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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52화 (5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52화

“그래요. 수도원. 둘이서 수도원에서 빈민 치료를 하다가 만났다던데. 하여간 그 삼촌도 여기저기 싸돌아다닌다니까.”

케빈의 말에 케이는 대답 대신에 시선을 옮겨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수도원이라고? 빈민치료라고?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로킨트 펍에서 익숙하다는 듯이 맥주를 시키던 것을, 그리고 아름답게 춤을 추던 것을 떠올렸다. 케이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로킨트 스트리트에서 익숙하게 담배를 피우던 엘리자베스.

‘배웠다기보단 그냥 보고 따라한 거야. 몇 번.’

‘누굴?’

그때 엘리자베스가 짓던 그립다는 듯한 표정. 엘리자베스가 며칠 전부터 보였던 그 이상한 행동들이 모두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여들었다. 엘리자베스와 함께 뒷골목의 불쌍하고 딱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했던 훌륭한 귀족 지식인.

엘우드 밀.

케이가 케빈에게 물었다.

“엘우드 밀이라는 사람 말이야. 어떻게 생겼지?”

케이의 말에 케빈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얼굴을 제대로 못 봤어요? 하긴. 그 삼촌이 이상한 걸 뒤집어쓰고 다니긴 하죠. 뭐 그냥…… 뭐랄까… 그걸 뭐라고 부르더라…… 요정?”

“요정?”

케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요. 저도 딱 한 번 얼굴을 봤어요. 동화책에 그려진 요정이나 교회 벽화에 그려진 천사 같은 거 있잖아요. 은발에 가까운 금발에, 눈, 코, 입도 오밀조밀하고…… 얼굴은 새하얗고. 눈은 약간 초록색이던가……?”

케빈의 말에 케이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케빈은 의아한 눈으로 케이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았다. 슬퍼 보이기도 하고 만족스러워하기도 하는 그런 미소였다. 케이가 중얼거렸다.

“그래. 정말 닮았어. 정말.”

“누굴요?”

“내가 아는 어떤 사람. 내가 아는…….”

가장 귀하고 소중한 사람.

케이는 그 말을 속으로 씹어 삼키며 케빈을 노려보았다.

“얼른 가. 루이 니콜라스 교수에게 내 수표를 줬으니까 나중에 술 깨서 딴 소리 같은 건 하지 말라고 해라. 교수를 내려다주고 마차를 끌고 아침까진 돌아오고. 그리고…….”

“제가 무슨 마부인줄 아세요?”

케이는 퉁명스럽게 말하는 케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너 꽤나 머리가 좋은 제자라고 하더군. 잘 해봐. 공녀님도 잘 모시고.”

“저는 공녀님의 사용인 같은 게 아니거든요?”

“사용인은 아니지만…… 스승이나 동료는 될 수 있겠지.”

케이의 말에 케빈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케빈은 뭐라고 벌컥 화를 내더니 얼른 문을 열고 마차로 뛰어갔다. 케이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이 닫히길 기다려서 엘리자베스가 엎드린 테이블로 걸어갔다.

케이는 테이블에 잔뜩 흐트러진 엘리자베스의 부드럽고 고운 금발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신기할 정도로 이 여자의 몸은 모든 부분이 부드럽고 아름답다. 온몸으로 절대 너는 만져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케이는 심술이 나서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툭하고 건드렸다.

“이봐.”

케이의 말에도 엘리자베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케이 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하지만 눈은 뜨지 않은 상태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했다.

이 긴 속눈썹이 깜빡거릴 때마다 케이는 견딜 수 없이 몸이 달아올랐었다. 엘리자베스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은 늘 케이를 부끄럽게 했다.

나는 왜 이렇게 험하게 생겼을까. 내 손은 왜 이렇게 거칠까. 내 말투는 왜 이럴까. 나한테는 왜 이렇게 더러운 옷 밖에 없을까.

엘리자베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한 번도 부족하다고 느껴보지 못한 일상이었다. 아버지가 매일 자신을 ‘벼룩’이라고 부르고 마구간에서 재웠어도 케이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길바닥에서 자고 쓰레기를 주워 먹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자신은 운이 좋았다. 같이 일하는 미리엄은 아버지한테 맞아서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 정도로 때리지는 않는다. 때로 발길질 정도는 해도.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자신은 벼룩이니까.

손끝도 야물지 못하고 미리엄처럼 자신의 몸 만한 모포를 번쩍 들지도 못하니까. 밥값은 못하면서 따뜻한 마구간에서 자고 철마다 켄드릭이 입다가 해진 옷을 물려받으니까.

어린 케이는 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우물 밖을 모르는 개구리에게는 우물이 충분히 넓고 평온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우물의 하늘에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라는 녀석이 나타나버린 것이다.

‘넌 코가 왜 그래?’

‘넌 왜 그런 말투를 써?’

‘너 오늘…… 나랑 같이 하일 강변에 놀러 가지 않을래? 그 뒤에 가면 예쁜 커피 하우스가 있어.’

엘리자베스는 툭하면 공장 사무실에 놀러와 케이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엘리자베스가 그럴 때마다 케이는 화가 났다.

