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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57화 (5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57화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는 해? 아니, 알고도 한 짓이야?”

엘리자베스는 엄숙한 표정으로 찬송을 따라부르는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케이 하커에게 물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 쪽은 보지도 않고 정면만 응시하며 말했다.

“뭘.”

그때, 뒤에서 문이 끼익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윌리엄 조쉬가 들어왔다. 엄연히 조쉬 가문의 상속자인 그는 귀족들의 대열에 껴서 두 사람의 앞에 자리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신문 말이야. 내 기사.”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능글맞은 표정으로 웬 귀부인의 옆에 앉아 찬송을 시작하는 윌리엄 조쉬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 그거. 네 바람둥이 한량 친구가 그런 것도 가르쳐줬나 보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려 케이를 보았다. 당장이라도 케이를 깔아뭉갤 수 있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녀석의 얼굴이 초췌했다. 며칠은 밤을 샌 것처럼 피부는 까칠하고 눈 밑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수염을 다듬은 기색도 없었다. 퀭한 얼굴에 눈빛만은 날카롭고 사납게 솟아 있었다.

대체 왜 화가 난 거야?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여기면서도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윌리엄 경에게는 출판계 인맥이 있어.”

“윌리엄 ‘경’에게는 없는 인맥이 없겠지.”

케이가 유독 ‘경’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엘리자베스를 돌아보았다. 하루 만에 살이 빠진 것처럼 보이는 케이의 얼굴에는 날카로움이 감돌았다. 갈색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정돈되어 있었고, 그의 목에는 그가 언제나 ‘개줄’이라고 말하며 거부해왔던 작은 타이가 배달려 있었는데도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삐딱함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기운을 뿜어냈다.

케이가 말했다.

“저 한량 놈이 얼마나 소중했으면 우리 불쌍한 케빈을 길바닥에 버리고 갔더군. 아침부터 저 작자의 집에 가느라 말이야.”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의 오전 행적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 말했다.

“케빈을 봤어? 어디에 있어?”

“잘 있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대답에 주먹을 꽉 쥐었다.

찬송이 멈췄다. 수도자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상 아래에 자리했던 주교가 단상 위로 걸어갔다. 자주색 정례복을 입은 주교와 하얀 색에 금박 무늬가 들어간 망토를 걸친 국왕은 무척이나 대비되어 보였다.

주교가 입을 열기 전, 그 자리의 모든 귀족들 역시 수도자들을 따라 일어났다. 엘리자베스와 케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우리는 그레이트 레본의 레트니 국왕 폐하의 영명 축일을 기념하여 모였습니다.”

주교의 설교가 시작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1열에 앉은 아버지와, 그 옆에 있는 로버트 하커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로버트 하커가 아버지의 옆에 앉았을까.

저번 생에서는 로버트 하커가 아무리 클레몬트 가문의 사돈이 될 사람이라고 해도 귀족들의 앞에 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다를까.

엘리자베스는 교회 천장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그 위로 바람이 불어 소리가 날 때마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움츠렸다. 총 소리는 아닐까, 하여.

“네가 대체 왜 그런 건지 몰라도 나 때문에 지금 리오든이 엉망이 됐어.”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두 손을 모았다. 레트니 클레몬트 국왕의 영명인 쉴로모를 위해 기도하자는 주교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케이도 고분고분히 두 손을 모으고 나지막이 말했다.

“……리오든은 원래부터 엉망이었어.”

케이가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살짝 곁눈질로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케이는 서둘러 고개를 치우고 말했다.

“곱게 자란 공녀님만 몰랐을 뿐이야.”

모두들 착석하라는 주교의 말을 듣고 케이와 엘리자베스는 귀족들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주교의 기나긴 설교가 시작되었다. 과거 신의 백성들이 세운 나라였던 두메로에서 성왕이었던 쉴로모가 두메로의 장벽을 넘어오려는 12 악마들을 물리친 이야기였다.

“12 악마들은 두메로 장벽 너머의 솔름으로 흘러들어가 솔름의 소와 말을 살찌게 하였습니다. 기름진 소를 먹고 살찐 말을 탄 솔름의 전사들은 12 악마 중 소의 형상을 한 악마를 몰록이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몰록은 솔름어로 ‘왕’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된 왕이었습니다. 진정한 장벽 안의 왕과는 다른 거짓 왕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장벽 안의 왕에게 장벽 밖의 거짓 왕에 대해 꿈속에서 전언하셨습니다…….”

주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소의 형상을 한 악마, 몰록.

엘리자베스는 이미 몰록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렇게 새롭게 들으니 이상한 전율이 몸속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몰록이 솔름어로 ‘왕’이라는 말이었구나. 그건 모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앞자리에 살짝 몸을 기대었다. 단상 아래에서 기수가 들고 있는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만들어진 레본의 국기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그 손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말했다.

“나는 저 사람들을 구할 힘이 없어. 그런데 어쩌자고…….”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자 케이가 물었다.

