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49화
“당신…….”
루이 니콜라스 교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루이 니콜라스는 케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훑으며 말끝을 흐렸다. 엘리자베스는 문틀에 기댄 채로 몸이 석고상처럼 굳는 기분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케이 하커. 이 자식. 왜 갑자기……!’
엘리자베스는 주먹이 하얘지도록 꽉 쥔 채로 여유롭게 의자를 가져다가 삐딱하게 앉는 케이 하커의 움직임만 주시했다. 케이 하커가 엘우드 밀의 행세를 하는데도 자신은 이 상황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원래는 ‘엘우드 밀’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거나 아예 실제 엘우드 밀이 쓰고 다니던 것과 같은 가면을 쓰고 만날 계획이었다. ……정 안 되면 윌리엄을 끌어들일 생각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지금 제 눈앞에서 오만하게 웃고 있는 케이 하커, 이 사람은 자신의 계획에 없었던 변수였다.
그때, 루이 니콜라스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학 교육은 받았습니까?”
엘리자베스는 루이 니콜라스 교수가 장고 끝에 한 말이 겨우 그 딴 질문이라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본의 왕정은 아카데미만을 정식 교육기관으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대학이라고 불리는 기관이 이오페아 곳곳은 몰론 레본에도 사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존재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땅이 꺼질듯 숨을 내뱉는 것을 느낀 케이 하커가 실소하며 말했다.
“아뇨. 온도니 습도니 하는 것들이 꼭 대학 교육을 받아야 아는 겁니까? 나도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공장에서 일을 오래해보면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레버를 더 꽉 조여야 한다는 걸 알게 되고, 계량기로 온도, 습도, 압력을 조절하는 법도 알게 되지요.”
케이의 대답은 무례하고 무식했다. 심지어는 평소처럼 귀족의 흉내라도 내던 억양은 갖다버리고 평민의 억양을 쓰며 노동자의 높낮이와 강세를 주어 문장을 말했기 때문에 루이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뭐, 뭐라구요? 미안하지만 다시 말해보겠소?”
케이는 멍청하게 되묻는 루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위악적인 웃음을 보며 두 사람이 처음 만나던 날을, 그날의 더럽고 건방지던 소년을 떠올렸다.
그날의 예감은, 그 소년이 나를 구원해줄 대단하고 야단스러운 것이리라는 생각은, 얼마나 부질없고 헛된 것이었나.
이제부터 내 인생은 내가 구원해야 했다.
“다시 말해주지. 교수 양반. 온도니 시간이니 하는 것들은 당신네들 지식인들이 말만 유식하게 했을 뿐이지 전부 살림을 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던 것들이오. 우리가 알던 걸 당신들이 당신네들의 어려운 말로 풀어서 설명하면…….”
케이 하커는 일부러 말을 굉장히 천천히 하면서 조롱조를 담아 루이를 보았다.
“……당신네들은 그런 걸로 여기저기서 표창장을 받고 서로 박수를 쳐주지. 안 그래?”
루이는 이번에야 말로 케이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듯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학술적인 접근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소!”
벌컥 성을 내는 루이를 보며 케빈은 안절부절 못하더니 마치 루이의 물을 챙겨줄 것처럼 엘리자베스 옆에 있는 협탁으로 와서는 엘리자베스의 등을 쿡쿡 찔렀다.
“어쩔 거예요? 둘이 저렇게 싸우게 둘 거예요? 누구예요, 저 사람!”
케빈은 얼른 속삭이고는 물병을 들어 잔에 물을 채웠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을 노려봤다. 이 모든 게 누구 때문인데!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속삭였다.
“가만히 둬.”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이 판을 뒤집어엎고 싶어서 루이를 자극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엘리자베스가 알기로 케이는 판을 뒤집고 싶다면 당장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이곳을 뛰쳐나가는 사람이지 이렇게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아니었다.
