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55화
엘리자베스가 윌리엄 조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리 밖으로 나섰을 때는 이미 거리가 마차로 빼곡했다.
“내가 태워다 줄게요.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엘리자베스.”
“마차를 가져왔어요. 분명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마 떠밀려서 어디론가 갔을 거요. 그냥 내 마차를 타요.”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물었다.
거리에는 저마다의 가문의 상장을 겉면에 그린 마차들이 컬로든 궁을 향해 가는 방향으로 늘어서 있었다. 속도가 하도 느려서 가는 건지 서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밖은 겨울이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따뜻했고 겨울에는 그나마 줄어드는 리오든의 스모그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시야를 텁텁하게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분위기는 이상하리만치 어수선했다. 국왕 폐하의 영명 축일이라고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힐끔 돌아본 윌리엄 조쉬도 그녀와 똑같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펑! 거리에 나와서 윌리엄과 몇 걸음 걷기도 전에 궁전 방향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오늘 이 기사 때문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신의 가루를 독점해왔던 교회와 왕실, 귀족원에 대한 반발심이 군중들 사이에 팽배합니다. 법원, 의회, 궁전, 어디든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간 학질로 죽은 사람만 십만 명에 이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열대성 학질은 교회의 선교사들이 옮겨왔지만 그들은 왕실을 등에 업고 신의 가루를 독점할 뿐, 그 이상의 책임은 지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경, 지금 우리 신문에 이 기사를 싣지 않으면 우린 인민들을 저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가장 강력한 어조로 기사를 실어야죠!’
엘리자베스는 눈앞에서 터져나가는 빨간 가루를 보았다. 국왕 폐하의 영명 축일을 맞이하여 축포를 터트린 것이었다.
“……젠장할, 이런 날씨에 웬 축포람. 어쨌든 갑시다.”
윌리엄은 엘리자베스의 외투 소매 끄트머리를 잡고 끌었다. 스모그가 자욱한 나머지 코가 따가웠던지 윌리엄은 제 코와 입은 소매로 가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에게 끌려가면서 하늘에 축포가 만든 붉은 구름을 바라보았다.
몇 해 전, 수많은 혁명가들이 흘렸던 피가 떠올랐다. 역사를 바꾸려고 한 자들이 어찌되었던가.
엘리자베스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꿈속에서, 그리고 솔치노 뒷골목에서 그랬듯이 지금이라면 컬로든 궁까지 단숨에 달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차 위를 달리며, 엄청난 힘으로 도약하며.
그렇게 해서 뭔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에 제 이름 한 줄을 새길 수도 있고, 케이 하커의 목을 졸라버릴 수도 있고, 난동을 부리다 경비병 몇의 힘줄을 잘라버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래. 나는 괴물이니까.
하지만 결국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의 목숨을 구하거나, 케이의 진심을 알아내거나,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괴물이니까.
괴물은 그저 역사라는 강물 속에서 튀어나온 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엘리자베스는 팔딱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윌리엄이 이끄는 지름길로 향했다.
케이 하커. 이 개 같은 자식.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거야? 네가 벌인 이 엄청난 일이 정말 나 때문인 거야? 정말 모조리 나 때문이라고?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해미쉬가 미리 준비해둔 마차에 올라탔다. 윌리엄이 귀부인에게 마땅히 해야 할 에스코트를 다 하기 위해 내민 손은 무참히 무시했다. 엘리자베스는 마차에 먼저 올라서 윌리엄에게 손을 내밀었다.
“…….”
윌리엄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 손을 보고 있자 엘리자베스가 윌리엄의 손을 잡고 당겼다. 윌리엄은 엘리자베스의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을 느끼며 그대로 짐짝처럼 딸려서 올라왔다.
윌리엄이 마차에 올라타 마부에게 컬로든으로 가는 지름길을 지시하고 나서 엘리자베스를 보며 물었다.
“정말 신의 가루를 만들었어요? 당신이?”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을 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마차 창문을 열고 그레이트 레본 국기를 달고 달리는 마차들을 구경하며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나는 그냥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 대가로 내 인생도 조금 구하구요.”
엘리자베스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며 윌리엄이 말했다.
마부가 윌리엄이 시키는 대로 마차를 모는 길은 중구난방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차창 너머로 귀족들이 모는 마차를 보기도 했지만, 뒷골목에서 더러운 음식을 먹는 아이들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하일 강이 나오면 국왕 폐하의 이름날을 기념하여 거대한 국기를 달고 들어오는 증기선이 보였고, 컬로든 궁에 가까워지자 베레모를 쓰고 멜빵바지를 입고 목이 터져라 신의 가루를 내놓으라 외치는 이들을 보기도 했다.
“레본은 망했어요. 그렇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쥐고 있던 창틀을 놓고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쥐었다.
“정신 차려요. 엘리자베스. 레본은 망하지 않아요. 변할 뿐이죠.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없고, 완전히 유지되는 것도 없어요.”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윌리엄의 눈동자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있는 힘껏, 리오든으로부터, 케이로부터, 아버지로부터 도망치려던 자신의 모습이 말이다.
