가 지금 엘리자베스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클레몬트 공작가에서 쉐필드에서 거둔 세금 중 폐하께 바칠 몫을 무려 20년간 착복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여기저기서 빚을 져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폐하.”

“폐하……!”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말을 막기 위해 목구멍에서 겨우겨우 소리를 내었을 때 케이가 더 큰 목소리로 엘리자베스의 말을 막았다.

“제 아버지와 저는 제 약혼자의 가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그분들을 좋은 말로 설득도 해보았습니다만 그게 잘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폐하에 대한 충심이 깊은 제 아버지께서는 클레몬트 공작 부부께 몇 번이나 돈을 빌려주며 세금을 내고 남은 것으로 건전한 생활을 이어가실 수 있도록 하려 하였으나 그마저도 공작부부는 전부 도박으로 탕진하였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으로 케이의 말을 들었다.

이걸 운명이라고 부르기엔 그마저도 너무 사치스럽지 않나. 케이는 결국 또 클레몬트 공작 부부를 배신하고, 엘리자베스를 배신하고 있었다.

나를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너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해도,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파멸의 강이 흐르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쥐었다.

“이런. 이런. 공작 부부의 만행에 대해서는 사실 나도 들은 바가 있었느니라.”

엘리자베스는 고저가 없는 국왕의 말에 고개를 들어 국왕의 표정을 보았다. 슬프다는 듯이 눈매가 내려갔지만 역시 눈빛만은 조금의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모두 짜여진 연극이었다.

엘리자베스를 두고 지금 이 두 개 자식이 연극을 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당장 제 앞의 두 개 자식의 목을 조르고 도망갈지 말지를 고민했다.

나가는 길에 기사들에게 내장이 꿰인다고 해도 아깝지 않은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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