“간단하든 아니든 나는 상관없다 이거요.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나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당신들이 그걸로 꽤 멋들어진 논문 하나를 완성하고 그 덕에 자라난 당신들의 명성에 내 이름을 싣는 거.”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거야.”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며 말을 끝맺었다. 마치 이게 네가 원하는 게 맞으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케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루이를 보며 다리를 꼬았다. 거만한 자세로 앉은 케이가 말했다.
“그러니 이건 거래겠지. 단순한 거래.”
한 마디로, 대학교육이니 뭐니 하는 자세한 인적 사항은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제시하는 군더더기 없는 거래 조건이 맘에 들었다.
하지만 루이는 큰 모욕을 당한 얼굴로 콧수염을 꼬는 것도 그만두고 말했다.
“나는 엘우드 밀 씨를 직접 만나고 엘우드 씨의 가능성을 판단해보고 싶었던 겁니다. 여기 있는 케빈 퍼킨도 내가 직접 제자로 받아들인 아이입니다. 당신이 대학교육을 받았든 아니든 당신이 과학도로서의 열의와 재능이 있다면 당신을 기꺼이 우리 학술원의 학생이나 연구보조로…….”
그 말을 끊고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엘우드 밀 씨는 그런 고리타분한 교육 같은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루이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공녀님, 방금 말씀하신 언사는 무척이나 부적절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왕립학술원은 국왕 폐하의 이름하에 후대를 위한…….”
그래.
후대를 위하여.
그게 왕립학술원의 정문에 걸려 있는 청동 판에 쓰인 글씨였다.
엘리자베스 역시 왕립학술원의 위대한 설립 목적 같은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대가 지칭하는 바가 과연 리오든의 모든 다음 세대를 일컫는 것인가? 왕립학술원을 구성하고, 그 주류를 이루며, 결국 그곳에서 나와 역사에 이름을 싣는 것은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답은 정확하다.
벨벳으로 만든 톱햇을 쓰고 짧은 재킷을 입고 말똥이 질척이는 땅 한 번 밟지 않고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신사들. 남자. 그리고 귀족들. 그들이 그들의 후손 중 또 남자, 귀족들을 위해 준비한 지식의 보관창고가 왕립학술원이 아닌가.
엘리자베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실례지만.”
“네?”
루이는 말을 하다가 문득 엘리자베스의 차분한 목소리에 담겨있는 분노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또박또박 말했다.
“공녀의 말을 끊기 위해서는 ‘실례지만’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한 거예요. 루이 경. 나는 이 자리에 두 사람의 중재자로 나서기 위해 왔지, 구경꾼으로 온 게 아닙니다. 나를 시끄러운 잡상인 취급해서는 안 되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루이 니콜라스는 입을 금붕어처럼 뻐끔 뻐끔 거리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 그렇지요. 저는 공녀님을 잡상인 취급한 게 아니라…….”
“실례지만, 루이 경,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하게 줄이죠. 이쪽의 조건은 간단해요. 루이 니콜라스, 케빈 퍼킨의 이름 아래 엘우드 밀 씨의 이름을 실어주세요. 그 대신…….”
엘리자베스는 유수의 출판사를 알아내 거기에 논문을 싣게 해주겠다, 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케이 하커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5천 파운트를 주지. 연구비로 말이야. 후원금이라고 생각하면 좋겠군.”
케이의 말에 루이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케빈은 들고 있던 물 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며 삐뚜름한 미소를 짓더니 엘리자베스에게 속삭였다.
“쓸데없이 말을 길게 할 필요 없잖아. 저런 놈들한테 가장 부족한 건 돈이라고.”
* * *
엘리자베스는 콧대 높은 루이 니콜라스 교수가 케이의 돈 앞에 순식간에 굽실거리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는 루이 니콜라스 교수가 잠시 여관 1층 펍에 내려가 있는 사이에 품 안에 있던 작은 수표에 제 이름과 5백 파운트를 적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내려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문을 닫고 케이에게 소리쳤다.
