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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51화 (51/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51화

케이 하커가 국왕의 사냥터에서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한 것으로 두 사람의 약혼은 성사되었다.

케이 하커는 엘리자베스가 던진 나뭇가지에서 묻어나온 흙으로 더러워진 옷을 입고 엘리자베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엘리자베스는 굴욕적이기까지 한 케이 하커의 표정 앞에서 자신이 가장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을 닮아버린 기분을 느꼈다.

그건 바로 아버지, 클레몬트 공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방식 그대로 케이 하커를 제 앞에 무릎 꿇린 것이었다.

그날의 항복에 가까운 청혼 이후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가 무척이나 화가 났을 거라고 여겼다. 제 편지를 불태우기까지 한 남자에게 권력을 이용해서 청혼을 받아냈다. 엘리자베스는 제가 한 행동이 믿어지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날 밤, 몇 번이나 밤중에 깨어나서 두 사람의 인생을 모두 망칠 이 결혼을 취소하러 가야되는 건 아닌지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엘리자베스가 결혼을 취소하기도 전에 케이가 먼저 클레몬트 공작가를 방문했다. 문가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엘리자베스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어서 오렴. 이제 네 약혼자가 아니냐. 예의를 갖춰서 인사해야지.”

엘리자베스가 쭈뼛거리며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분노한 케이의 얼굴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의외로 케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 양. 저와 함께 산책을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케이는 어쩐지 설렘이 들어 있기까지 한 것 같은 얼굴로 엘리자베스에게 산책을 권유했다.

“그, 그게…….”

엘리자베스가 말을 더듬자 뒤에서 아버지가 엄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케이로부터 도망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무서워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하게 어울리는 신사복을 입고 신사의 매너를 갖춘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타운하우스에서 나섰다. 엘리자베스는 다정한 케이의 태도를 보며 왜인지 모르게 더 불안했다. 맛있는 사탕을 엄마 몰래 부엌에서 훔쳐 나온 어린 아이처럼.

엘리자베스는 날씨가 좋지 않냐든가, 햇볕이 너무 따갑지는 않냐든가 하는 의례적인 연인의 태도를 취하는 케이에게 적응이 되지 않아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 컬로든 궁전 옆에 있는 벨룬타 공원에 도착했을 때 엘리자베스의 구두가 벗겨지는 사고가 있었다. 나오기 전에 좀 더 편한 구두로 갈아 신었어야 했는데 그럴 정신을 모두 케이에게 빼앗겨버린 탓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맞지 않는 구두를 질질 끌고 다니다 결국은 벨룬타 공원 앞 더러운 웅덩이에 한쪽 구두를 빠뜨려 버렸다.

“내 구두…….”

엘리자베스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맨 발로 시선을 옮겼다. 엘리자베스가 스타킹만 신은 발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다.

멍청하다고 생각하겠지. 아니면 귀찮다고 여겨서 산책도, 약혼도, 이쯤하자고 말하며 마차를 잡아서 나를 돌려보내거나.

엘리자베스는 암울한 생각을 하며 절뚝이는 걸음으로 벤치에 걸어가 앉았다. 이런 생각들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간들이 너무 괴로웠던 탓에 엘리자베스는 그냥 나머지 구두도 벗어서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말했다.

“그냥 가. 가버리라고! 괜히 친절한 척하면서 날 안심시켜놓고 뭘 어쩌려고? 그럴 필요 없잖아. 내 편지를 불태워버렸듯이 그냥 가면 돼! 마차 정도는 이런 꼴로도 혼자 잡을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케이는 제 앞으로 또르르 굴러오는 구두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공원 정문 앞을 지나가는 한 구두닦이 소년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너 말이야. 여벌의 구두가 있나?”

구두닦이 소년은 케이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두요? 집에는 있는데…… 왜요?”

“내가 네가 신은 구두를 은화 한 닢을 치르고 산다고 하면 주겠니?”

케이가 고개를 숙이곤 소년에게 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당연하죠! 은화 한 닢이면 당장 집에 가서 새 구두를 사 신으면 그만이에요!”

“자, 여깄다.”

케이는 씨익 웃으며 소년에게 은화를 내밀었다. 소년이 얼른 은화를 잡으려고 하자 품 안에서 동전 몇 개를 더 꺼내며 말했다.

“그걸 닦아서 주면 동전도 주마.”

그러자 소년이 밝아진 얼굴로 제 구두를 벗어서 맨발로 얼른 제 구두를 닦았다. 그러고는 케이가 내민 은화와 동전들을 받아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하며 맨발로 돌아갔다.

엘리자베스는 아무리 그래도 남의 구두를 훔쳤다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리고 케이를 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말했다.

“왜. 더러운 길거리 소년이 신던 구두는 아무래도 못 신겠나 보지?”

“그런 게 아니라…….”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케이가 불쑥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제 구두를 벗었다.

“너…….”

그러곤 맨발로 제 구두를 엘리자베스에게 신기기 위해 엘리자베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럼 이걸 신어. 난 맨발로 다녀도 그만이니까.”

“맨발로 다니다가 다치면 어떡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코웃음을 쳤다.

“맨발로 다녀도 안 다쳐. 특히 리오든 북부에서는 말똥 밟는 것 외에는 크게 다칠 일 없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커다란 신발이 제 앞에 놓이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싫어.”

“왜. 나도 평민이라서?”