* * *
컬로든 궁전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위대가 구름떼처럼 궁전 앞을 메우고 있었다. 딱 봐도 1만 명은 족히 되는 인원이 운집했는데도 물리적인 격돌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에렌델 뒷골목의 포목 시장처럼 시끄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요했다.
몇 번의 격돌이 있었던 듯 경비병들과 시위대 사이에는 소리 없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오고갔다. 시위대는 고요한 얼굴로 궁전부터 시작해 소위 중앙 귀족이라 불리는 귀족원의 귀족들의 타운하우스가 몰려 있는 노스 리오든 건물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신발이 없었고, 옷은 더럽고, 얼굴은 새까맸다.
그들이 둘러싼 거리 사이로 귀족들의 마차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물론 귀족의 마차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젠트리라고 불리는 돈으로 귀족 행세를 하는 신흥 사업가들의 마차도 있었다. 그런 마차들에서 내리는 이들은 국왕 폐하의 영명축일을 맞이하여 잔뜩 꾸민 모양새였다.
여자들은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하고 보닛을 둘렀고 코르셋을 잔뜩 조인 허리에 페티코트를 겹겹이 얹어 공작새처럼 엉덩이를 부풀렸다. 남자들은 딱 붙는 신사용 바지에 짧은 재킷, 그리고 화려한 코트를 더한데다 제 콧대만큼 높은 톱햇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때가 꼬질꼬질한 1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을 주시하며 궁전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경비병이 터준 길을 유유히 걸어갔다.
한 쪽에서는 다른 쪽이 보이지만, 다른 쪽에서는 한 쪽이 보이지 않는 듯한 기이한 살풍경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머릿털이 쭈뼛서는 것을 느끼며 마부가 솜씨 좋게 새치기한 마차 줄을 기다렸다.
윌리엄 조쉬가 물었다.
“내가 에스코트 할까요? 나야 평판 따윈 개나 줘버렸으니 나쁠 것도 없지만 당신은 약혼자와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사교계에서 헛소리가 돌 거요. 곧 사교계 시즌이잖소.”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피식 웃었다.
“내 평판은 얼마나 대단한 거라구요. 내가 지식인 신사를 흉내 내는 공녀라는 게 알려지면 나를 곱게 보지 않을 거예요.”
“설마.”
“정말이에요. 여자가 남자보다 아는 게 많으면 그 여자의 인생이 피곤해지는 법이라고들 하잖아요.”
아버지인 클레몬트 공작은 언제나 여자가 남자보다 아는 게 많으면 그 여자의 인생이 피곤해지는 법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사랑받는 여자들은 누구나 조금은 멍청한 구석이 있다고 말했다. 남편을 너무 궁금해하면 남편들은 피곤해하는 법이라고도 했다.
부모님의 견해에 따르면 엘리자베스는 최악의 신붓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다른 귀족 영애들은 읽지 않을 과학, 역사, 수학에 관한 책을 읽었고 자연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나 늘, 케이 하커를 궁금해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파국으로 치닫은 것은 아니었을까.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처형당하기 전까지는 내내 그런 것 따위를 고민해왔다.
윌리엄 조쉬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당신이 과학자라는 사실 때문에 평판이 나빠질지, 좋아질지는 알 수 없는 게 아니겠소.”
“무슨…….”
엘리자베스가 윌리엄 조쉬의 말의 의미를 묻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공교롭게도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경비병이 엘리자베스와 윌리엄 조쉬를 보더니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윌리엄 조쉬 자작과…….”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주변의 공기를 느꼈다. 고고하게 궁궐 안으로 들어가던 귀족들과 그들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평민들, 그리고 평민들을 막아선 경비병들 사이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견고하고도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균형이 무너지고 댐이 쏟아지듯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공녀님 드십니다.”
경비병의 말이 끝나자마자 분노, 동경, 슬픔, 좌절, 격정, 경멸, 혐오, 불안, 설렘의 감정들이 모두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전생에서 아버지의 공개처형을 보던 순간처럼 몸이 굳었다.
윌리엄 조쉬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 바닥을 디뎠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뻗는 순간,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신의 가루를 내놔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를 내놔!”
“공녀님을 의회로 모셔라!”
“꺼져라, 귀족원!”
“아동노동 금지, 왕정폐단 철폐!”
엘리자베스는 성난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목소리들을 들으며 벌벌 떨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손을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조쉬가 조용히 말했다.
“내려야 해요. 엘리자베스. 걱정할 것 없어요. 아무 일도 없으니까. 저 쪽에서도 당신이 만든 치료제를 얻어내야 하니까 섣불리 그 누구도 공격하지 않고 있는 거고, 이쪽에서도 폐하의 영명 축일이니 함부로 피를 볼 수 없어요.”
엘리자베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주변을 보았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대체 왜.
엘리자베스가 정신을 잃을 것처럼 숨을 빠르게 몰아쉬고 있을 때, 윌리엄 조쉬가 이를 악물곤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거대한 짐을 옮기듯 조쉬가 엘리자베스를 우악스럽게 마차에서 끌어냈다.
그 순간, 경비병이 지키고 있던 선을 넘어서 한 소년이 엘리자베스에게 달려들었다.
“우리 엄마를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