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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58화 (58/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58화

케이는 평소와는 달리 대답을 망설이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케이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뒤쪽에서 걸어오는 누군가를 응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바보 같은 질문이군. 또. 또 말이야.”

케이는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으로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채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랑하지 않아.”

“진짜로?”

“바보 같은 질문 두 번 답하게 하지 마. 그리고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툭 쳤다.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았다. 거기엔 클레몬트 공작과 국왕 레트니가 케이와 엘리자베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로버트 하커가 서 있었다.

귀족들은 영적 선물 증정을 끝내기도 전에 단상에서 내려온 국왕과 엘리자베스를 번갈아보며 시기의 눈빛을 보냈다. 엘리자베스는 공작의 환한 미소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등을 받치며 말했다.

“가지고 싶었던 걸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지. 이제부터는 네가 가지고 싶은 걸 가지게 될 거야. 그게 네 이름이든, 과학자로서의 명예든…….”

케이가 엘리자베스 쪽으로 더 고개를 숙여 나지막이 말했다.

“행방불명된 엘우드 밀이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뒤를 돌았다. 그리고 빨갛게 핏줄이 선 눈으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너……!”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답구나, 나의 조카.”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돌려 레트니를 보았다. 레트니를 보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재빨리 드레스 자락을 올리며 천천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국왕의 눈 밖으로 벗어나 케이를 끌고 나가서 심문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꾹 참고 말했다.

“폐하, 이름날을 축하드립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레트니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레트니의 미소에는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레트니의 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여전히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고 입매만 말려 올라가며 웃었기 때문이었다.

레트니가 옆에 있는 클레몬트 공작에게 뭔가를 속삭일 때도 비슷했다. 클레몬트 공작에게 뭔가를 속삭이기 위해 레트니는 공작에게 시선을 보냈다. 레트니의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고 그의 눈동자만 움직였다. 마치 궁 안의 초상화 속의 위대한 레본의 왕 모습 그대로를 구현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클레몬트 공작은 레트니의 옆에 고개를 숙였고 그러자 레트니가 뭔가를 말했다. 클레몬트 공작이 굽실거리며 레트니의 말을 듣더니 헛기침을 하며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너에게 그렇게 큰 재주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하시는구나, 엘리자베스.”

공작은 국왕의 칭찬이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대답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집을 나오고 처음 대면하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첫마디는 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국왕의 전언을 듣는 신하에게 하는 말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말을 찾아 헤매는 사이 공작은 느릿하게 엘리자베스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살피다가 고개를 돌려 케이 하커를 보았다.

공작이 간신히 표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서는 평민에 대한 구역질 같은 감정이 밀려나왔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공작을 보며 제 스스로에게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는 아버지가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공작이 이런 상황에서 케이와 자신을 노려보았다면 원래의 엘리자베스는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몰랐을 테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아버지가 창피했다.

아버지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귀족으로서의 쓸데없는 우월감과 평민을 깔아뭉개지 못해 안달 난 표정, 그러면서도 국왕 폐하 앞에서는 쥐처럼 옹송그린 자세. 엘리자베스는 그 모든 것을 케이 하커 앞에 드러내는 것이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케이는 자연스럽게 예를 갖추며 국왕 폐하와 공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국왕은 망토 자락을 정리할 뿐 평민의 인사에는 약간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투였다.

다만 공작은 조금 달랐다. 그는 케이를 노려보다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레트니가 망토 자락을 잘 정리해 손에 쥐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공작은 그런 레트니 옆에 딱 붙어서 레트니와 함께 예배당 단상 위로 올라갔다.

엘리자베스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단상 아래로 내려왔던 국왕과 공작이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떠난 이 상황을 이해 못 하고 있는 사이에 뒤에 있던 로버트 하커가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왔다. 로버트 하커는 케이를 보며 흐뭇하게 웃다가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가늘게 뜬 눈에서는 평소 가식적이나마 다정한 척을 하던 로버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냉랭함이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국왕께서 예배가 끝나고 알현실에서 뵙길 원하십니다.”

“어째서요?”

“어째서긴요. 지금 공녀님의 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공녀님께서 가진 재주가 탁월하시다고는 하나 국왕 폐하께서는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머리를 숙여 그분의 자비를 구하세요.”

로버트의 말이 엘리자베스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해? 그럼 퀴닌 개발에 국왕의 재가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머리를 숙여 자비를 구하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였다. 로버트가 부드럽게 엘리자베스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오늘 폐하께 바치실 영적 선물은 알현실에서 따로 받겠다고 하십니다. 공녀님.”