“저 사람들?”

“그래. 컬로든 궁 앞에 모인 저 사람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너한테 저 사람들을 구하라는 말은 안 해. 너는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숨이 가빠오는 것을 가까스로 삼키며 물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뭔데.”

“과학자가 되는 거.”

엘리자베스는 손 사이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케이를 보았다. 그러나 케이 역시 엘리자베스처럼 제 손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엘리자베스를 보지 않고 있었다. 대신에 조용히 덧붙였다.

“멜니아로 도망가지 않고 이오페아에 남는 거. 이오페아에 남아서 엘리자베스 하커가 아닌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로 사는 거. 그리고…….”

케이는 무슨 말을 덧붙이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이내 고집스럽게 턱을 악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난리가 났는데, 저 사람들을 엘리자베스가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레트니 쉴로모 클레몬트.

엘리자베스는 단상 위에 올라서 주교의 말을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는 국왕을 보았다.

제 삼촌뻘이었으나 단 한 번도 가족이라고 여겨본 적은 없는 남자. 저 남자가 저 밖의 사람들을 책임진단 말인가? 컬로든 궁이라는 장벽 속에 숨어 배고픔과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은 돌볼 생각도 없는 장벽 속의 왕이?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쉴로모는 원래 성인이 아니다.

그는 그저 성경 속에 나오는 풍요로운 시대를 이끌고 전쟁에서 잔인하게 이민족을 살해한 왕에 불과했다. 그러니 원래는 국왕 레트니의 영명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레트니는 10년 전, 스스로 쉴로모를 제 영명으로 삼았다.

정교분리를 위해 레본의 왕들은 몇 대에 걸쳐 영명을 없앴으나 레트니는 선교사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영명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그 영명이 바로 쉴로모였으니, 교회는 그때까지는 성인이 아니었던 쉴로모를 억지로 성인명부에 올렸다.

성인이 아닌 성인. 이민족을 박해하며 신의 이름을 이용한 장벽 안의 왕.

당시에는 논란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쉴로모만큼 국왕 레트니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없었다. 그런 레트니가 컬로든 문 밖에 모인 이들을 어떻게 달래고 해산시킬 것인가. 그 방법이야 뻔한 것이었다.

‘레트니가 아니라면…….’

멜니아 중앙 정부인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단호하고 고집스러운 옆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윌리엄 조쉬의 말대로 케이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 나라를 삼키고 싶어 하는 사업가에 불과할까? 엘리자베스는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자신의 판단에 자신을 잃었다.

케이에게는 그런 지점이 있었다. 도무지 모르겠는 지점. 케이라는 사람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도 돌아서면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것 같은 부분 같은 것.

엘리자베스는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과학자가 돼. 나는 여자고, 귀족이야.”

“여자 귀족도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아. 이를테면…….”

케이가 말끝을 흐리는 사이, 주교가 설교를 마쳤다. 귀족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왕께 영적 선물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각자 준비한 선물을 예배당 밖에 있는 하인으로부터 전달 받거나 혹은 작은 선물일 경우 빨리 줄의 앞자리에 서려고 서둘러 중앙으로 걸어갔다. 국왕 폐하를 알현하고, 왕비에게 데뷔탕트에 참가할 기회를 허락해 주십사 살랑거리는 것, 그것이 여기 모인 귀족들 대부분의 목적이었으니까.

케이는 다소 우악스럽고 다급한 귀족들의 움직임에 엘리자베스의 어깨가 부딪히지 않도록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안긴 채로 케이가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세상을 바꾸는 일 같은 거.”

‘엘리자베스. 인기 여가수도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아요. 이를테면…… 세상을 바꾸는 일 같은 거요.’

엘리자베스는 앰버 플래스가 전생에서 자신에게 했던 말을 케이가 그대로 따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반대로 말해야 맞을 것이다. 앰버가 케이의 말을 따라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세상을 바꾸는 일에 가슴이 뛰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이 와중에도 케이와 앰버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자신의 허리를 감싸안는 케이의 친밀한 행동이 얄밉기도 했다.

모든 게 이렇게 꼬여가다니. 엘리자베스는 가슴 깊숙이 이는 크나큰 충동을 느끼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의 몸에서는 짙은 담배 냄새가 났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감싸 안은 채로 엘리자베스 너머를 응시하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뭐든지 지금 물어봐. 이게 마지막이 될 테니까.”

마지막이라니. 어떻게 마지막이 된단 말인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조끼 자락을 꽉 쥐고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아직도 날 사랑하지 않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케이의 갈색 눈동자에 작은 동요가 퍼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니라고 말해. 아니라고 말하면…… 그러면……. 지금 당장 모든 비밀을 말하고 함께 해결하자고 말할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위험한 충동이 제 몸 안에 꾸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리오든이 변하고 있듯, 엘리자베스도 변하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가는 것은 지긋지긋하다고 그녀는 그리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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