“이게 뭐하는 거야?”
“뭘 뭐하는 거야. 과학자가 되고 싶다며. 왜 네 이름으로 안 하는지는 알 것 같으니 내가 조금 일을 편하게 해주는 거야.”
케이는 수표에 쓴 글씨 잉크가 마르도록 입으로 후 소리가 나도록 수표를 불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공장장의 태도였다.
“내가 너한테 돈 달라고 했어?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네가 우리 아버지한테 가서 이제까지의 소동극은 모두 네 잘못이다, 파혼을 하더라도 책임은 너한테 있다 그렇게 얘기하고 나한테서 떨어지는 거라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고개를 삐딱하게 든 채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게 하는 거고, 이건 이렇게 하는 거야. 무슨 문제야. 왜? 더러운 노동자의 돈 같은 건 받으면 두드러기가 나나? 걱정하지 마. 네 아버지를 보니 그럴 일은 없어 보이더군.”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 할 수 있었다면 당장 케이의 뺨에 주먹을 먹였을 거다. 케이의 이마에 선명한 상처가 아직 남아 있지만 않았다면 분명히.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다가 문을 벌컥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거기에는 루이 니콜라스의 술시중을 드는 케빈 퍼킨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케빈 퍼킨이 술을 가지러 계단 가까이로 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내려가 케빈의 멱살을 쥐고 부엌으로 데려갔다.
“너……!”
엘리자베스가 분노한 얼굴로 케빈을 노려보자 케빈이 더듬더듬 말했다.
“저, 저도 진짜 공녀님 이름은 말 안하려고 했다구요. 근데 막상 교수님 앞에 서니까 얼마나 떨리던지. 공녀님이 교수님 앞에 선 제 심정을 아세요? 눈물이 다 났다니까요!”
“그랬어도 너는 나와의 약속을 저버린 거야, 케빈 퍼킨.”
이 케이 하커 다음 가는 개자식. 미래에서 네가 최초로 발명한 퀴닌 합성식을 내가 훔쳐서 약간의 죄책감이 있었는데 이제 없어졌어!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꾹 참으며 말했다.
“……그래서 출판사와 신문에 논문을 싣는 건 얘기해 봤어?”
“네네. 교수님은 좋아하세요. 뭐 사실 출판사에서 돈이 안 되니까 안 찍어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온 살균 같은 고리타분한 논문을 실어줄 출판사가 있어요?”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대신에 책 제목은 저온 살균 같은 걸로 하면 안 되겠지.”
엘리자베스가 아무리 윌리엄 경의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한들, 안 팔리는 책으로는 엘우드 밀을 유인할 수가 없었다.
“그럼 뭐로 하나요?”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5천 파운트에 신이 나서는 술을 마구잡이로 시키고 있는 루이 니콜라스 교수를 흘끔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당신의 우유를 신선하고 맛있게 보관하는 법.”
“네에에에?”
케빈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시선 끝에 있는 루이 니콜라스 교수를 보았다.
“저 고리타분한 양반이 그걸 허락할 리가……!”
“허락해야지. 당연히 해야지.”
엘리자베스가 이를 악물고 제 논문에 일어날 일 같은 건 전혀 모르는 듯한 순진한 루이 니콜라스 교수에게서 시선을 돌려 케빈을 내려다보았다.
“넌 나한테 빚을 진 거야. 날 배신했잖아. 그러니까 반드시 이번 일은 성사시켜야 하는 거야! 루이 니콜라스 교수한테 술을 진탕 먹여서 계약서를 쓰게 하든 어쩌든 분명하게 전해. 논문 제 1저자는 루이 니콜라스 교수가 되겠지만 책 제목은 [엘우드 밀의 당신의 우유를 신선하고 맛있게 보관하는 법]이 되는 거라고. 그게 5천 파운트에 자기 논문을 팔아넘긴 값이라고!”