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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56화 (5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56화

건너편에 있던 보비들 몇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엘리자베스는 보비들이 차고 있던 총검이 아이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윌리엄의 품에서 벗어나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이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돌아가!”

소년은 녹내장인 듯 탁하게 변한 왼쪽 눈을 가지고 있었다. 제게 오는 보비들을 보지 못한 듯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뻗었다.

“당신이 신의 가루를 만들었나요?”

엘리자베스는 뒤쪽에서 당장이라도 소년을 찌를 기세로 다가오는 보비들을 보며 소년의 손을 잡았다. 차라리 잡아서, 제 옆에 붙여 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보비들은 결코 엘리자베스를 찌를 수 없을 테니까. 여러 이유로.

엘리자베스는 소년의 손을 쥐고 자신의 가슴께까지 오는 소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다들 웅성거리는 거지?’

엘리자베스는 포식자 앞에 선 다람쥐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장 저 운집한 군중들 사이에서 돌이 날아오고, 그 돌을 맞은 보비가 군중들에게 총을 쏘면 그대로 이 컬로든 궁 앞은 피바다가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선 위험한 혁명가들의 눈을 보았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피부가 트고 손가락 사이사이 때가 끼어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 학습 받지 못한 눈이었다. 무지가 낳은 용맹인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용맹함이 주는 공포에 몸을 움츠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소년의 어깨를 쥐었다.

“제발 돌아가…… 왜 이런 곳에 온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소년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우리 엄마가 아파요. 학질이래요. 우리 엄마뿐 아니라 삼촌도 학질로 죽었어요. 엄마도 삼촌처럼 죽을 거예요. 그러고 나면 다음은 내 차례겠죠.”

다음은 내 차례겠죠.

엘리자베스는 소년의 말을 듣는 순간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띵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한쪽 눈이 뿌연 소년을 뒤에서 다가오던 보비가 훌쩍 들어올렸다. 보비는 짐짝처럼 소년을 경비선 안으로 집어던져버렸다.

엘리자베스가 보비의 폭력적인 행동에 항의하려는 순간, 윌리엄 조쉬의 우악스러운 손아귀 힘이 엘리자베스의 팔뚝을 쥐고 들어올렸다.

“일어나요. 쇼는 거기까지면 됐어요.”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손에 들려서 일어났다. 조쉬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조쉬의 눈을 보며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조쉬에게 묻는 동안에도, 조쉬의 손에 이끌려 컬로든 궁 안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엘리자베스는 지나치는 모든 평민들의 눈에서 다음은 내 차례겠죠, 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무지했기 때문에 여기에 모인 게 아니야…….

알기 때문이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음뿐이라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죽음이 주는 용기를 경험해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이들의 용기가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지를.

조쉬가 말했다.

“무슨 말이긴요. 지금 평민 소년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을 일간지 중 3곳은 찍었을 거예요. 내일 아침이면 대서특필 되겠죠. 왕족이 평민 앞에 무릎을 꿇다! 모두들 당신에게 여신이라도 바라보듯 경배하는 표정을 보내는 것 못 봤어요?”

“언제요?”

엘리자베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조쉬를 따라 컬로든 궁 앞의 정원을 걸었다.

일반적인 국왕의 탄신연이라면 정원 앞에서 한참동안 수다를 떨다가 알현실이나 외부 테라스에서 폐하께 순서대로 선물을 바치는 식으로 진행되었을 테다. 하지만 오늘은 폐하의 이름날이었으므로 귀족들은 경비병의 안내에 따라 착실하게 컬로든 궁 내부의 예배당으로 모여들었다.

엘리자베스와 윌리엄 조쉬 역시 예배당으로 가는 회랑을 걷는 귀족들의 무리에 섞여 있었다. 윌리엄은 귀족들이 엘리자베스를 힐끔거리거나 제게 인사하는 것을 무시하고 거대한 기둥 뒤로 엘리자베스를 잡아끌었다.

엘리자베스는 아까부터 무례하기 그지없는 윌리엄의 행동에도 화를 낼 겨를이 없었다. 방금 보았던 광경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기묘한 짜릿함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윌리엄이 말했다.

“엘리자베스. 정신 차려요.”

윌리엄도 엘리자베스의 광적인 몰입을 눈치챈 듯이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세게 쥐었다 놓았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을 보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젠장…… 젠장할……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윌리엄이 어두운 눈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케이 하커 씨가 왜 이런 짓을 한 거 같소?”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몰라요. 난 아무것도 모른다구요!”

엘리자베스가 윌리엄을 노려보았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실타래가 엉키다 못해 그냥 하나의 뭉치가 되어 다시는 풀리지 않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윌리엄이 말했다.

“케이 하커가 멜니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나? 그의 사업이 멜니아 중앙 정부랑 관련이 있다는 건? 그걸 연결해준 게 앰버 플래스라는 건.”

윌리엄이 엘리자베스가 알지 못하는 문장들을 쉼 없이 뱉으며 엘리자베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진짜 엘리자베스가 뒤로 숨겨놓은 진실이 없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취조라도 당하는 듯한 느낌에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의 말의 의미를 천천히 곱씹을 새도 없이 윌리엄의 정강이를 세게 발로 차버리고 뒤로 물러났다.

“윽!”