선물이라고?

엘리자베스는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은 자신의 빈손을 보았다. 로버트는 엘리자베스에게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케이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케이가 로버트를 따라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홀로 남겨진 채로 단상 위에서 무표정하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국왕을 바라보았다.

“짐은 그대의 선물에 탄복하였노라. 다음.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렌필에서 온 멜린타노 경, 짐은 그대의 선물에 탄복…….”

흰색 망토를 길게 늘어뜨린 채 귀족들이 진상하는 선물을 받는 국왕과 그 옆을 지키는 주교. 그 모습은 무척이나 인위적이고 평화로웠다. 마치 쉐필드처럼.

엘리자베스는 무너지듯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돌아온 세계가 어떤 곳인지, 어떤 곳이었는지 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짐은 그대의 선물에 탄복하였노라. 다음.”

* * *

알현실에 들어온 국왕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앉아 있는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다가 제 망토를 잡아주는 하인을 보며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나가게.”

그 말을 들은 하인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국왕은 하인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 들어온 공작 부부를 가만히 보았다. 그러자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국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높낮이가 없는 어조였다. 사람이 아니라 기계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공작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공작 부부는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엘리자베스와 국왕만이 남았다.

엘리자베스는 국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벽지만을 보며 허리를 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국왕은 엘리자베스의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엘리자베스가 앉은 자리 옆을 천천히 걸어서 등받이가 있는 소파에 앉았다. 왕궁에서 등받이가 있는 소파에 앉을 수 있는 것은 국왕뿐이었다. 국왕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도 불편하리만큼 목을 꼿꼿이 세우고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오랜만이구나, 나의 조카.”

“네, 폐하.”

폐하라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로버트 하커와 케이는 어디로 간 걸까. 그 수많은 평민들은 아직도 저 궁 밖에 서서 떨고 있을까?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신의 가루를 발명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인가?”

발명이 아니라 합성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버트 하커가 엘리자베스에게 자비를 빌라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나 자꾸만 긴장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엘리자베스의 말에 왕이 웃었다. 아니, 그게 웃음이라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몇 초 뒤에서야 깨달았다. 국왕의 웃음소리는 뭐랄까, 짐승들이 터트리는 신음소리 같았기 때문이었다.

국왕은 엘리자베스의 굳은 얼굴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30초 쯤 계속 웃음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인간이 신의 가루를 만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의 조카는 어리석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국왕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퀴닌은 선교사들이 이민족들의 땅에 선교를 하러 갔다가 학질에 걸려오는 일이 잦아지자 치료법을 강구하던 교회가 이민족들의 땅에서 발견한 나무껍질에서 발견된 자연 물질이었다. 퀴닌이 발견되면서 선교사들은 선교라고 쓰고 살육이라고 읽는 항해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교회는 퀴닌을 ‘신의 가루’라고 부르며 신이 레본의 선교 활동을 돕기 위해 내려주신 은총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물론 그 뒤에는 국왕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감히 네가 레본의 왕과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냐. 국왕은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당장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빌어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음은 내 차례겠죠. 그렇게 말하던 소년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엘리자베스가 물러나면 다음은 그 소년, 그리고 또 그 다음은 다른 누군가의 차례였다. 그 누군가는 과학도를 꿈꾸는 다른 여자일 수도 있고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인기 여가수일 수도 있었다. 그게 누구든 엘리자베스가 도망치면 그 다음은 그 사람의 차례였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던 케이의 말을 떠올렸다. 여자 귀족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도.

엘리자베스는 국왕을 보았다. 아까 웃던 사람은 어디로 가고 레트니의 얼굴에는 초상화 속 국왕 같은 무표정만이 떠올라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두려움이 몸을 감싸기 전에 국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 기회를 주시면 제가 퀴닌으로 레본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폐하.”

엘리자베스의 말에 국왕이 높낮이가 없는 어조로 말했다.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퀴닌이 국왕에게 도움이 될 요소는 많았다. 성난 민심을 가라앉힐 수 있었고, 초기 투자비용을 감수하고 잘 팔면 결국엔 토닉워터 같은 건강 음료로 대중화 되어 큰돈이 될 수도 있었고, 자연 물질보다 학질 치료율이 높은 인공 합성 퀴닌으로 항해가 더 활발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 모든 말들 중에 가장 국왕에게 듣기 좋은 말을 찾아 헤맸다. 국왕의 귀에 쏙쏙 꽂힐 말을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를…… 저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폐하. 폐하의 영명 축일 선물로 저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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