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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50화 (5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50화

30분 후에 케이가 내려왔을 때는 잔뜩 취한 엘리자베스와 루이 니콜라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 하는 케빈 퍼킨이 1층 펍에 자리하고 있었다.

케이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다가 시선을 돌려 여관의 주인장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여관 주인장은 시큰둥한 얼굴로 케이를 외면할 뿐이었다.

케이는 손에 들고 있던 수표는 품 안에 집어넣고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리고 케빈 퍼킨에게 눈짓했다. 케빈은 잔뜩 취해 흐느적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서 잔뜩 옹송그린 어깨를 하고 케이의 앞으로 걸어왔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저분은 너 따위가 같은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케이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어조로 말하자 케빈이 겁먹은 눈으로 항변했다.

“제가 저 테이블에 앉힌 거 아닌데요…… 저랑 루이 니콜라스 교수님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오신 거예요…… 답답하다고.”

“뭐가 답답하다는 거야?”

케이가 황당하다는 듯이 묻는 사이에 엘리자베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맥주 한 잔 더 주쇼!”

엘리자베스의 행동에 케이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이게 무슨…….”

어깨는 자신의 두 배인데다가 말투는 험악하고 표정은 더 험악한 케이의 분노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던 케빈은 서둘러서 엘리자베스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케이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엘리자베스의 어깨에 손을 대려는 케빈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밀어내버리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케빈에게 말했다.

“넌 네 잘난 교수님이나 챙겨.”

케이의 말에 케빈이 더듬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얼른 루이 니콜라스 교수를 일으켰다. 그러나 루이 니콜라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루이 니콜라스 교수는 케빈이 제 어깨를 잡으려고 하자 푸드덕거리며 케빈에게 소리쳤다.

“케빈 퍼킨! 케빈 퍼킨!”

“네, 네! 교수님!”

케빈이 대답하자 루이는 케빈의 셔츠 깃을 쥐더니 제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안경을 쓴 눈으로 케빈을 노려보았다.

“넌 책 제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엉? 저 짐승처럼 커다란 남자가 겨우 5천 파운트의 돈으로 내 책 제목을 [맛있고 신선한 우유 보관법]으로 바꾼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루이 니콜라스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빨개진 볼로 소리쳤다.

“몇 번이나 말하죠? [엘우드 밀의 당신의 우유를 맛있고 신선하게 보관하는 법]이라구요. 왜 자꾸 엘우드 밀을 빼는 거예요!”

“엘우드 밀이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우유를 보관하는 법은 맞지 않소!”

“엘우드 밀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럼 우유를 뺍시다!”

“우유를 왜 빼죠? 실제로 이 논문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저온 살균을 통해서 우유나 와인의 맛을 유지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텐데! 그럼 우유 대신 와인으로 해요.”

“그거나 그거나!”

“우유랑 와인은 전혀 다른 거예요. 루이 경, 생각은 하고 사나요?”

“뭐…… 뭐요?”

케이는 도무지 이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로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케빈을 노려봤다. 그러나 케빈으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루이 니콜라스는 케빈보다는 커다란 성인 남성이었고 지금은 무척이나 격분한 상태였다.

케이는 쩔쩔매는 케빈과 엘리자베스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루이 니콜라스를 보다가 분노를 참지 못하며 루이 니콜라스 교수의 멱살을 쥐고 일으켰다.

“이, 이, 이게 뭐하는 거요?!”

니콜라스 교수는 놀란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취한 와중에도 후원자의 정체는 알아본 건지 은근히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케이가 그런 니콜라스 교수를 경멸의 눈빛으로 보며 쏘아붙였다.

“5백 파운트를 추가로 지불하지. 당신의 우유든, 우리의 우유든 책 제목은 내 말대로 해. 그리고 내가 지금부터 마차로 당신을 모셔갈 동안 닥치고 있어. 숨도 쉬지 말라고.”