엘리자베스는 왜 케이가 늘 저렇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한 번도 케이를 평민이라거나 노동자 계급이라고 먼저 얘기한 적이 없는데. 왜 늘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귀족 취급할까.

엘리자베스는 치미는 짜증을 느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제대로 된 하이힐이 아니면 싫어.”

“그럼 사가지고 오지.”

케이가 단숨에 일어나서 정말 구두를 사러 갈 것처럼 굴자 엘리자베스가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너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뭘?”

“나한테 화났으면서 아닌 척하고 날 자꾸 초조하게 하잖아.”

“뭘 화나.”

케이는 따가운 햇볕 때문인지 엘리자베스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눈을 찡긋했다.

“내가 억지로 결혼을 강행했으니까. 화가 났겠지. 그 자존심에 맘에 차지도 않는 여자한테 청혼을 해야 했으니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아, 그거’라고 말하며 맨발로 엘리자베스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엘리자베스의 맨발에 제 신발을 신겼다.

“일단 신고 있어. 괜히 발 다치면 어떡해?”

“……다칠 일 없다며. 방금.”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넌 내 약혼녀야. 그러니까 내가 널 다치지 않게 보호하는 건 당연한 거야. 억지로 결혼을 했든 자의로 결혼을 했든 그건 변하지 않아. 그리고 너도…….”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따가운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앉아 있었고 엘리자베스는 벤치 위에 앉아서 그늘 막 안에 있었다. 케이는 눈이 부시다는 얼굴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너도 날 선택했으니 이제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거지같은 안목이었지만 네가 고른 남자가 이 평민이니, 이제부터는 나한테 신실하게 굴어.”

“신실……?”

“그래. 다른 놈들한테는 눈길 주지 말란 말이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비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다른 놈들한테 눈길이라니.

엘리자베스는 2년 전부터 내내 단 한 사람만을 좋아해왔다. 남녀간의 애정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도, 소유욕과 질투, 독점욕 같은 더러운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도 모두 케이 때문이었다. 케이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 다른 놈한테 눈길?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흉내 내는 전형적인 약혼자의 모습이 너무도 우습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앞으로는 적어도 케이가 이만큼은 자신에게 눈 맞춰주리라는 사실이 또 너무 따뜻해서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그래. 그런 날도 있었다.

케이도, 엘리자베스도 조금씩 천천히 서로에게 가까워지리라는 믿음을 가졌던 날도 있었다. 서로의 본질이 다르고, 서로의 배경이 다르더라도,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리라 믿었던 날도 있었다.

약혼을 마치자마자 로버트 하커가 케이를 데리고 수많은 사교의 장에 돌아다니기 전까지는. 그리하여 케이가 로버트 하커가 벌이는 수많은 사업 중에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 * *

케이는 그 뒤로 이어진 2년 정도의 지리멸렬한 시간을 떠올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결혼을 무르길 바랐다. 클레몬트 공작가가 둘의 결합을 통해 전쟁에 발을 담그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케이가 로버트 몰래 알아본 바로 클레몬트 공작가는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 부채를 메우기 위해 로버트 하커의 뒷닦이 노릇도 마다치 않으며 전쟁이라는 사업에 제 자리를 얻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은 조금도 듣지 않는 고집불통이었다.

‘환심을 사놓으라고 했더니 그 여자의 자존심을 건드려놓았구나. 여자들이란 원래 자존심을 다치는 게 무서워 인생을 망치는 작자들이야. 그 공녀 년은 지금 네가 갖고 싶어서 눈이 시뻘건 게야.’

케이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엘리자베스가 자신과의 결혼을 원하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뿐이었다.

소유욕.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고분고분하지 않기 때문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것이 되지 않기 때문에 케이를 사랑하는 듯이 착각한 것이다. 케이는 그렇게 여겼다.

그래서 그 뒤로 마치 엘리자베스의 농노가 된 것처럼 굴었다. 엘리자베스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술에 취해 부르면 가기 싫은 곳이라도 갔고 아무리 난리를 쳐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에게 질리기를 기대하며.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결코 질리지 않았고, 케이의 속을 끊임없이 난장판으로 휘저어놓았다. 차라리 이대로 결혼해서 함께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만큼.

그래. 너무 방심했던 거다.

그래서 막상 엘리자베스가 결혼식을 일주일 남기고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케이는 그 안온함에 취해 있던 나머지 그토록 외로워졌던 거다.

원래 늘 혼자였으면서. 새삼스럽게.

케이는 칼몽 여관 1층의 문을 열고 펍 테이블에 엎어진 엘리자베스를 보고 굳어진 듯이 서 있었다.

널 가지고 싶다.

내 인생에서 허락되지 않는, 내가 가장 가지고 싶은 것…….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 옆에 꾸벅꾸벅 졸던 케빈이 눈을 떴다.

“교수님은요?”

“마차에서 졸고 계시다. 모시고 가.”

그 말에 케빈이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났다. 그러곤 케이를 지나치려다 말고 그를 힐끗 보았다. 케이가 물었다.

“왜?”

“아뇨. 그…… 엘우드 밀이라는 사람, 어떻게 아세요?”

케빈이 조심스럽게 묻자 케이가 살짝 돌아서서 케빈에게 대답했다.

“그건…….”

“혹시 댁도 저 공녀님이랑 같이 수도원에서 봉사했어요?”

“수도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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