윌리엄이 신음을 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 탓에 회랑이 울렸고 몇몇 귀족들이 엘리자베스와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몰라도 똑바로 말해요. 빙빙 돌려가며 사람을 바보 만들지 말란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차가운 눈동자로 윌리엄을 내려다보았다. 윌리엄이 쿡쿡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정말 재밌는 여자야. 정말 재밌다고.”

“닥쳐요, 윌리엄 경.”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은 정강이에 새겨진 발자국을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재밌지 않나? 아버지는 이 나라에 전쟁을 가져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들은 이 나라에 민주주의를 가져올 준비를 하고 있다니. 어쩌면 그 둘의 목적은 결국 같은 걸지도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 나라를 삼킨다.”

“무슨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더 이상 예의 따위 갖추지 않고 말하자 윌리엄이 말했다.

“로버트 하커가 전쟁 준비를 한다는 증거를 잡기 위해 자금의 흐름을 찾아가다보니 케이 하커가 멜니아에서 사업을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됐소. 근데 그게 멜니아 중앙 정부가 관련이 되어 있다는 거야. 멜니아 중앙 정부가 왜, 뭣 하러 리오든 사업에 돈을 대겠소. 그것도 하필 왕정과 친밀한 하커 가의 사업에. 이유야 뻔하지.”

윌리엄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종이 쳤다.

“예배가 시작됩니다.”

어린 부제가 작은 종을 들고 문을 잡고 말했다. 그러자 밖에서 떠들던 몇 남지 않은 귀족들도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던 윌리엄이 말했다.

“멜니아는 이오페아의 왕정을 지독히도 싫어하지. 당연하잖소. 관세도 제 멋대로 매기고 뒷돈은 돈대로 처먹는 왕정을 좋아할 리가. 그러니 멜니아는 리오든에 ‘그걸’ 수출하고 싶은 거야.”

“그거?”

엘리자베스의 눈이 흔들렸다. 윌리엄이 말했다.

“민주주의.”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목덜미가 쭈뼛 섰다.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한 뼘 거리만큼 가까워진 윌리엄을 두 주먹으로 밀쳐냈다. 이번에는 타격감이 제대로 실렸는지 윌리엄이 컥컥거렸다. 윌리엄이 기침을 켁켁거리는 통에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안쓰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 교활한 사기꾼에게 느낄 동정심도 아깝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이 얘길 나한테 해주는 저의가 뭐예요. 말해요.”

“질문이 잘못 됐잖소. 아까는 하지 않고 지금은 하는 저의가 뭔지를 물어야지.”

엘리자베스는 제 몸 안에서 엄청난 힘이 움트는 것을 느끼며 가까스로 자제하고 말했다.

“말해.”

엘리자베스가 나지막이 말하자 윌리엄이 움찔 뒷걸음질 쳤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힘이 너무 센 거 같은데……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아까 케이 하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요. 우리가 같은 편일지도 모르니까. 케이 하커와 우리.”

“아나키스트들을 말하는 거군요.”

“내 동지들이지.”

엘리자베스의 비웃는 듯한 목소리에 윌리엄이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가면을 벗듯 달라지는 윌리엄의 표정을 볼 때마다 엘리자베스는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아까까지는 케이 하커를 보호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거다.

케이 하커가 혁명가라서? 아니, 천만에. 케이 하커가 혁명을 지원하는 사업가여서다. 돈 많은 사업가.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의 속내를 꿰뚫어보고 이를 갈았다.

윌리엄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 하는 이유는 이거요. 우리도 같은 편일지도 모르니까. 당신과 우리. 방금 당신이 그 소년을 감쌀 때 알아봤소. 당신은 쓸모가 있어.”

윌리엄이 환하게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을 한 대 더 때려줄지 말지 고민하다가 돌아서서 예배당 문으로 직행했다.

개 같은 자식들.

개 같은 혁명가들.

* * *

예배당 문을 열자 뒤쪽에는 꽤 많은 수의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엘리자베스가 문을 열기가 무섭게 그녀 쪽을 경계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지나 예배당 안으로 조금씩 들어갔다.

파이프 오르간에서 거룩한 찬송가 반주가 흘러나오고 귀족들이 그것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이제 막 예배가 시작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단상 맨 위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국왕 폐하가 앉아계셨고, 그 아래쪽에는 주교와 왕비가 서 있었다. 맨 앞 1열에는 클레몬트 공작과 같은 왕족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 차례는 왕위계승권의 순서였다.

엘리자베스는 익숙하게 순서를 되짚어 케이 하커가 앉은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 이 거대한 예배당의 가장 끄트머리였다.

뒤에서 세 번째 줄 쯤, 수도자들이 앉는 곳으로부터 바로 앞줄에 검은 재킷을 입고 커다란 어깨를 조금도 웅크리지 않고 무례하게도 삐딱하게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찬송을 따라 부르기는커녕 팔짱을 끼고 제 앞에 다닥다닥 앉아 있는 귀족들을 먹잇감을 내려다보는 사자 같은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귀족들은 그런 오만한 시선에 불만을 가진 것 같았지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찬송에 집중하는 척했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옆에 앉아 있어야 할 로버트 하커와 프란시스 하커의 자리가 빈 것을 보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가 인기척을 내자 예배당 내의 모든 귀족들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들이 웅성거렸다.

“공녀님 오셨어.”

“아까 밖에서 부랑자를 안아줬다는데…….”

“뜬소문이겠지. 설마 정숙한 공녀께서…….”

엘리자베스는 절대 옆을 돌아보지 않는 케이 하커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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