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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53화 (5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53화

“케빈!”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소리치자 케빈이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아이구구구…… 엥? 뭐예요? 아침이에요? 벌써?”

케빈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아직은 어둑한 창 너머를 보곤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아직 새벽이잖아요! 근데 왜 사람을 깨우고 그래요?”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왜…… 여기서 잤어?”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속이 울렁거렸다. 다행인 것은 이건 어떤 변이의 전조라기보다는 엘리자베스에게 익숙한 숙취였다는 것이었다.

“왜긴요. 그 이상하고 무서운 남자가 아침까지 공녀님 침실 앞을 지키고 있다가 공녀님이 모셔주라는 데 모셔주고 적어도 3시까지는 늦지 않게 컬로든 궁 앞으로 데려다놓으라고 했으니까 그렇죠. 아유, 삭신이야. 절대 공녀님 침실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안 된다고 엄포를 놔서 복도에서 생고생 했잖아요! 비켜요 침대 위에서 눈이라도 붙여보게!”

케빈은 분노하며 엘리자베스를 밀치고는 엘리자베스의 침대 위에 막무가내로 누웠다. 엘리자베스는 텅 빈 복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 남자는 어디 갔어?”

그 말에 케빈은 침대에 누워서 대답했다.

“집에 갔겠죠! 제가 알 바예요? 지금은 우리 공녀님 모시는 것만 해도 벅찬데!”

엘리자베스는 여관방을 가로질러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아무런 문장이 없는 마차 한 대만이 놓여 있었다. 하커 가문의 문양이 있는 마차는 없었다.

‘집에 갔다고……?’

엘리자베스는 어젯밤 그런 험한 말들을 들어놓고도 엘리자베스를 두고 갈 생각이 없어 보였던 케이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궁금했다.

하긴. 어쩌면 거기엔 딱히 어떤 이유나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엘리자베스에게 지쳐버리거나, 역시 사람을 잘못 봤던 거라고 판단하게 되었거나, 그냥……. 운명이 파놓은 궤적을 향해 흘러가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엘리자베스가 본 미래 속에서 케이 하커는 결국 엘리자베스를 배신했고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서 도망쳤다. 그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이 관계는 엘리자베스가 억지로 잡아놓지 않으면 결국은 깨지고 말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잘 된 거라고 여기려고 했다. 자꾸만 마음속에 치미는 불쾌한 헛헛함은 치워버리려고 했다.

이제부터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으니까. 몰록인지 뭔지, 그 거지 같은 것이 내 영혼을 갉아먹는데도 절대로 순순히 죽어주지는 않을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창을 가린 좀이 잔뜩 먹은 커튼을 쳤다.

“으악! 뭐예요! 자고 있는데!”

어슴푸레한 여명을 정통으로 맞이한 케빈이 소리질렀다.

엘리자베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일어나, 케빈. 오늘 네가 내 마부노릇 좀 해야겠다.”

“으아아아악!”

케빈이 분노의 신음소리를 흘렸다.

* * *

케빈이 눈 밑에 그늘이 잔뜩 내려온 채로 마부석에 앉아서 골을 냈다.

“공녀님이야 많이 잤을지 몰라도 저는 추운 복도에서 죽다 살았다구요.”

“그래. 미안해. 3시 이후에 많이 자.”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황당하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차창 너머로 국왕 폐하의 영명 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수도로 몰려든 인파 때문에 북적이는 바실리 스트리트를 보던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려 케빈을 마주 노려보았다.

“뭘 봐? 배신자 주제에.”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깨갱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전부 공녀님 맘대로 됐잖아요. 교수님이 일어나서 수표를 보시곤 공녀님 맘대로 책 제목도 하고 엘우드 밀의 이름도 실어주신다고 하셨어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그건 그거고 배신은 배신이야. 넌 못 믿을 놈이니까 앞으론 말을 아끼도록 하겠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마차가 바실리 스트리트 22번가를 지났다. 엘리자베스가 서둘러 케빈이 앉은 마부석의 등받이를 쳤다.

“케빈! 여기서 내려야 돼! 넌 대충 아무데서나 기다리고 있다가 한 시간쯤 후에 날 데리러 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지금 이 많은 마차들이 지나다니는데 어디서 기다리라는 거예요!”

케빈의 말에는 대답도 없이 엘리자베스는 마차에서 뛰듯 내려서 건너편으로 걸어가버렸다. 케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치겠네!”

그때 등 뒤에서 다른 마부의 욕설이 들려왔다.

“이 새끼야! 당장 마차 못 빼? 이 마차로 말하거든…….”

“아 네, 네. 국왕 폐하의 마차쯤 되나 보죠? 빼요, 빼!”

“뭐라고, 이 새끼가?”

* * *

바실리 스트리트 23번가 5번째 집. 엘리자베스가 그곳의 문을 두드렸을 때는 해미쉬가 아니라 멋들어진 정장을 차려입은 윌리엄 경이 엘리자베스를 맞이했다.

“……이 아침부터 참 상쾌한 손님이군요.”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경의 군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습관적으로 윌리엄 경의 응접실과 식당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웬일로 여자도, 혁명의 동지도 없네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 경이 코웃음을 치며 나비넥타이를 맸다.

“어떤 암사자 같은 여자 때문에 여자한테는 도무지 마음이 동하지 않게 됐네요. 여자가 얼마나 위험한 생물인지 알게 되었거든요.”

“아, 네.”