케이가 니콜라스 교수의 멱살을 쥐고 있는 사이, 엘리자베스가 여관의 주인장으로부터 맥주를 또 한 잔 받아들었다. 그걸 본 케빈이 곤란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에게 가서 그녀의 손에서 맥주를 빼앗아 들었다.

“이,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글쎄!”

케빈의 만류에도 엘리자베스가 잔을 다시 빼앗기 위해 흐느적거리자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그 순간, 루이 니콜라스 교수의 딸꾹질이 케이의 귓가에 들려왔다.

“딸꾹.”

“내가 숨도 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케이는 천둥처럼 고함을 치며 루이 니콜라스를 들어올리다시피해서 여관에서 끌어냈다. 나가면서 케빈에게 경고라도 하듯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쾅! 굉음을 내며 문이 닫혔다. 여관 주인장은 카운터에 앉아 욕을 해댔다.

“저런 미친 놈…… 전에 와서는 손님 중에 남자를 다 내보내라고 하질 않나 이제는 문짝을 부수질 않나.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상한 것들이 꼬여서…….”

주인장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와 퍼킨을 노려보았다. 퍼킨은 혀를 차며 엘리자베스를 얼른 의자에 고정시켜두려고 노력했다. 노력만 했다.

* * *

문 밖으로 나간 케이는 루이 니콜라스를 부축해 마차에 짐짝을 얹듯이 얹었다. 마부는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케빈 퍼킨이 직접 말을 몰아온 듯싶었다.

케이는 자꾸만 엘리자베스를 힐끔거리는 저 기분 나쁜 소년을 펍에서 끌고 나오기 위해 다시 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루이 니콜라스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대체 왜 왕립학술원에서 공부하는 게 싫다는 거요? 엉? 이오페아 어디에서 과학자로 살든 내 밑에서! 그것도 그레이트 레본의 왕립학술원에서! 배웠다는 건 큰 명예가 될 텐데!”

케이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명예 같은 건 관심 없나 보지.”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케빈이 주는 물을 마시고 있었다.

“왜 명예에 관심이 없소? 과학자한테 제일 중요한 게 명예야. 명예! 사명감. 충성심. 명예! 그 중 제일이 명예란 말이오!”

케이는 루이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돈이야. 루이 경. 당신을 봐. 돈 5천 파운트에 제 논문도 팔아넘기지 않나.”

케이는 그 말을 하며 품 안에서 수표를 꺼내어 루이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루이의 눈앞에 손가락을 가져대며 또박또박 말했다.

“술이 깨더라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거요. 이 수표는 내가 잘 아는 사업가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거고, 그 사람의 이름은 케이 하커, 레본에서 제일가는 사업가의 아들이야. 신용을 중시하는 사람이지. 나와의 약속을 깨면 당신은 하커 가와의 약속을 깬 거요.”

케이의 말에 루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 하커……? 하커라고?”

루이는 속이 좋지 않은 듯 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커가 왜 엘우드 밀하고 친하지?”

케이는 그 말에 뒤를 돌았다. 루이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챈 케이가 단번에 물었다.

“당신, 엘우드 밀…… 아니, 나를 본 적이 있어?”

“아니, 아니. 본 적은 없소. 본 적이 있으면 당신 얼굴을 보고 바로 알았겠지. 하지만…… 케빈한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케빈을 처음 추천한 게 당신이었잖소, 엘우드 밀.”

루이는 마차 문을 닫고는 열린 마차 창문틀에 얼굴을 기댄 채 품 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그때는 꽤나 귀족적인 필체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실제 모습이랑 영 딴판이군. 응? 케빈이 글을 잘 몰랐을 때 가르쳐준 것도 당신이고, 케빈의 천재적인 연구 결과를 직접 적어서 학술원에 보내는 편지에 동봉한 것도 당신이었잖소. 나중에 알았지만.”