너는 나를 자꾸 창피하게 해……. 한 번도 부끄러워 한적 없는 내 친구들을…….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는 내 삶을……. 자꾸만 다시 생각하게 해.

“난 네가 싫어.”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케이의 입술 끝에서 흘러나온 숨이 엘리자베스에게 닿지 못하고 금세 흩어져버렸다.

난 네가 싫어.

너무 싫어.

난 너를 절대 사랑하지 않을 거야.

케이는 주문처럼 그 말을 곱씹으며 불쑥 치미는 원망스러운 마음을 내뱉었다.

“거짓말쟁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또 절대 다른 놈한테 눈길 주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케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들부들한 카펫을 처음 만져보는 고아 아이처럼 손바닥으로 여러 번 엘리자베스의 머리 전체를 쓸어내리기도 하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귓가에 꽂아보기도 했다.

딱 한 번. 인형 가게에서 이런 머리카락을 가진 인형을 훔쳐봤던 어린 시절처럼 불안하고 설레고 환멸스러운 기분으로.

그래봤다.

그때, 엘리자베스가 눈을 떴다.

케이의 갈색 눈과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에서 재빨리 손을 떼고 머뭇거렸다.

엘리자베스가 부드러운 입술을 열었다. 케이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달콤한 냄새와 함께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엘 선생님…….”

케이는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잡아서 그녀를 일으켰다.

“정신 차려. 멍청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흐느적거리며 케이의 가슴팍에 머리를 부딪쳤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가슴팍에 기댄 채로 케이의 어두운 코트 자락에 코를 박았다.

“왜 이제 오셨어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묻어 있었기 때문에 케이는, 아니, 케이도 울고 싶어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올라가자.”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붙잡고 윽박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이상해. 내가 찾지 않을 땐 짠하고 나타나 내 목숨을 살려준 주제에, 내가 찾을 땐 그 어디에도 없다니…….”

목숨을 살려줘? 생명의 은인이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고약한 상황에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자베스를 부축해 위층으로 옮기려고 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품을 파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딜 가는 거예요. 가지 말라구요. 도망가지 마세요. 아니…….”

케이는 제 가슴팍이 천천히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울고 있었다. 케이는 제 앞에서 우는 엘리자베스를 볼 때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개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건 처절한 슬픔이었다.

“절 데리고 도망가주세요. 당신이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해달라구요. 아버지로부터, 리오든으로부터, 그리고…….”

케이는 이를 악물고 엘리자베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게 뭔지 알면서도, 그리고 그 말을 들으면 돌이킬 수 없을 걸 알면서도, 케이는 그 말을 들어야 했다.

“……케이 하커로부터 도망가게 해달라구요.”

엘리자베스의 부드러운 금발이 케이 하커의 코트자락에 엉겨 붙었다.

케이는 가만히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었다.

그래. 전부 다 듣기로 했다.

그래야만 나도 너로부터 도망갈 수 있을 테니까.

케이는 그렇게 여겼다.

“하실 수 있죠? 그렇죠? 당신은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 당신은…… 당신은 정말 이상하고…… 좋은 사람이잖아. 당신은 조의 목숨도 구할 거고, 다른 사람들의 목숨도 구할 거잖아. 내가 바라는 건 이제 그냥…… 도망가는 것, 그것뿐이라고 하면 그건 들어줄 거잖아. 그렇지? 말해봐. 말해보라고…… 엘 선생…… 말해 봐, 이 자식아.”

엘리자베스는 흐느끼고 있었다.

케이 하커는 그 개자식과 엘리자베스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엘리자베스가 얼마나 슬프고 또 얼마나 기뻤을지도 알 수 없었다. 케이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제야 깨닫게 된 그녀와 케이 사이의 기억들뿐이었다.

그녀가 케이를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그런 것들. 그리하여 그녀가 케이를 얼마나 슬프게 할 것인지.

그런 것들.

케이는 자신이 남은 평생 동안 내내 불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 * *

오늘도 또 꿈.

또 꿈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번 꿈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자기 자신이었다. 디트리히 폰이 아니라 자기 자신.

엘리자베스는 추운 겨울바람을 뚫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엘 선생이 자신에게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엘리자베스의 속은 썩어들어 가고 있는데, 엘 선생은 차분한 움직임으로 엘리자베스를 일으키려고만 했다.

땅은 자꾸만 다가오고, 하늘은 자꾸만 돌았다. 엘리자베스는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는데, 엘 선생은 자꾸만 엘리자베스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엘 선생에게 왜 이제 왔냐고 화를 내다가, 종래에는 애원했다.

제발 나를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괴물이 되고 싶지는 더더욱 않아.

손가락이 몇 개인지 알 수 없는 조 말고 나를 살려줘.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얼마든지 줄 테니까 그 자식이 아니라 나를 먼저 살려줘.

꿈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진정한 괴물이었다. 그래서 눈을 떴을 땐, 그 어떤 악몽을 꾸다 깨어난 것보다도 더 기뻤다.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뱉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새벽에 가까운 아침이었다. 어슴푸레한 빛이 창 너머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여관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는 본능적이기까지 한 감각으로 케이를 찾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툭, 하고 누군가의 등이 그대로 바닥으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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