엘리자베스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응접실에 앉았다. 윌리엄 경은 엘리자베스의 행동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앉으시죠, 엘리자베스 양.”

“이미 앉았어요.”

“네, 그렇죠.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말이에요.”

“K라는 서명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알아냈어요?”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경의 군소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빠르게 물어봤다. 그러자 넥타이를 매던 윌리엄의 손이 멈췄다.

“……아, 그거.”

“그래요 그거.”

엘리자베스가 초조한 눈으로 윌리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윌리엄은 거의 다 맸던 넥타이를 벗어서 응접용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제 집무용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거기에 놓인 찻잔과 찻주전자를 들어 엘리자베스에게 홍차를 한 잔 내어주고 자신의 것도 따랐다.

이런 걸 마시며 한가하게 잡담을 나눌 시간이 없다. 엘리자베스는 다급하게 물었다.

“알아냈군요? 그렇죠?”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하지만?”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구요?”

“말 그대로에요. 알려주지 않을 거라구요. 1만 파운드도 받지 않을 거고, 정보도 넘기지 않을 거예요.”

“왜요?”

엘리자베스가 황당한 목소리로 말하자 윌리엄이 대답했다.

“그냥요. 난 소심한 아나키스트거든요. 간이 콩알만 해서 위험한 일에는 도무지 뛰어들 맘에 들지 않네요.”

“당신 보고 뛰어들라고 한 적 없어요! 그냥 정보만 알려주고 돈만 받아 가면 되잖아요?”

“돈은 누구한테서 나오는 거죠?”

윌리엄이 아까까지 얼굴에 약간이나마 감돌고 있던 장난스러운 미소를 싹 빼고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그거야…… 케이 하커와 나한테서 나오죠.”

“그거 자체가 싫어요. 위험한 사람들이잖아요. 둘 다.”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이를 악물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왜 이 남자가…….

“난 위험한 사람이 아니야. 윌리엄 조쉬.”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쿡쿡거리며 웃더니 곧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왔다. 위압적인 덩치로 그는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니, 당신은 위험해. 당신이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지.”

“무슨 말이죠?”

“그 계약서, 폭탄 제조와 관련된 거라고 했죠?”

“네.”

“그런데 그 계약서에 있는 K라는 작자가 알고 보니 다른 계약서들도 여기저기 쓰고 다녔더군요. 리오든 뿐 아니라 레본에 있는 여러 공장의 명의 이전 계약서들에도 K라는 글씨가 있었어요. 그걸 알게 된 건 우연한 일이었죠.”

조쉬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에게서 돌아서서 집무실 책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위대한 국왕 폐하의 증기기관 사업! 생각나요?”

조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업을 모르는 레본 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업 덕분에 레본의 왕실과 귀족원을 주름잡던 귀족들 대부분은 재정 파탄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사업의 골자는 증기 기관을 통해 광산을 채굴한다는 것이었는데, 증기 기관 자체가 부실했던 데다가 광산의 안정성이 떨어지고 실제 매몰된 광물이 턱없이 작아 투자비용은 거의 회수하지 못하고 대형 사고만 2번이나 일어났던 사업이었다. 수많은 광부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레본의 재정을 끔찍하게 만들었던 사업이긴 했지만 그 사업은 결국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게 바로 평민원의 발족이었다. 빈털터리가 된 레본의 왕실과 귀족들은 엄청난 부채를 평민 중 신흥 사업가층으로부터 지게 되었고 신흥 사업가층은 그 대가로 의회에 저들의 자리를 요구했다. 그게 바로 평민원이었다.

말이 평민이지 귀족보다 부유한 신흥 사업가층으로 이루어진데다 실제로 입법 과정에는 별로 기여하는 바가 없는 평민원이었지만 의회에 생긴 평민의 자리는 일반 대중에게도 꽤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조그마한 자리가 생김과 동시에 수많은 하층민들이 투표권에 대한 요구를 시작했고 의회 앞에는 매일 같이 여러 요구를 해오는 혁명가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큰 변화였고 많은 대중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진일보였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수많은 평민들이 헛된 꿈으로 인해 경찰청에 잡혀 갔고 살벌한 검열이 신문과 출판계에 들이닥쳤다.

엘리자베스는 그 몇 해동안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역사를 별로 기분 좋게 기억하지 못했다. 힘이 없는 사람들이 꿈을 가지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똑똑히 목도한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년 반 후의 케이는…….

케이가 만든 주식회사는 물론 조금 달랐다. 케이에게는 엄청난 부와 명예, 힘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보지 못한 미래에서 케이가 결국 승리를 거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케이의 말대로 혁명에도 돈이 필요하기 마련이고, 그건 반대로 말하면 돈이 있다면 이 견고한 세계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니까.

“그 증기기관 사업 때 부실한 사업 계획으로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던 발명가 솔튼 빌리스도 생각나겠죠?”

윌리엄이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획기적인 증기 채굴기계를 발명했다고 주장했던 솔튼 빌리스 후작. 그는 왕비의 머나먼 친척이었는데 결국 형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던 공장 중 몇 개를 처분하는 일을 맡게 된 변호사 친구가 있었거든요. 그게 왕실과 공동 소유하고 있던 공장들인데 우연히 그 계약서를 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왕실과 공동소유.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뒷골이 서늘해졌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K라는 글씨를 봤군요.”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엘리자베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6개월 후에 있을 공개처형에는 왕실이 개입되어 있다.

이 가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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