루이는 제 품 안에서 성냥갑을 꺼내 성냥을 키려다가 다섯 번쯤 실패했다. 그 모습을 보던 케이가 다가와 제 품 안에 있던 성냥갑을 꺼내 루이에게 불을 붙여줬다. 루이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흡입하고는 펍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어린 천재 놈은 나중에 분명 나보다 대단한 과학도가 될 거요. 저런 옥석을 알아봤다면 당신도 범상한 사람은 아니지. 그럴 줄 알았소.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당신을 학회에 추천해줄 수도 있소. 왕립학술원이 고리타분하다니.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 비상한 머리를 가진 평민 놈처럼 힘이 없지만 재능이 빛나는 사람은 돈이나 권력, 둘 중 하나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법이지.”

케이는 루이의 말을 들으며 루이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물론 댁은 돈이 있는 것 같지만.”

루이의 말에 케이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내가 돈 있는 평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는 거군, 그러니까. 꽤 귀족적이고…… 비상한 머리를 가진 과학도처럼 보였다는 거지.”

케이의 말에 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렇지 않소? 지금은 또 귀족 말투를 쓰는군.”

술에 쩌든 채로 초점도 맞지 않는 눈으로 루이가 꽤나 날카롭게 정곡을 찔렀다.

케이는 루이에게 말했다.

“당신의 마부인지 연구원인지를 데려오지.”

케이는 그렇게 말하고 케빈과 엘리자베스가 있는 여관 안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케이는 리오든 서부 광산에서부터 시작된 차디찬 겨울바람을 느끼며 코트 자락을 여몄다. 아무리 꽁꽁 싸매도 바람은 코트 안을 파고들어왔다. 지금 케이의 머릿속에 자꾸만 엘우드 밀이라는 이름이 파고들어오는 것처럼.

‘나 켈토로 가지 않을 거야.’

‘난 이제 날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할 거야.’

‘난 과학자니까.’

리오든에 눈인지 비인지 모를 것이 내리던 날 엘리자베스가 벙벙한 케이의 코트를 입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하던 말이었다.

케이는 뽀얀 입김을 불어내며 그런 말들 사이로 작년 이맘때쯤 엘리자베스가 술에 잔뜩 취해 귀족들의 사냥터로 자신을 불렀던 날의 기억이 스미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는 기괴한 드레스와 기괴한 머리를 한 여자들과 케이가 보기에는 영 쓸데없는 말만 지껄이며 엘리자베스의 가슴이나 힐끗거리는 신사 새끼들 사이에서 케이는 고요히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불러놓고도 창가에 서 있는 케이에게 오라고도 하지 않고 가라고도 하지 않고 거기에서 ‘친구들’과 종알거리기만 했다. 케이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예술, 건축, 문학에 대해 토론하면서 말이다.

그날 엘리자베스가 결국 술에 취해 뻗어버렸을 때, 그래서 케이가 그녀를 마차에 싣고 돌아오던 길에 엘리자베스가 뭐라고 했던가?

‘내 친구들 어땠어?’

‘…….’

‘말해봐. 네 친구들하곤 어떻게 달랐어? 재미없었어? 왜 뚱하게 서 있기만 했어?’

왜 뚱하게 서 있었냐고?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까.

케이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고분고분한 마부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울기 시작했다. 울고 싶은 건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케이였는데도.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이해할 수 없어서 한참 그녀가 울도록 내버려두다가 한참 후에 이를 악물고 대체 왜 우는 거냐고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난 널 이해하고 싶어. 널 사랑하니까. 그런데 너는 날 조금도 알고 싶어 하지 않잖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넌 날……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알아가고 닮아가기 마련인데 우린 그럴 수가 없잖아.’

케이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펍 문 앞에 도착해서도 문을 열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케이는 끊임없이 같은 생각을 했다.

엘우드 밀이라는 남자를 실제로 본다면, 그는 분명 엘리자베스와 무척이나 닮았을 것이라는.

케이가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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