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54화
이오페아는 멜니아보다는 작은 대륙이었지만 전 세계의 패권을 가진 나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해상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던 선더렌, 갸흐통, 레본이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었다.
특히나 레본은 왕실의 잘못된 투자로 인해 빚에 허덕이긴 했어도 여전히 이오페아,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레본에는 단순히 교역을 중개하는 역할의 무역가들만 있는 게 아니라 해상 무역으로 큰돈을 벌게 해주는 탄탄한 하커 사 같은 거대한 공장들이 있었고, 레본의 선교사들은 레본이 해상 무역으로 돈을 벌어들임과 동시에 레본의 문화를 이민족들에게 퍼트렸다.
그 과정에서 선교사들과 무역가들이 이민족들에게 행한 무자비한 짓들은 역사에 실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레본이 이민족들의 문화를 가져와 그것을 레본의 공장에서 거대한 기계들을 통해 대량화하고 전 세계에 팔아먹어 강대국이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레본은 고대의 렐름이 누렸던 것 같은 세계적인 강대국의 지위를 누렸고 레본의 물건은 세계 어디서나 팔렸다. 레본은 전 세계를 통치하지 않아도 상업을 통해 전 세계를 하나로 묶었다. 레본의 국민들은 레본을 ‘그레이트 레본’이라고 불렀고 레본에서 산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대체 언제까지 커질 수 있을 것인가? 십대의 엘리자베스는 점점 비대해져가기만 하는 레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레본은 끊임없이 커지기만 하는 나라였다. 쉐필드의 끝없는 초목지처럼, 레본은 이미 제 테두리를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지경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증기 기관 사업의 실패가 터졌다.
연일 나라가 들썩였고 굳건하기만 했던 레본의 왕실이 처음으로 위기에 처했다. 신문에 처음으로 왕정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와 공화국을 표방하는 멜니아의 정치와의 비교가 실렸다. 물론 그걸 주도한 신문은 폐간되었지만 그 짧은 신문 기사가 엘리자베스에게 준 충격은 적지 않았다.
아버지는 신문 따위는 읽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받은 충격을 아버지는 조금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왕실에 투자한 돈을 날려먹은 덕에 쉐필드에서 아버지의 땅이라 부를 수 있는 영토가 줄어들고, 영지민은 도시 노동자가 되기 위해 이주해버려 세수는 점점 바닥을 보여 가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쉐필드의 왕으로 살기를 원했다. 농노들의 원성에도 쉐필드의 지대는 그대로였고 아버지는 더 낮은 이자로는 절대 곡창을 열지 않았다. 세금 징수관이 세금을 거두러 갔다가 성난 농노들에게 맞아 치아가 두 개나 나갔는데도 아버지는 불쌍한 세금 징수관을 지하 감옥에 가뒀다.
항아리의 뚫린 바닥을 호미로 막다가 가래로 막다가 종래에는 가래로 막은 구멍에서도 물이 새어나오는……. 그런 식의 나날이 이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침몰해가는 배에 탄 기분으로 매일 눈을 떴다. 쉐필드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요란스럽고 대단한 무언가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라는 일도 그만두었다.
쉐필드는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쉐필드에 갇혀 있는 자신을 눈치채고 구해주러 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밖에서 보기엔 이 한심한 공녀도 그저 왕정이라는 거대한 멍청이 집단의 하나일 뿐일 테니까. 그러니 바깥세상으로 나가 내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소리치지 않는 한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 여기던 중에 아버지가 두 해만에 고집을 꺾고 갑자기 리오든 행을 택했다.
엘리자베스는 희망에 부풀었다.
1등 칸을 탔음에도 쉐필드의 구식 열차에서는 기름 냄새가 났지만, 타고 내릴 때는 부릴 사용인도 없어서 제 짐은 제가 들고 더러운 평민들과 얽혀서 역을 돌아다녀야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긋지긋한 초목지대를 떠나왔다는 게, 엘리자베스를 미치도록 두근거리게 했다. 더 이상 침몰해가는 배에 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게, 드디어 신문 속에서 나오는 세상, 남들은 이미 그 안에 살고 있는 세상을 알게 된다는 게…….
그런 게 그녀를 설레게 하던 날들도 있었다. 그 세상이 얼마나 잔혹하고 위험한 곳인지 모르는 채, 그저 진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게 좋았던 날들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차가운 눈으로 윌리엄 조쉬를 올려다보았다.
“K라는 이니셜은 그럼 누굴 말하는 거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모르죠.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이니셜을 쓰는 사람이 왕실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겁니다. 그냥 조금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왕실이 몰수한 솔튼 빌리스의 재산을 처분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 만큼 대단한 관련이 있는 거죠.”
윌리엄은 홍차를 홀짝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윌리엄은 답지 않게 지치고 피로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당신 같은 여자가 궁금해할 일이 아니야. 알고 있소? 그 공장들 중 몇 개에서 나온 화학 성분을 내가 뽑아왔어.”
윌리엄은 엘리자베스 앞으로 공장에서 사들였을 법한 화학성분들을 적은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차분한 눈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읽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안의 모든 성분을 알지는 못했지만 몇 개는 알았다.
특히 초산. 그리고 글리세린.
“……다이너마이트를 만드는 공장인가 보군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자신 같은 ‘여자’는 이 성분들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 여긴 것이었다. 윌리엄은 목이 타는 듯이 자꾸만 홍차를 들이키며 말했다.
“그 양을 보시오.”
다이너마이트를 만드는 공장은 당연히 레본 이곳저곳에 있다. 특히 광산 채굴을 할 때 다이너마이트는 중요한 역할을 하니까. 증기 기관을 개발해 광산 채굴을 할 요량이었던 솔튼 빌리스의 계획을 생각해보면 다이너마이트 공장이 그의 소유 하에 있었던 것은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건…….
엘리자베스가 글리세린이라고 적힌 글씨 옆에 적힌 숫자를 보며 어두운 얼굴을 하자 윌리엄이 엘리자베스에게서 종이를 빼앗아갔다. 그러곤 불안한 사람의 걸음걸이로 그것을 들고 벽난로로 걸어가 종이를 나무 사이에 끼워 넣고 태워버렸다.
“……광산이 아니라 영지 하나를 불태울 수도 있을 양이지.”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케이의 말이 맞았다. 이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전쟁이라는 사업을 준비한다는 말. 결국 클레몬트 공작이 제철 공장을 사들임으로써 뛰어들고 싶었던 사업은 혁명 따위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고수익 고위험의 사업이었던 셈이다.
엘리자베스는 타들어가는 종이를 보며 푸스스 웃었다. 윌리엄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미쳤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웃어요? 지금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레본은 망해가고 있어요.”
“엘리자베스!”
윌리엄은 위대한 혁명가답지 않게 불안한 눈빛으로 엘리자베스의 입을 틀어막을 듯이 달려들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윌리엄을 노려보며 말했다.
“쉐필드에서 리오든으로 기차를 타고 왔을 때, 나는 내가 낡고 오래된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왔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제 알아요. 이 나라는 쉐필드든 리오든이든 모두 낡았어. 모두…….”
구원받을 수 없을 거야.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할 때, 타운하우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밖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해미쉬이리라.
윌리엄이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
엘리자베스는 손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들어오라고 하는 윌리엄의 행동이 의아해 물었다.
“누구예요?”
“신문 발행인이오. 우리 출판사에서 평민들을 위한 석간이 오늘 무료로 배포되는 날이거든. 마지막 점검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큰일이니 잠시 실례하겠소.”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며 응접실 겸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톱햇을 쓴 신사가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신사가 들고 온 아침 신문에 들어갈 원고들을 가지고 윌리엄과 신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벽난로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쨌든 이 아침부터 윌리엄의 집에서 발견되어 좋을 일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과 이상한 추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 기사를 꼭 실어야 합니다, 윌리엄 경. 이 기사를 실어달라고 말한 인간이 제시한 금액이 우리 1년 치 조판에 드는 구리를 사고도 남을 금액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이번 신문에는 사설로 많은 지면을 채우기로 하지 않았소. 것보다 이건 내용이…….”
그때 신사와 수군거리던 윌리엄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것이 엘리자베스에게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제 등에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의아한 눈으로 뒤를 돌았다. 윌리엄은 신사가 내민 원고 속 내용을 보다 말고 엘리자베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요?”
엘리자베스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윌리엄에게로 걸어갔다. 그러자 윌리엄이 머뭇거리며 제가 들고 있던 원고를 내려놓았다.
“이게 무슨 내용인지 알아요? 나는 도통…… 아니, 것보다 자네, 이걸 신문에 실어달라고 한 사람이 누구라고?”
윌리엄이 원고를 엘리자베스 앞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고 신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책상 위의 원고를 읽었다.
[학질 치료제 등장하다.]
그리고 첫 번째 줄에서부터 제 눈을 의심했다. 뭐…… 뭐라고…….
엘리자베스는 재빨리 원고를 집어들었다. 엘리자베스의 행동이 과격했던 탓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신문 지면을 표시한 빈 종이가 후드득 바닥에 떨어졌다. 신사가 말했다.
“그 사람이요……? 이름이…….”
신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품 안에서 다른 신문들을 꺼냈다. 신사는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원고 내용을 읽는 사이에 다른 신문들을 책상 위에 깔았다.
“벨로나 트리뷴, 이스트포레스트, 커런트 타임즈— 그 외에도 저희처럼 작고 큰 신문들에 자기 원고를 실어달라고 했나 봐요. 오늘 오는 길에 가져온 신문들 전부에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렸어요. 다른 트리뷴에도 광고 지면을 활용한 걸 보면 엄청난 부호인 것 같던데요. 아! 이름이…….”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들고 있던 원고를 내려놓고 다른 신문들을 보았다. 거기에도 비슷한 내용들이 단어만 조금 달리하여 실려 있었다.
[신의 가루라고 불리던 퀴닌을 인간이 만들어내다.]
[퀴닌을 합성해낸 과학자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위대하신 국왕 폐하의 조카딸이다.]
[퀴닌 합성을 도운 자의 이름은 루이 니콜라스, 케빈 퍼킨, 그리고 엘우드 밀이라는 과학자들로 이들은 여성 과학자의 출현을 도와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으로……]
[이번 합성물질의 효과를 증명한 리오든 의료원의 의사……]
마지막 줄에 보이는 리오든 의료원의 의사라는 자는 케이 하커에게 엘리자베스가 의료 사고를 냈던 전적이 있음을 알려주었던 의사였다. 그의 인터뷰 내용은 구구절절 찬양조였다.
신사가 말했다.
“케이 하커! 그 이름이었어요. 공익 제보자라고 스스로를 일컫긴 했지만 사실 꽤 많은 광고 지면비를 냈어요. 하지만 돈 때문이 아니라 내용이 우리 석간이랑도 잘 어울리잖습니까. 학질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윌리엄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